왠지 낯익은 이야기처음 접하는 작품이었고, 우리나라 작가가 쓴 시리아 난민 소년의 이야기라는 색다른 면이 있는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였다. ‘유령 아이’로 지내야하는 시라아 난민 마이크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엠마와 같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라 낯익은 것인가 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 작품이 떠올랐다. 자기 앞의 생소외된 이들끼리의 연대라는 면에 공통점이 있었을까? 실상, 이 작품은 연대라기보다는 마이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결말로 마무리되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마이크를 기억하고 눈물을 훔치는 마리아 아주머니가 있고, 유령처럼 존재가 사라져야 존재할 수 있는 마이크의 이야기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속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와 닮아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마이크는 누구보다 꿈을 이루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 꿈이래봐야 번듯한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되는 것이지만 그 꿈이 마이크에게는 너무나도 멀고도 강렬한 꿈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관광객 호객꾼으로 하루에 일당 몇 푼을 건지는데 급급한 것. 호객의 대상이 되는 관광객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 마이크는 위태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마이크의 하루는 보금자리를 잃고 떠돌이로 살아가는 마이크의 실질적인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이크가 선택한 것은 난민의 삶이었을 뿐이다.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엄마를 찾아 그리스로 온 엠마 역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엠마는 엄마 옆이면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엠마를 기다리는 엄마도, 엠마라는 존재를 인정해주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외로운 마이크와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존재가 불투명한 이들에게는 그조차 사치였을까? 개운치 않은 장면들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 이 작품은 다 읽고 가라앉는 마음에 쉽게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