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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곳에
도로시 B. 휴스 지음, 이은선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미국 ‘느와르의 여왕’ 이라 불리는 도로시 B. 휴스의 1947년 작품입니다. 하드보일드와 느와르 부분에서 유명한 여성작가라네요. 그녀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3년 뒤 니콜라스 레이 감독,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고독한 영혼>이란 영화로 만들어져 <타임> 지에서 선정한 ‘이 시대 최고 걸작 100편’ 중 한 편으로 선정됐습니다. 이 책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허무와 퇴폐로 둘러싸인 LA를 배경으로 한 연쇄 살인마의 정신적 파탄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항공 비행사로 참전후 LA로 돌아온 젊은 전역 군인인 딕슨 스틸. 그는 프린스턴 대학시절 빈부 격차에 의한 신분의 뼈저림을 느끼다 군에 입대, 군에서 신분 상승의 대리 충족을 맛보며 마음껏 즐기며 생활하다 제대 후 다시 가난한 현위치로 돌아오자 정신적 공황 상태와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친구가 빌려준 아파트에 머무르며 부자 삼촌이 매월 보내주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딕슨의 바램은 오로지 사랑스런 애인을 만드는 것. 하지만 그의 이면에는 LA를 공포에 떨게하는 여성 연쇄살인마라는 두 얼굴이 존재합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은 처음부터 딕슨 스틸이 연쇄살인마임을 밝힘과 동시에 주인공 딕슨의 시점으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작가는 마치 주인공의 뒤를 24시간 따라다니는 관찰카메라처럼 딕슨의 행동과 생각 하나하나를 철저히 주인공의 관점과 시각에 맞춰 지극히 무미건조한 문체로 써내려갑니다. 딕슨이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음식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세밀하게 묘사되는지라 독자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자연히 그의 심리와 행동에 빠져들고 동화됩니다.

딕슨은 다수의 여성을 살인한 흉악한 살인자지만 이 책에는 살인 장면이나 피가 튀는 그러한 선정적인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연쇄살인마인 주인공이 전혀 무섭거나 사이코스럽게 다가오지도 않고요. 오히려 꿈을 꾼 듯한 전쟁에서 돌아와 현실에 고독해하며 사랑하는 여성을 갈구하는 방황하는 가여운 젊은이로 비춰질 뿐입니다.
이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네 명입니다. 주인공 딕슨과 그의 여친 로렐 그리고 딕슨의 전우이자 현직 형사 브루브와 그의 아내 실비아. 하지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입니다. 희생자들도 여성이고 딕슨의 숨겨진 이면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친구인 형사 브루브가 아닌 로렐과 실비아입니다. 여성만 살해하는 연쇄살인마가 늘상 여성을 그리워하고 그러다가 여성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후 돌아온 한 젊은이가 겪는 정신적 방황과 고독, 비뚤어지는 심리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붕괴되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담담한 필체로 그려냈습니다. 촘촘한 글자 배열로 인해 제법 분량이 있는 이 작품이 딱히 자극적이거나 긴장감이 크게 있지도 않은데 페이지는 희안하게 술술 넘어갑니다. 그게 이 책의 매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보면 작가의 감정 개입이 철저히 배제된 너무나 무미건조한 문체에 딱히 반전이나 극적인 전개도 없는, 마치 조미료가 전혀 안들어간 날 것의 가공안된 음식을 먹는 밋밋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현대 독자에게 과연 이 고전 미스터리가 어떻게 어필할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