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리모 레비는 한겨레에 종종 글을 기고하는 서경식 선생으로 인해 알게 된 작가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았고, 그때의 일로 자살한 많은 이들을 질타하며 반드시 살아서 다른 이들도 알게 해야 한다고 주창했던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도 엘리베이트 계단으로 떨어져 자살을 했다. 왜 그랬을까? 라고 서경식 선생이 물었을 때, 나 역시 왜 그랬을까? 라고 되물었다.
 
놀라운 것은, 이 증언록을 읽으면서도 한 개인의 끔찍한 경험으로 읽히지 역사적으로 독일의 그 잔혹함이 몸에 와 닿지 않았다. 이미 영화나 다른 매체로 아우슈비츠에 대한 상식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프리모 레비 자체가 매우 이성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며, 증오란 한 얼굴을 가진 개인에게 향한 것이지 불특정한 어떤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이성적으로 글을 썼다고 했다.
 
p.268
성격상 나는 쉽게 누구를 증오하지 못한다. 나는 증오란 동물적이고 거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속에 복수심 같은 원초적인 욕망이나 사적인 앙갚음을 해본 적이 없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나였다면? 구구절절하게 나의 아픔을 내세워 독일을 질타했을 텐데... 아니, 그 보다 더한 일도 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배가 고팠다. 프리모 레비나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배고프고 헐벗음이 전이 된 것인지... 나는 꾸준히 배가 고프다고 느꼈고, 이렇게 배불리 잘 먹고 사는 내가 부끄러웠다. 지금 이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테러든 전쟁이든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을 텐데...
 
249
움직이는 거라면 뭐든 좋으니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63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려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65
살아 있는 사람은 요구가 많다. 죽은 사람들은 기다릴 수 있다. 우리는 다른 날들처럼 일을 시작한다.

 

아우슈비츠의 가해자, 더 광범위하게 전쟁을 발발시킨 자들, 우리나라로 눈을 돌리면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및 그 밖의 모든 이들. 우리는 왜 잠자코 있는가? 대선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 한 정치인이 전두환을 찾아갔다는 뉴스를 보며 어이없었던 기억이 난다. 왜 우리는 그를 후세인처럼 처형하지 못하는가? 여전히 그에게서 콩고물을 먹은 권력들이 많다는 것이겠지.

 

파시즘에 대한 생각을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 존재라니. 점점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인에게 의지 아닌 의지를 하고 있는 우리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텔레비젼이든 연예인이든, 나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교묘하게 우리는 농락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과 지배에 대해서 눈을 돌리고, 잠잠히 나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다시 푸코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권력은 위로부터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생산된다.'

 

혹시,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은 후, 이제 안심했다고 생각한 순간, 현실에서 또다른 파시즘 유형을 목도하고 절망했던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
데브라 딘 지음, 송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가슴 절이며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애절함에 대해서 알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그 애절함이 닳아 사라지면 마음도 마냥 갈피를 못 잡고 흩어져 버린다. 책을 덮으며 기억에 대한 생각을 했다. 영화 ‘내 곁에 있어줘’의 그 긴 여운처럼...


이 책을 읽기 전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먼저 읽었다. 서경식 선생이 프리모 레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유태인 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치에 감금된 후 생존하였으며, 그의 삶을 보며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함께 빗대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였을까. 마리나의 전쟁 외상의 경험이 온전히 다가왔으니.


전쟁이란, 인간을 더 이상 인간답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악의 설정이다. 이 설정을 데브라 딘은 ‘알츠하이머 병’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갔다.


p.156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시간이 갑자기 단축되고 부서지면서 그녀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마리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는 더 이상 그녀에게 의미가 없다. 그녀와 함께 한 드미트리도 그녀에게는 안중에도 없다. 마리나는 과거 속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자신이 화해해야 할 과거를 들추고 있는 중이다. 그 화해란 자신보다 먼저 죽어간 많은 넋들이며,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자신, 그리고 미술관의 명화들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빈 액자 속 명화를 기억해 내려 애쓰는 마리나와 더 이상 기억해내고 싶지 않은 전쟁에 대한 아픔이 교차하며 가슴을 울렸다. 마리나의 기억을 좇다보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그것은 내가 전쟁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며, 마리나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마리나의 딸 헬렌처럼 이해하고 싶으나 다가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빈 액자 속 명화를 설명하는 마리나의 홍조 띤 얼굴을 상상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긴 호흡으로 표지의 그림을 보았다. 기억의 궁전 속을 헤매던 마리나는 자신의 궁전을 완성해 냈을까. 몇 그램의 초콜릿 무게처럼 가볍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무게의 것들과 화해했을까.


p.209 아냐는 사라진 그림들을 아직도 미술관에 남아 있는 그림들처럼 쉽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져버린 작품을 포함한 모든 작품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을 갖고서 마리나의 기억의 궁전으로 찾아왔다. 마리나가 그 작품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아냐가 집착하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만약 그 그림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아냐는 처음으로 별난 생각에 빠졌다.

“그러면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돼버릴 거야.”


전쟁에 대한 소설도 많고 영화도 많다. 곧 개봉 될 클린틴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이 전쟁영화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고들 있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는 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P.245 여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지만, 마리나는 누구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기억해야 할 얼굴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떨때는 눈앞에 텅 빈 벽만 보일 때도 있었다. 무서웠다. 이렇게 잊어버린다는 것, 삶을 이루는 자은 조각들이 하나 둘 사라져간다는 것. 만약 모든 그림들을 사라지게 그냥 놔둔다면, 마리나도 그 그림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을 추락시키는 전쟁은 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 남의 일로 치부하지 말고 공동체 의식을 발동해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 잘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작품을 제대로 알릴 멋진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부족한 감상평을 쓰고 말았다. 부족한 리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께 감사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남들처럼 서재나 책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 온 위인전이 책장 가득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게 책이란 늘 내게 결핍된 것이다. 지금 당장 읽지 못해도 구입하여 내 책장에 하나씩 쌓아 놓는 것. 그것이 현재 나의 희망이다. 희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내 결핍, 끝내 충족되지 못할 내 인식의 욕구에 조금씩이라도 다가서고 싶은 욕망이다.

헤세를 접한 건, 중학교때였다. 소설 데미안, 누구나 알듯이 성장소설로서 그 작품은 대단할 뿐이다. 이후 나는 그의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사춘기때였으니 그의 글들은 내게 양서와 다름 없었다. 내겐 부모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내게 말을 걸어주고, 나를 다독여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들었으니...

이 책 역시 내게 지금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재촉한다.

게다가 독서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그가 한창 잘 나가던 작가시절에 작가지망생들이 보내온 작품들에 품평을 했던 부분은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어느 순간, 모든 작품들에 좋다 나쁘다의 평을 할 수 없어졌다는 것. 나름대로 모든 작품에 작가의 뜻이 있지 않느냐. 무게 잡지 말라는 것, 독서란, 또는 창작 행위란 결국 나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겠는지.  당신이 지금 유쾌하다면 유쾌한대로, 재미있는대로, 무게 있는 대로, 그 순간이 진정인데, 어떻게 잣대를 대고 말 할 수 있으랴.

서재에 대한 이야기도 내게 감동을 주었다.

내 꿈도 내 서재를 갖는 것이다. 책들을 내 방식대로 분류하여 취하는 것. 이것도 욕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문학과지성 시인선 323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움과 세월이 잔뜩 묻어 나는 작품이다.

가끔 지하철 창밖을 주시하며 읽는, 그의 시는 연신 내 가슴을 울먹이게 했다.

요즘 나는 거울을 자주 본다. 눈 밑 주름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장품도 신경 써서 바꿔주고, 그러다 한심한 듯 거울 속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이듦을, 세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맘 속에서 거부하고 있으니, 아직 나는 세월에 여유가 없다.

나이듦이란, 세월에 좀더 유해지고 혜안을 갖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의 연약하고 섬세한 감수성이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골다공증>을 읽을 때는, 엄마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고, 알래스카 시편들을 읽으면서 북극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상처 5> 에서는 현재의 내 상처를 보는 듯 했고, <귀향>을 읽으며 진정한 그리움에 대한 생각을 했다. 돌아가야만 하는데 어디로 돌아갈 지 모르는 방랑자들에게, 부디 안부를...

내게 詩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슴으로 내뱉은 단어들을 묵은지처럼 담아 두며 내 자신을 다독이는 것이리라.  넋 놓고 꿈꾸는 자 되어 이 세상 떠돌면 어떠리 싶다. 어차피 삶이란 공수레 공수거, 무엇을 더 욕심내면서 살아야 하나.

현실주의자들은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그것이 어쩌면 당연한 삶일 수 있겠지만,

그의 시를 펼쳐 든 순간엔 모든 것이 공기속에 사라지고, 오롯히 나라는 존재가 이 지구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