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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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드럽고 자신만만하고 느긋한 태도를 보자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늘 유쾌하고 멋져 보이던 고등학교 시절의 남자아이들이 떠올랐다. 학생회장을 하면서 인기 최고인 치어리더나 고적대장 여자친구의 숭배를 받던 아이들. 이 아이들은 굴욕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나머지 우리에게는 아무리 쫓으려 해도 달아나지 않고 머리 위에서 윙윙대는 파리나 모기처럼 굴욕이 따라다녔다. 도대체 진화의 원리는 무슨 생각으로 백만 명 가운데 한 명만 내 앞에 서 있는 이 아이처럼 만들어놓은 것일까?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 외에 이런 잘생긴 외모가 무슨 역할을 한단 말인가? 나도 외모의 신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 제시하는 가혹한 기준에서 보자면 상대적으로 평범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기형으로 전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부러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의 이목구비는 완벽했으며, 그의 생김새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들고,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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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0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12월
 
[eBook]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문학동네 소설상 10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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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근대의 물결은 더욱 거세게 밀어닥쳐 평대는 급속도로 팽창해갔다.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오고 마을에 전화가 개통되었다. 당시 장군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상천외한 정책을 한 가지 시행했는데, 그것은 아침마다 동시에 온 국민을 깨우는 일이었다. 이때 그가 사용한 방법은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스피커를 설치해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를 크게 틀어대는 거였다. 그 시간은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장군이 매일 아침 점호를 위해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깊은 산속에 있던 평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노래의 내용은 별로 귀담아들을 게 없었지만 그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새벽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사람들은 투덜대면서도 달콤한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장군은 사람들의 잠을 빼앗아갔고 세상은 더욱 피곤해졌다.


문명을 깊은 산속까지 끌고 오는 데에는 마을 앞을 가로지른 철도에 뒤이어 금복의 공이 누구보다도 크다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 한 대로 운영하던 운수회사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 운행하는 차를 모두 열 대로 늘렸다.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평대로 유입되는 인구도 급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바빠 허둥거렸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이유 없이 속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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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0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eBook]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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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어쩌다가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대신 화장품을 팔러 밖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주었다. 나는 누에처럼 엄마가 차려놓은 밥을 먹고 다시 방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다.

언젠가 오함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다 온 집 안에 비린내가 진동한다며 투덜댔다. 엄마가 방금 전 프라이팬에다 큰 자반고등어 한마리를 구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퍼뜩 그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오래 전, 집에서 자주 벌어지던 소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를 포함해 식구들은 모두 비린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나는 유독 고등어나 갈치 같은 비린 생선을 좋아해 엄마는 식구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나를 위해 자주 고등어를 굽곤 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상위에 올라와 있는 반찬들이 모두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욱국과 고들빼기김치, 조개젓과 감자조림, 뱅어포 등 무엇 하나 특별하달 게 없는 음식들이었지만 이십 년이 넘은 그때까지도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잊지 않고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 식탁 위에 고개를 박고 서둘러 수저를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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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0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연애편지의 기술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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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부터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지수함수적指數函數的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을 밝히는 일을 주저했습니다. 그런 감정적 협잡물이 나날의 영위에 섞임으로써 우리의 지적활동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나는 연구소라는 시공을 가지고, 유사 리만Riemann 다양체를 이용해 기술하는 일을 시도하여 일반상대성이론을 증명하는 등 다양한 수학적 시도를 거듭한 결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오른쪽 비스듬히 뒤에서부터 증명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연구소 내의 특정 영역에서는 러시아의 수학자 메레기에프가 예상했던 대로 항상 단순 βM구조가 성립함을 증명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지극히 한정된 시공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준公準이 성립되지 않고 호프머 나선은 뒤집어지고 테러바초 타원은 하트 모양이 되고 두 개의 평행선은 반드시 만나고 곰보자국은 보조개가 되고 남녀는 반드시 맺어집니다. 이것은 요컨대, 당신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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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2월
 
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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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육체적인 단어다. 헤어진다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단어의 물리적인 실체가, 거리에 대한 실감이, 박상훈을 괴롭게 했다. 사흘이 지나자 어딘가 아파왔다. 아프긴 했지만 상처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살을 파고 뼈를 헤집어 상처를 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처는 계속 이동했다. 때로는 무릎이 아팠고, 때로는 등이 아팠고, 때로는 발뒤꿈치가 아팠다. 마음이 아플 줄 알았는데 몸이 아팠다. 모든 고통은 이별로부터 왔다. 닷새가 지나자 모든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걷고 있다는 게 기적 같았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통은 산발적이었지만 끊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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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