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그림자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1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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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가 한국 작가라면 거의 삼류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고전이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시류에 영합하는 고전만이 살아남고 또 죽는다. 그런데 그 물결의 밑바닥을 타고 흐르는 고전은 따로 있다.
이것을 소설이라기 보다는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의나 우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편의상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작가 역시 모든 단락은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배열해 놓았다. 그러나 이 작가가 소통하고자 하는 그 방식은 절대 쿨하지 않다. 이 자는 찢어진 장갑 하나를 두고 주구장창 떠들 수 있을 인간이다. 지엽적인 곳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작가론을 설파...한다기 보다는 넌저시 암시를 주는 키냐르가 마음에 드는 점은 타자의 자신에 대한 불신을 항상 작품의 바닥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너는 나를 믿지 않겠지, 뭐 이런 식으로. 이건 적어도 '황만근...'류 소설에게는 별로 해당되지 않겠지만 그르니에나 앙드레 지드라면 크게 한 방 먹이는 일이다. 그러니까 프랑스에서는 통한다는 말이다. 아, 르 클레지오. 클레지오에게는 예외다. 형식의 문제점이 존재할 뿐, 둘 사이에는 예의 그 물결의 지류가 졸졸졸 흐르고 있으니까. 누가 먼저 종이배를 띄워 아래로 내려가느냐가 되겠다. 어쨌든 키냐르는 거침없다. 그런 점이 열 아홉 살 먹은 파리나 리용의 대학생들이 그들의 책꽂이에 꽂아놓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종이배가 자갈에 걸리면 클레지오는 주위를 빙빙 돌겠지만 키냐르는 이미 그런 데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많은 분석적 접근이 무용해진다. 이제 소통의 방식과 내면이 상이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이 작가가 음험한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인용된 연도를 마음대로 바꿔먹고 이름까지 고치는 정도는 장정일 수준에 불과하지만, 꼬일대로 꼬인 메타포가 아니면 쓰지 않는 장정일과는 달리 키냐르는 시니피에라는 것은 거의 의식하지 않는 듯 보인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라. 처음부터 너희들은 나를 믿지 않았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진실로 거짓말하기'다. 결국 호불호가 엇갈릴 수 밖에 없는 작가라고 해야겠지. 덧붙여 키냐르가 어린 시절 두 번이나 심하게 자폐증을 앓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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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멀다. 평생토록 사막은 멀어서 또 넓어서 발걸음을 잡아 끈다

그 아침에 일어나 바다를 미칠 듯이 그리워한다

갈 수 없는 곳. 혹은 아주 먼 옛날에 내가 가졌던

지금의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기억

잔잔한 파도치듯 흔들리는 낙타의 등 위에 내가 하늘이 그리고 태양이

언제고 이 세상이 좁다고 생각되면 나는 땀을 비오듯 흘리며 투박한 리듬에 몸을 맞추어

눈이 멀도록 강한 햇살 아래 검은 차양을 치고 노래하고 싶었던, 이 책은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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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 3 - 해신 장보고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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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소설을 좋아해서 거의 다 찾아읽은 독자입니다. 2권까지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흐름이 매끄럽고 무척 흥미로운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파편화되어있던 사실들을 끌어모아 연결시켜 줄거리 전체를 구상해나가는 솜씨나 쉽게 읽히고 속도감있는 전개는 역시 작가님의 빼어난 솜씨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소설을 너무 쉽게 쓰는 나머지 독자의 김이 빠질만한 부분도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한 예로 '골육상쟁'의 뜻은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백제 멸망을 기점으로 일본 열도로 건너온 도래인들과 당시 왜국 조정이 적대시하던 신라국의 이름을 딴 신라명신의 양자 관계에는 충분한 설명이 없다면 모순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염장이 장보고가 쓰던 칼을 가지고 훗날에 그를 죽이게 된다는 설정도 약간 연의적이고 도식적인 것은 아닐런지요. 비슷한 설정이 전반부에도 한 번 더 있어서 그런지 눈에 쉽게 띄었나 봅니다. 일전 장보고를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작가님께서도 그것을 염두에 두셨는지 장보고의 어린 시절의 일화를 재구성해서 시간순으로 풀어가는 방법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시인 두목의 입을 통해 중간중간 그의 일대기를 대신 구술하는 방식은 독창적이라고 여겨집니다만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로서는 2권에서 장보고가 이미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상권을 장악했고 해상왕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것은, 3권이라는 작은 분량을 감안해서일지라도 약간의 시간상의 비약이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전에 연재하신 소설은 읽은 적이 없고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온 것을 처음 읽어봅니다만 앞으로 작가님께서 조금 더 심혈을 기울여 소설을 써 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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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지음 / 사계절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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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의 연구에서 뛰어난 역작을 만났다고 해야한다. 지은이는 고구려사의 정치형태에 특히 주목하여 그 변천을 전체 고구려사를 나누는 큰 계기로 삼아 초기국가시대에서 귀족연립정권으로 이르는 긴 흐름을 포착하고 있다. 이 책에는 그 동안 학계에 축적된 연구성과가 다양한 방법으로 반영되어있다. 고구려사에 처음 관심을 가지는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어렵겠지만 아마추어 역사가들이나 나름대로의 지식을 갖춘 독자층에게는 내실있는 연구서로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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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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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최근들어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이 된 과학서적을 본 일이 없었다는 점을 칭찬하고 싶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의 본성이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자 변이의 최대,최소값이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비슷한 예로 야구에서 4할대 타율의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들고 있다. 굴드에 의하면 그 이유는 타자들의 실력이 내려간 것이 아니라 '4할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전체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굴드는 이 글 전체를 통해 그의 대표적인 주장들을 견지하고 있는데, 환원주의적 시각에 대한 배격, 진보의 개념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 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일반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다보니 쉬운 논리를 사용하려는 점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강한 설득력을 얻었지만 동어반복이 지나친 감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책 전체를 통한 굴드의 주장은 다음의 한 마디로 요약된다. '생명체는 복잡성을 향한 진보를 통해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진화 속에서 우연히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한편 이 논리를 바탕으로 굴드는 인간이 생물계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위험한 발상을 배격하고 인간은 다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분포곡선의 오른쪽 꼬리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며 생물계의 진정한 지배자는 다름아닌 박테리아라고 말한다. 덧붙여 번역이 상당히 매끄러워 눈에 밟히는 부분을 찾기 힘들었다는 점도 상당한 매력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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