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신화
알베르 까뮈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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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바라보며 산 아래로 말없이 내려가는 순간에 시지프스의 말 없는 기쁨이 있다고 까뮈가 썼는데 현실도피의 가장 극적이자 강력한 수단인 자살만을 부조리한 운명의 대척점에 두었던 그가 소극적 현실도피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 없지만 시지프스가 왜 자살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신화 속에서 영원히 벌을 받게 되어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그만이지만 돌이 아래로 굴러내려 가는 동안 산 위에서 보온병에 담긴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다못해 담배는 한 대 피울 수 있을 것...
돌 따위 아무래도 좋다. 어딘가는 있겠지. 어디로 굴러내려갔던 천천히 찾자고. 어디 가서 박혔는지 알려고 바위 뒤를 따라서 달려내려 가야할 필요는 없으니까. 시지프스의 고원을 상상한다.
그는 더 이상 바위가 어디로 굴러떨어질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높고 평평한 고원에서 축구공 삼아 놀면 그만이다. 기대 자도 좋다. 이쯤 되면 알베르는 비웃는다. 관념의 상징을 멋대로 조작하지 말라고. 그럼 나는 시지프스의 입장에서 반론한다. 원래 상징은 내 마음대로라고. 이제 그 신화의 바위는 형벌이나 운명이 아니라 달력 갈피 사이마다 아주 조금씩 쌓이는 먼지 같은 것이라고.
그러나 까뮈는 다시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영겁의 세계와는 무관하며, 고통에 대한 인식은 늘 즉물적인 것이라고. 내가 또 말한다. 웃기지 마라. 어설픈 쇼펜하우어 흉내내지 마라. 그래서 나와 까뮈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격해지고 마침내 둘이 서로 잡아뜯고 싸울 때쯤 바위는 저절로 아래로 굴러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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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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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목욕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를 읽었다. 제목이 암시하는 반어적인 의미를 알고 싶으면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면 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마치 수호지에 등장하는 반금련의 이야기만을 따로 뽑아낸 본격 성애 문학 <육포단>처럼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의 절세 미녀인 레메디오스의 이야기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레메디오스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기 위해 낡은 지붕위로 올라갔다가 그녀와 이야기까지 하던 도중 지붕이 무너져 추락해 죽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남자는 결국 레메디오스가 목욕이 끝나자마자 죽었다. 소설의 작가 마크 빌라는 이 레메디오스를 바라보는 수많은 남자들 중의 한 명이 되어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마르케스의 소설이 주는 정치적 메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바라보는 시점의 거리에 따라 한 여인이 얼마나 다양하게 조명될 수 있는지의 문제와 그 소설적 형상화에만 그의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성애문학은 아니다. 오히려 심리소설에 가깝다고 할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 또한 마르케스의 그것이 아니라 20세기 후반으로 설정되어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이 마콘도에 미치는 파장을 묘사했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출발한 소설이 마찬가지로 짊어져야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마크 빌라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정과 그 흐름에 대해서만 천착하는 작가인 것이다.

이러한 시점이 '문학은 사회를 반영한다'는 낡은 믿음을 철두철미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 최근까지도 기존의 평론가들에게 이 소설이 그렇게 폄하되었고 악평을 받았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심리소설 <그녀가 목욕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도 이처럼 독특한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행간에서 묻어나오는 작가의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동경과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성찰들은 단순히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애타는 심적상태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성별을 초월하여 독자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사건 전환의 국면마다 효과적인 복선을 도입해 작은 노력으로도 커다란 반전을 곳곳에 숨겨놓은 재주는 이 작가의 역량이 명백히 과소평가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목욕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지금껏 남미 문학의 거장이라 불려왔던 마르케스에서 출발했지만 마크 빌라는 청출어람으로 그를 능가하고 있다.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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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개빈 멘지스 지음, 조행복 옮김 / 사계절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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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년>은 분명히 가치 있는 책인데, 반면에 허점도 많은 책이다. 명의 환관 정화가 수만명의 선원을 데리고 조공무역을 위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했다는 기록까지만 정설로 인정되어 있는 것을 확장한데서 이 책은 출발하는데, 휘하의 4개 함대가 이윽고 갈라져 하나는 파타고니아의 마젤란 해협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태평양을 횡단, 또 하나는 그린란드를 한바퀴 일주하고 아이슬란드와 아조레스 군도를 발견하고 마침내 북극을 통해 베링해협을 거쳐 귀환한다. 또 다른 함대는 북아메리카 곳곳을 누비며 태평양 연안에 중국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래서 콜롬부스와 마젤란이 세계를 일주하기 전에 모두 중국의 선단들이 전 세계를 누볐고, 유럽인들은 중국인들의 지도를 가지고 했던 항해를 다시 한 것에 불과하다.

...뭐 이런 내용이 되시겠다.

솔직히 좀 황당무계한데, 작년에 나온 <유전자 인류학>에도 보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일부 유전자가 중국 광동인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결과를 인용하면서 의문을 제기한 것과 연관해 보자면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중국 난파선이 발견되고, 또 명대 도자기가 실제로 발굴되었으니 물증도 있겠다, 조선의 <강리도>에 아프리카의 희망봉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피리 레이스 같은 모험가들의 지도에 나오는 남극의 지형 등이 당시 중국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탐험할 힘을 갖지 못했다... 등등 여러가지 방증을 이리저리 묶고 엮어서 흥미있는 책을 만들어 냈다.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무진장 많지만, 우선 드는 생각은 생물학 원서 두께만한 이런 책을 기획하고 집필할 만한 사람이 한국에는 왜 없느냐 하는 (정수일 씨는 무하마드 깐수이므로 제외 -0-b) 것이다. 아무래도 시야가 좁아서 그런 게지 (물론 이 책은 엄밀히 말해 인문학의 범주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잃어버린 문명을 찾아서>라던가 <총, 균, 쇠>, <생태 제국주의>같은 책들 말이다. (이리저리 봐도 정수일 교수의 <신라-서역 교류사>는 20세기 한국 인문학의 빛나는 결실 중 하나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어째서 정화의 중국 함대는 유럽만 빼고 전 세계를 다 돌았던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부분 물증 없이 저자의 심증만으로(특히 북극횡단이라던가 그린란드 일주 같은 가장 믿기 힘든 여정) 1차 사료에는 전혀 없는 선단의 항로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아예 소설적 요소가 개입되기도 하며, 전문학자 출신이 아닌 저자의 오리엔탈리즘적 몰이해도 간간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도교는 중국 밖으로 한 번도 전파된 적이 없다, 등등)
어쨌거나 한 번 읽어보면 손에서 놓기 힘들만큼 재미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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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그림자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1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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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가 한국 작가라면 거의 삼류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고전이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시류에 영합하는 고전만이 살아남고 또 죽는다. 그런데 그 물결의 밑바닥을 타고 흐르는 고전은 따로 있다.
이것을 소설이라기 보다는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의나 우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편의상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작가 역시 모든 단락은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배열해 놓았다. 그러나 이 작가가 소통하고자 하는 그 방식은 절대 쿨하지 않다. 이 자는 찢어진 장갑 하나를 두고 주구장창 떠들 수 있을 인간이다. 지엽적인 곳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작가론을 설파...한다기 보다는 넌저시 암시를 주는 키냐르가 마음에 드는 점은 타자의 자신에 대한 불신을 항상 작품의 바닥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너는 나를 믿지 않겠지, 뭐 이런 식으로. 이건 적어도 '황만근...'류 소설에게는 별로 해당되지 않겠지만 그르니에나 앙드레 지드라면 크게 한 방 먹이는 일이다. 그러니까 프랑스에서는 통한다는 말이다. 아, 르 클레지오. 클레지오에게는 예외다. 형식의 문제점이 존재할 뿐, 둘 사이에는 예의 그 물결의 지류가 졸졸졸 흐르고 있으니까. 누가 먼저 종이배를 띄워 아래로 내려가느냐가 되겠다. 어쨌든 키냐르는 거침없다. 그런 점이 열 아홉 살 먹은 파리나 리용의 대학생들이 그들의 책꽂이에 꽂아놓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종이배가 자갈에 걸리면 클레지오는 주위를 빙빙 돌겠지만 키냐르는 이미 그런 데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많은 분석적 접근이 무용해진다. 이제 소통의 방식과 내면이 상이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이 작가가 음험한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인용된 연도를 마음대로 바꿔먹고 이름까지 고치는 정도는 장정일 수준에 불과하지만, 꼬일대로 꼬인 메타포가 아니면 쓰지 않는 장정일과는 달리 키냐르는 시니피에라는 것은 거의 의식하지 않는 듯 보인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라. 처음부터 너희들은 나를 믿지 않았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진실로 거짓말하기'다. 결국 호불호가 엇갈릴 수 밖에 없는 작가라고 해야겠지. 덧붙여 키냐르가 어린 시절 두 번이나 심하게 자폐증을 앓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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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 3 - 해신 장보고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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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소설을 좋아해서 거의 다 찾아읽은 독자입니다. 2권까지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흐름이 매끄럽고 무척 흥미로운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파편화되어있던 사실들을 끌어모아 연결시켜 줄거리 전체를 구상해나가는 솜씨나 쉽게 읽히고 속도감있는 전개는 역시 작가님의 빼어난 솜씨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소설을 너무 쉽게 쓰는 나머지 독자의 김이 빠질만한 부분도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한 예로 '골육상쟁'의 뜻은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백제 멸망을 기점으로 일본 열도로 건너온 도래인들과 당시 왜국 조정이 적대시하던 신라국의 이름을 딴 신라명신의 양자 관계에는 충분한 설명이 없다면 모순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염장이 장보고가 쓰던 칼을 가지고 훗날에 그를 죽이게 된다는 설정도 약간 연의적이고 도식적인 것은 아닐런지요. 비슷한 설정이 전반부에도 한 번 더 있어서 그런지 눈에 쉽게 띄었나 봅니다. 일전 장보고를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작가님께서도 그것을 염두에 두셨는지 장보고의 어린 시절의 일화를 재구성해서 시간순으로 풀어가는 방법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시인 두목의 입을 통해 중간중간 그의 일대기를 대신 구술하는 방식은 독창적이라고 여겨집니다만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로서는 2권에서 장보고가 이미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상권을 장악했고 해상왕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것은, 3권이라는 작은 분량을 감안해서일지라도 약간의 시간상의 비약이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전에 연재하신 소설은 읽은 적이 없고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온 것을 처음 읽어봅니다만 앞으로 작가님께서 조금 더 심혈을 기울여 소설을 써 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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