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도의 위대한 귀환
난도 파라도 외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난도의 위대한 귀환이란 책이 내 눈길을 끌었던 건 <안데스>라는 글씨와 비행기 그림 그리고 새하얀 눈이였다. 안데스와  비행기, 그리고 눈이란 소재가 다 들어간 영화가 있었다. 10년도 전에 본 영화 <얼라이브>였다. 줄거리는 그리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하나있다. 그건 인육을 먹었다는 것이었다.영화를 어린 나이에 봤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의 강한 의지와 처절함보다는 인육을 먹는 다는 것에서 오는 거부감과 혐오감, 그리고 신기함으로 뇌리 속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영화였다. 그 영화 속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것에 나는 또 다시 인육을 먹는 장면을 떠올렸다. 사과를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은 다행이었다. 인육을 먹는 것으만 기억되었던 그 때의 사건은 이 책으로 내게 재정립되었고 이제서야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서 삶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또 하나 사과할 것은 책의 두께를 보며 두껍다고 투덜댄 것이었다. 이렇게 두껍게 할 이야기가 그 사건 속에 들어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투덜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분명 더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과 땀을 흘리며 같이 뛰었던 친구들이 눈 앞에서 죽어갔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고 살기보다 죽기를 희망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던 그 곳에서 살아나온 작가를 두고 나는 책의 두께를 운운했다. 42명이 탄 비행기에서 그곳을 살아나온 사람은 16명 뿐이었다. 72일이란 긴 시간을 살아도 산 것이 아닌채로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 이야기를 고작 400페이지가 넘는 다는 이유로 나는 투덜댔다. 그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섣불리 생각없이 이야기 한 것에 사과를 드린다.

 

영화는 내게 단 하나만을 기억시켜 주었지만 책은 내게 여러가지를 알려주었다. 그것을 알게 되면서 책에서 눈을 뗄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책을 읽어 내려갈 수도 없었다. 이 페이지를 넘기면 힘든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그가 죽는 것은 아닐까? 딸을 보고 싶어하는 그녀가 죽는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에 겁을 먹었고 그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들에게 추락보다 더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에 경악했고 이미 지난일임에도 책장을 넘기기 전에 숨을 몰아쉬기도 해야 했다. 이 책을 통해 알게된 것을 이야기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나처럼 오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그들의 곁에서 죽어간 건 타인이 아니였다.

-만약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을 맞이 한다면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이 내 친구이거나 가족인 것이 좋을까? 아니면 전혀 몰랐던 사람인 것이 좋을까?란 질문에 나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봤다. 쉬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로의 결속감으로 극적으로 살아남은 그들을 보면 아는 사람이 좋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어머니가 내 동생이 옆에서 죽어간다면, 내 단짝이 죽어가는 데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겸험해야 한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연의 힘을 맘껏 보여주는 참혹하리만큼 새 하얀 안데스 산맥에서 그들은 함께 있던 이들이 가족이고, 친구였기에 다행이라고  말한다. 1972년 우루과이 럭비팀의 전세 비행기가 42명을 ㅐ태우고 안데스 산맥에 추락했다. 그 추락으로 13명이 즉사했다. 그 13명안에 난도의 어머니가 있었고 그의 단짝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죽은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을 넘어 함께 살았던, 함께 뛰고, 같은 추억을 공유하던 존재였다. 그런 사람들이 눈 앞에서 허무하게 죽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삶의 지옥을 살아서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살아남은 29명은 타인이 죽어가는 것을 본 것이 아니였다는 것에, 엄밀히 말하면 타인이지만 그들에게 같이 탄 사람들은 함께 추억을 만들어 갔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에 절망했지만 행복했던 추억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그들을 서로 위로해주었기에 살고픈 의지를 나타낼 수 있었다.

 

#둘, 안데스는 그들에게 한번도 웃어준 적이 없었다.

-안데스의 기후와 지형은 참담했다. 어느 곳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영하 40도에 가까운 살인적인 추위, 조금만 걸어도 숨이 막힐 정도의 희박한 공기, 물도 제대로 만들 수 없는 곳에서 생존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을 겨를도 없이 살고자 물을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고 밤이면 심장까지 얼려버릴 추위 속에서 자신의 호흡을 세며 호흡 하기 위해 애썼다. 낮이면 햇빛이 비췄지만 고산병은 그들을 움직일 수 없게 했고 자신의 옆에서 죽어가는 친구들과 가족을 보며 다시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안데스를 원망할 기력도 없었으며 그저 신을 찾았고 신에게 분노했으며 그래도 신을 믿으며 기도했다. 

 

그들의 구조를 포기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살아나갈수 없을꺼란 생각에 주저 앉은 건 잠깐이었다. 안데스가 자신들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도 자신들을 구하러 와주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가 살 길을 찾을거라고, "서쪽에 칠레가 있다."라는 말만 되뇌이며 안데스 산맥을 넘을거라는 결정은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으며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셋,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었던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영하 40도가 넘는 밤을 가진 안데스에 풀 한 포기 살 수 없는 건 당연한 현실이었다. 그 속에서 생존자들이 먹을 거리는 초콜릿 한조각이었다. 300칼로리가 안되게 섭취하던 음식도 얼마 못가 바닥이 났고 건장했던 럭비 선수였던 그들의 신체는 근육들이 칼로리로 소비되면서 쇠약해져갔다. 고산지대에서는 더 많은 칼로리가 소비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들은 약해져 가는 자신의 신체를 보며 절대 이 상태로는 안데스를 넘을 수 없을거라고 기다리다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사체들을 떠올렸다. 살아야 함으로 먹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들었다면 내 친구를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은  마음에서 떠올랐다.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거란 생각에 주춤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하기를 바란다는 로베르토의 대답에 나역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리에 앉아 죽어가기 만을 하느님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인육을 먹기로 결정하고 나서도 인육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지만 그렇다고 인육을 먹은 사람들이 잔인하다거나  혐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영화로 인해 그들을 오해하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 책을 들고도 얼굴이 화끈 거렸다.

 

그들이 사체를 먹었던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살아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구조되고 매스컴과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보다 인육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들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들에게 그 사실로 뭐라고 하지 않았다.(몇몇 종교단체에서는 질타가 있었다고 한다.) 사체를 먹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기억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넷,죽음의 반댓말은 사랑이다.

-광활하고 척박한 안데스에서 그들은 무엇보다 죽음에 가까이 있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죽음을 견디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난도는 그곳에서 죽음의 반댓말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살아있음이 죽음의 반댓말이 아니라 살게끔 만들어주는 사랑이라고 했다. 그말에 내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나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했다. 아버지를 다시 보고 포옹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생존한 16명의 사람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가족에 대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72일간 그곳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마치면서

안데스에서 그들이 버틴 72일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보았나를 생각해보았다. 그건 희망이었다.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사랑만이 희망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에 놀라고, 광활한 자연의 힘앞에 인간의 존재는 나약한 존재였지만 인간의 가슴 속에는 안데스의 눈을 녹일만큼 뜨거운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조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란 걱정을 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역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그들이 힘든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란 걱정을 했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살고 있었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가보았던 그들이기에 삶에 대한 열망이, 삶을 제대로 살고픈 열망이 넘쳐났던 것이다. 그건 그들과 함께 했지만 살지 못하고 죽어간 친구와 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한다. 열심히 사는 것,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삶이란 것에 감사하며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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