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시집 80
이병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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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는 사이 가슴으로 저녁 노을이 스며들고, 그보다 앞서 겨울녁의 찬 바람이 스며든다. 시린 가슴으로 시집을 내려 놓고도 두고 오지 못하고 아니 가겠다는 시집 한 권을 애써 내 가방이 너의 작은 몸 하나 녹일 수 있다는 위로를 하며 버둥거리는 시집을 가방에 넣고 오는 길의 바람은 가슴에 스며든 바람보다 더 차가워진다.
 

 이병률의 첫 시집이라는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는 읽는 이를 아프게 한다. 시집에서 옮겨 적고 싶은 시를 적다가도 가슴이 아리고, 블로그에 옮기기 위해 인테넷에서 시인의 시를 찾다 시인의 시가 너무 많아 이토록 많은 이들이 그의 시에 가슴에 바람을 불게 하고 아파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따뜻한 손길을 원하는 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은 더욱 아파온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법이라고, 그걸 알고 있음에도 초저녁 갈 곳이 없는 발걸음은 돌부리에 걸린 것도 아닌데 비틀거리고 힘이 없어 결국 넘어져 눈물 대신 피를 흘리는 것이 사람이다. 이병률의 시에는 외로움을 넘어선 고독이 가득하다. 고독하다고 하여 그리운 이가 없는 것이 아니듯, 북적이는 사람 냄새가 그립지 않은 것이 아니듯 윗집 혹은 옆집에 사는 이들의 한밤중 물소리 하나에도 그는 고마워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의 고독이 더 내것 같고 더 애달프다.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홈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  -'장도열차' 전문

 

 열차의 짧은 정착시간 15분. 그 시간은 기다리는 이에게는 영원의 한 켠을 나눠 가질 수도 있는 시간이었으리라. 하지만 오지 않는다고 하여 기다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가 오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그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 어쩌면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그 사람이 오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볼 수 없어도 기차는 출발하고 시간은 흘러가고 그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마치 알 수 없는 인생처럼.  내가 혹은 당신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이가 있던 곳을 얼마나 많이 스쳤을까.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 '스미다' 中


 

  어느 날 아침, 알 길 없는 설움이 복받쳐 울진으로 떠난 이가 그 곳에서 본 사내는 더 애닯다. 이 시집에서 내 마음을 가장 흔들었던 시였다. 가슴에 옹이 진 곳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냐고, 서럽고 아픈 세상 살아가다 보면 마음 둘 곳 없는 흔들림에 멀미를 하듯 우리는 떠돌다 주저앉아 울게 되고 그 눈물로 작은 호수를 만들어 놓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울고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울 수 있다는 것, 울고 있다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것, 온 세상이 설움으로 가득찬 날 어깨 떨며 우는 누군가가 있어 내 울음은 조금 가벼워 지거나 짧아졌음을 받아들여야 함은 아픈 각인이 되기도 혹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인기척' 中

 

 오만 년, 그 시간의 겹은 얼마나 될까? 그 시간을 걸어온 이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 돌린 순간이 까막득히 잊혀질 무렵 그가 불현듯 내 사람임을 알게 된다면 어쩔것이냐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혹시 그런 사람 가진 적이 있었던가 라는 질문과 함께. 홀연히 날아온 민들레 홀씨처럼 인기척을 인기척인지 모르고 스쳐 보낸 이가 어디 한 명 뿐일까. 그럼 나는 몇 만년의 시간을 홀로 거슬러 올라야 하는 것일까? 대체 몇 번의 생을 살면서 우리는 어떠한 인연을 바람처럼 스쳐 보낸 것일까? 그러하기에 '자전거' 라는 시의 한 구절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춥겠다.' ('자전거' 中) -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추울지도 모르겠다.

 

 이병률, 그의 시집이 내게는 두 번째이다. <바람의 사생활>이란 시집이 내게는 멀리서 바라 보기만 하고 차마 들어가 볼 수 없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범접할 수 없는 성이었다면 이 책은 바닷가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오두막집도 되었다가 대학시절 살았던 다닥다닥 붙은 원룸이 되기도 한다. 그 속에는 언제든 내가 들어가 벽을 만져보고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누워볼 수도 있다. 그만큼 내게는 그의 첫 시집이 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도 괜찮을만큼 마음으로 읽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물론 시인의 마음에 있는 그 무수한 방, 몇 개 가보지도 못하였지만.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시인들' 中 -
 
 이병률, 그는 시인이다. 그의 시 하나에 시인들의 애달픔과 경제적인 사정마저 느껴질 듯하다. 그가 듣고픈 말 해줄 수 없는 나인지라 그저 그의 시를 한 번 손으로 쓰다듬으며 입으로 혼자 말해본다.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왜, 나는 시인이 아니란 말인가...라며.
 
 시집을 읽는다는 표현은 얼마나 간사한가. 시를 모르면서 시를 이야기 하는 나는 얼마나 볼상사나운가. 그럼에도 시집 앞에서 기웃거리는 모습은 얼마나 우스운가. 시집의 무게는 보기 전과 후가 너무 다르다고 척하며 말하고 마는 내게 입이 무거워야겠다고, 시를 읽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그저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을 밤하늘의 별에게만 나즈막이 고해야겠다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은하수가 시인의 영혼의 집이라면 시집은 그 하나의 별이라고, 하나의 별이 아니라 은하수를 본 후에 말해야 한다고. 달이 밝은 밤이라 은하수가 보이지 않는 밤은 밝아도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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