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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분명 이 책을 만난 시기 나는 지쳐 있었다. 일에 지쳤으며 이른 장마에 지쳤으며 누군가를 향한 마음에도 지쳤을 것이다. 수업을 취소하고 무작정 서점으로 달려간 이유는 아슬아슬한 내 무게 때문이었다. 바늘 하나에 허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말을 되뇌이며 달려간 서점에서 무릎을 쫙 피고 책을 읽어 내려가며 안도한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냄새를 맡으며 책을 읽으며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 이 가슴 시린 아픔도, 이 습한 공기도, 당신을 향한 열망도 다 지나 갈거야, 괜찮아.'
한 가득 책을 안고 나와 차 속에 책을 내려놓자마자 울음이 터지고 만다. 대체 이 서글픔은, 이 외로 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기에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도 결국 터지고 마는 것일까? 대체 무얼 찾고 싶기에 무얼 갖고 싶기에 내 삶은 이렇게 바람이 통하고 구멍이 뚫린 것일까?
아무 일도 없는데 가슴에 바람이 불 때 떠 오르는 작가가 에쿠니 가오리이다. 그녀의 글 속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일상이 있으며 그 일상 속을 들여다보면 미세한 금과 정제된 감정들, 곧 터질듯 불안한 주인공들의 감정들이 보인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나이대에 들어선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을 무언가로부터의 어긋남, 틈을 그녀보다 잘 이야기하는 작가를 아직은 만나보지 못했다.
에쿠니 가오리는 소설 속에서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는 듯 보인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면 그들 스스로 살아간다, 삶을. 그저 에쿠니 가오리는 그들의 모습을 글로 적고 그들의 감정을 옮겨 적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등장인물들은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살아간다. 정지된 듯 보이지만 분명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그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고, 우박이 될 수도 있으며 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책에 빠져들면서 깨닫는다. 어쩌면 에쿠니 가오리는 바람이고 등장인물들은 구름인걸지도. 바람은 아주 조용히 움직이게 한다, 구름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 할만큼 천천히. 그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삶은 평온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그렇게 하고 싶은 다양한 어른들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펼쳐진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 속에 이렇게나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는 것에 놀라고만다. 그들 각각의 삶에 아슬아슬한 바람이 분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고 각자의 가슴에 박혀있는 투명한 얼음같은 상처에 가슴을 내려 놓고야 만다.
어찌하여 인간이란 이렇게 약하고 외로운 생물인채로 자라는 것일까? 스스로의 나약함을 숨기려 하면 할수록 혼자 큰 침대에 누워 무릎을 꼭 안고 자야할 밤이 많아지고 케니지의 음악을 혼자 들으며 가슴 깊은 곳에 숨겨진 고독을 곱씹으며 햇살의 한 줌에 위로받는 안타까운 존재인 것일까? 누군가에게 상처 받고 아파함에도 어찌하여 인간은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몇 번의 사랑 혹은 한 번의 사랑으로 인해 가슴 속 깊이 아프고 아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나약하지만 따뜻한 생물인걸까?
이 책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안아주고 싶다. 그들은 분명 더 많이 넘어지고 더 많이 울 것이며 더 많이 소리를 지를 것이며 더 많이 주저앉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슴에 사랑을 집어넣고 가슴을 불태울 것이다, 스스로를 상처내면서도. 사람이기에. 어른이라고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얼마나 다행인가,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삶에 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고 온 것이 많아서, 지난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쓰러워서, 사랑한 이를 보내는 일이 서툴러서 우리의 삶에는 분명 바람이 분다. 그 바람마저 사랑스럽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기존의 에쿠니 가오리의 책에서 얻었던 소리 없는 위로는 이 책에서 받지는 못했지만 한번 더 이 책을 읽는다면 노을처럼 알싸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