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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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이 곳에는 비가 내리고 이 곳에서 조금 더 멀고 높은 곳에서는 눈이 내렸다. 어제 비가 내렸기에 안심했다. 흐린 날이 좋아지고 스산함에 위로받고 달콤함 보다는 쓴 커피가 끌리는 요즘이라 모처럼의 휴일 (약간의 처리할 일이 있었지만)을 기대했다. 서늘함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아빠의 사랑의 결정체인 따뜻한 방에서 지내는 것이 익숙해졌기에 두꺼운 외투를 팔에 걸치고 한 동안 들고 다니는 시집을 다른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아득해진다.
 

 이리도 밝은 햇살이라니, 현관 문 앞에서 문득 부끄러워졌다. 무채색의 내 옷 차림이, 생기 없이 푸석거릴 내 머리카락이, 무엇하나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점점 옅어가는 내 눈동자가. 햇살 아래서 죄도 없는 운동화 끝으로 땅만 콕콕 찍어대는 것이다. 따뜻한 거실이 문을 열고 있는 나로 인해 식어가고 그 차가움에 놀라 나오신 아빠가 왜 그러냐하는데도 땅만 콕콕.  따스히 어루만지는 햇살이 무서워서라는 말을 못하고 내 가방 안에서 콕콕 대는 무언가가 있어 가방을 안고 밖으로 나간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 내가 읽는 방식이다. 읽는 책이 시집일 경우 그 여행은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며 벗어나기 힘이 든다. 어찌하여 이리도 저자의 마음이 되기란 힘이 든 것인지,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기에 난 그 마음 근처에 한 발자국도 갈 수 없는 것인지......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중략)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詩부분

 

 굳은 살이 부끄러웠다. 일년 내내 바구니를 들고 다니느라 손바닥에는 어느샌가 굳은 살이 배겼다. 여자 손에 배긴 굳은 살이 부끄러워 혼자 차 안에서 울었다. 열심히 사는데 왜 몸은 부끄러워지는 것일까. 살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 그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딨다고 시인의 사랑했었다라는 말에 왈칵 눈물이 난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詩 부분

 

 허연의 시집을 읽으며 단풍이 절정에 달했으며, 단풍이 낙엽이 되고, 차가운 바닥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을을 다 보내며 시를 읽는다. 시집 하나 읽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임을 알면서도 시 하나 읽을 때마다 가슴에 차가운 얼음을 집어넣고 녹이기 시작한다. 나는 사람이다, 뜨거운 체온을 가진. 얼음이 녹아 물이 되면서 내 가슴은 더욱 차가워지지만 상처는 아물어간다. 덧나지 않아 아물어 간다.

 

 처음에 허연의 시는 내게 깊은 수렁을 선물하는 듯했다. 하나 읽고 나면 기운이 쏙 빠지는, 기대할 것 없는, 기댈 것 없는 삶을 사는 내가 되는 것 같아서 아니 그런 나를 들킨 것만 같아서 두려움에 떨며 읽었다. 마치 전쟁을하듯 시를 읽는다. 나만이 싸우며 시를 읽는다. 그 치열함에, 그 옹졸함에 하늘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억처럼 더러운 것은 없다

 사막까지 따라오는.

               -나비의 항로 詩 부분

 

 나비가 되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딨을까. 우리 몸에 날개가 있더라면 하고 바라지 않는 자가 어딨을까. 한 때는 날개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인간이란 존재는 날지 못하기에 연약했다, 속으로만. 날 수 없기에 강해졌다, 밖으로만. 시인의 등을 떠민 것은 세상인가? 사람인가? 혹은 시인의 날개였나? 기억하는 동물이라 인간은 서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서글픔을 알게 되고 시인의 아픔을 알게 되고 시인의 허무를 조금 맛 본다. 아무맛도 없는 그래서 슬픈 눈물조차 나올 수 없는 맛 앞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모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내 딛는다. 강렬한 햇살 앞에서도, 은은한 달빛 아래서도 어딘가에 있을 소금 냄새를 찾아 발을 내 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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