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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아사다 지로 지음, 정태원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서울에 가서 지하철을 처음 탔을 때 얼마나 놀라고 떨렸는지 지금도 손에 땀이 날 것 같은 아찔함이 몰려 온다. 표를 버려서 친구가 표를 사다줬던 기억, 손잡이를 잡지 않고도 서 있는 사람들의 달인에 오를것만 같은 모습 그 중 나를 가장 아찔하게 했던 것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탔음에도 지하철 안은 따뜻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지하철 한 칸보다 작은 시내버스에만 타도 아주머니들의 혹은 학생들의 소란스러움에 인상을 쓰고는 했던 나인데도 지하철 속 냉기와 침묵은 생각보다 충격이었던 듯하다.
그 이후로 지하철을 두고 일어났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은 나를 지하철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했고 지금도 지하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냉기가 먼저 감돌고 무서워지고는 한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탔는데도 지하철에는 수다스런 냄새가 나지 않는 걸까? 방긋 웃을만큼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만큼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 이런 나를 알았던 것일까? 내게 이 책을 선물해 준 사람으로 인해 이제 지하철은 마법의 공간이 된다. 큰 기적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공간이 아닌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마법의 공간이.
고누마 신지, 후줄근한 양복에 피로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은 속옷회사의 영업사원이란 직함을 가진 남자. 그에게 지하철은 피곤한 몸을 이동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의 경험 전에는.
그날의 지하철은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현실을 달리던 지하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긋나는 운행으로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 엄마의 뱃속에 들어있는 듯한 따뜻함이 몰려오는 출구 그 속에서 그는 누군가를 만난다. 소중하지만 그 소중함을 몰랐던 사람을.
아사다 지로,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딨겠냐마는 그가 살아온 길을 짤막하게 본 후로 그는 맘껏 가족을 사랑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 소중함을 알았다 해도 미안하고, 그립고, 애달픈 그의 마음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그린 <천국까지 100마일>에서의 주인공의 마음, <지하철>에서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연습을 하는 주인공의 마음은 어쩌면 작가의 마음이 아닐까.
책을 읽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는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강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여자인 나와 엄마의 친밀감이 아빠와 오빠에게는 조금 낯설다.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해보지도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고누마 신지에게는 그 낯설음이 벽을 뛰어넘어 바다를 만들었다. 왜 소중한 것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하고 뒤늦게야 후회하는 것일까. 조금 더 솔직하게 손을 내밀고, 안아주고, 주저 앉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일까? 사람이기에 그렇다는 이모의 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사람이기에 후회를 하지만 사람이기에 화해를 청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지만 사람이기에 마음을 연결할 수 있다면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길 잘한 것 같다. 이 책 속 주인공 모두가 그래주길 바란다. 태어나길 잘했다고. 또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울에 가서 지하철을 타게 된다면 이 책이 생각나서 타는 동안 주문을 외울지도 모르겠다. 마법의 문아 열려라! 이런 주문을. 그 때 이 책을 선물해 준 이와 함께라면 주문 역시 2배의 힘이 되어 이루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