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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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초까지 덥다는 일기예보의 어긋남이 감사할 만큼의 서늘한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고 있다. 그 바람이 좋아 가디건 하나 꺼내 들고 산책하다가 오밀조밀하게 짜여진 가디건을 멍하니 내려다 보고는 한다. 특별한 것 없이 하나의 패턴으로만 짜여진 가디건은 새로 산 가디건을 당당히 밀어내고 내 옷장을 참 오랜 시간동안 지키는 터줏대감이다. 화려하게 짜여진 가디건을 동경해서 사놓고도 자주 입지 못함은 내 옷이 아닌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인간은 살아감에 있어 화려한 옷과 편안한 옷을 얼마나 구분할 수 있을까? 내 옷과 네 옷이 아닌 옷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의 삶이 내 삶이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타인의 삶이 내 삶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나보다 못한 삶을 경멸하기도 했으며 나보다 잘 사는 삶은 동경을 넘어서 시샘하며 그 곳을 향하기 위해 나만은 특별한 삶을 살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갔으며 살아가고 있는 지 알면서도 왜 삶의 비밀은 이다지도 찾기 힘들고, 방황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진저리 칠만큼 길을 헤매고 있다.

 

 책을 덮고 나서 서늘한 바람을 막아주는 가디건의 옷감을 보면서 필립이 찾고자 했던 인생의 비밀을 생각해 본다. 그가 찾고자 했던, 그가 깨닫고야만 인생의 비밀. 그 앞에서 나는 무방비가 되었다. 이 비밀을 내가 들어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하고 그가 30년 가까이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을 나는 몇 시간도 들이지 않아 알아도 되는 것일까? 책이 주는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란 생각에 필립이 깨달음을 얻은 순간 난 책을 놓치고 말았다.

 

 책을 놓치고 내 눈을 채우는 것은 수레바퀴였다. 사람은 모두 수레바퀴인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굴러가고 있음에도 굴러감을 모르고, 돌부리가 눈 앞에 있음에도 너무 늦게 발견해 피하지 못해 그 아픔을 고스란히 견디어 내기도 한다.

 

 처음부터 튼튼한 수레살을 지닌 수레바퀴는 여전히 반짝 거리며 내 옆을 지나가기도 하지만 그 수레바퀴는 인생이란 길의 달콤함만을 맛 보며 흙이 주는 평안함을 알지 못하고 그저 더러운 곳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다니느라 바쁘다.

 

 대다수의 수레바퀴는 튼튼하지 못했으며 빛이 나지도 않았다. 연약했고, 조금만 굴러도 눈물을 흘리는 여린 심성을 가졌으며 먼 곳을 내다보며 갈 길을 재촉하면서도 옆에 있는 다른 약한 수레바퀴를 마음에서 놓을 수 없어 여린 몸으로 굴려주고, 진흙탕길을 빠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문득 우리는 자신이 수레바퀴임을 자각하고 번뇌에 빠질지도 모른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진흙탕길이라면 더욱 번뇌는 심해지고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준 수레바퀴가 다른 수레바퀴를 밀어주고 있다는 것에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행히도 둥근 수레바퀴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흘러갈 수 있다. 인간의 굴레란 얼마나 절망스러우며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필립을 통해 그가 실패하지 않기를, 실패했더라도 좌절하지 않기를, 좌절 했더라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밀드레드를 향한 필립의 행동에 욕을 하면서도 그를 버리지 않았으며, 백부를 향한 그의 검은 마음을 보면서도 그에게 회초리를 가하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뇌하고 번뇌하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 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필립이였다면 책은 10페이지에서 끝이 나 버렸을 것이다. 필립이었기에 천 페이지가 넘는 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삶이 천 페이지라면 너무 작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그의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기에 그건 결코 적지 않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사로잡힌 감정들을 나열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가. 필립이 나였을때도 있었으며 그가 내 아들 같았던 적도 있었으며 그가 내 친구였던 적도 있었다. 그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와 함께 걸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뿌듯해지려고 한다.

 

 언젠가 분명 다시 내 손에 들리게 될 이 책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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