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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공책 ㅣ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누구세요? 이토록 은은하고 다정하고 잔잔한 목소리를 내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책을 펼치는 순간 흘러 나오는 당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책을 덮고는 쳐다만 봤어요. 귓가를 울리는 나즈막한 소리로 제 마음을 흔들 것 같은 당신,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가요? 이미 시작 되었나요? 제가 당신을 깨웠나요? 울음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요. 당신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울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 숨을 크게 내쉬지 않아도 될까요? 겁이 나도 들을래요.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 빛나던 여름의 일들을. 반짝반짝한 초록빛과 솨아아아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아프게 내리는 빗소리와 그에 얽힌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래요.
민들레 공책을 예뻐하던 여자 아이를 알게 되었다. 민들레 공책은 그 여자 아기가 자신의 일기장에 붙인 이름. 그 아이의 창문 밖을 내다보면 민들레 언덕이 보여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 언덕 너머에는 그 아이에게 잊을 수 없는 여름을, 그 아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답던 여름을 만들어 준 다른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이름은 사토코. 민들레 공책의 주인은 미네코.
사토코의 집안은 그 마을 지주로서 대대로 인망과 덕망을 갖춘 집안이었고 미네코의 집은 옛부터 사토코 집안의 주치의를 해오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약하게 태어난 사토코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누워만 있었는데 사토코보다 한 살 어린 미네코는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민들레 언덕을 지나 사토코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10살 여자 아이의 발걸음은 겁이 난 듯도 하고 기대감을 부푼 듯도 해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를 반복하는 듯하지만 앞으로 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민들레 언덕을 넘어서.
그렇게 미네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민들레 홀씨를 날려 줄 바람만큼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히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 목소리로 시작 된다.
<그 무렵의 저는 그런 예감을 느끼고 있었을까요. 장차 어떤 거대한 물결이 자신을 삼켜버릴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알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 기적 같은 눈을 한 소녀와 그의 가족들은.> -p.8
아름다운 그 마을에 아름다운 그 소녀에게 아름다운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다른 이들이 찾아왔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몇 번이나 겹쳐지면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걸까?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몽롱함은 아름다움 그 한 가운데 있었기에 정신을 놓게 만들기도 했다. 온다 리쿠만의 서늘함이 베어나오면서도 아름답고 신비한 문체는 나를 책 속에 있게 하지 않고 민들레 언덕으로 데려갔다.
촉촉한 풀들이 나를 보고 흔들며 울었고 아이와 소녀의 중간일 듯한 귀여운 여자 아이 중 한 명은 먼 곳을 단호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나이에 걸맞지 않는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그 아이를 쳐다보며 안절부절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 아이에게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그 말은 그 아이에게 닿지 못하고 내 귀에 -리본 이라는 말만 남기고 바람에 사라졌다.
모두의 가슴에 빛나는 민들레 홀씨를 심게 만든 그 해 여름의 사건. 사노코는 분명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말을 하고 있지만 어쩐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차마 하지 못할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예상보다 마음은 평온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손끝은 떨려왔다. 예상했다고 해서 견디어 낼 수 있는 방파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듯.
책 속에는 참 많은 민들레 홀씨들이 담겨있다. 어쩌면 우리 사람 모두는 하나의 민들레 홀씨가 아닐까? 누군가의 가슴에 뿌리를 내려 '넣어' 달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누군가를 '넣을' 수도 있을테니까. 민들레 홀씨는 자신을 위해 날아가면서도 다른 이를 위한 마음 역시 잊지 않는다. 힘들고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자라나자고 말한다. 책 속의 등장인물처럼.
읽어 본 온다 리쿠 책 중 참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왔다고 생각이 든다. 익숙치 않은 이름들에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누구하나 잊으면 안 될 것 같은 등장인물들로 인해 소소한 감동이 마음에 쌓여갔다. 일본의 시대상과 겹쳐지면서 마지막에 뭐라 말을 건네야 할지 선뜻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결국 난 한국사람으로 일본에 대한 악감정은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일본의 성향을 음악과 비교해서 말하는 사노코의 이야기와 시나가 신타로에게 하는 이야기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일본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본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그리고 보듬으려는 온다 리쿠의 마음이 담겨있었던 것 같다.
책을 다 읽을 때쯤 가슴에 콕콕하고 무언가가 나올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살짝 내려다보니 어느새 내 마음에 민들레 홀씨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물을 주세요, 햇빛을 주세요, 바람을 불어주세요. 투덜거리는 민들레 홀씨는 주인과는 사뭇 다른 까탈스런 성격이다. 토닥거리며 너를 넣어줄테니 너도 나를 넣어줄래? 라고 말을 건넨다.
#엉뚱한 덧붙이기
책 속 도코노 일족을 보며 <이현의 연애>의 주인공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이 떠올랐다. 다른 이의 삶을 기억하는 일을 하는 도코노 일족과 다른 이의 삶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 이들의 삶이 겹쳐보이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진을 이제 마음으로 받아들여 본다. 안타까운 건 이진은 혼자였다는 것. 이현이 있다해도 그녀는 혼자였다. 스스로. 그에 비해 도코노 일족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점이 다행이다. 이진에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면. 자신과 같은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어서 따뜻한 손을 잡아 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