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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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손에 들고 놓고를 몇번이나 반복한 끝에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이건 차라를 읽지 않으려는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니체의 책은 위험한 책이 아니라 어려운 책이었다. 열장을 읽어가기도 전에 머리 속에 책의 문장들이 단어로, 단어가 글자로 해체되기 시작했고 그 글자들은 더 작은 모음과 자음으로 그리고 알 수 없는 내 머리 속 블랙홀로 사라져 읽었음에도 읽지 않은 듯했다.

 

 이 책은 위험하다는 타이틀을 달고 내 앞에 약간 두툼한 몸집을 내세우고 그 앞에 니체를 그린듯한 그림을 내세워 나를 한 순간 제압해버린다. 니체의 콧수염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 걸까? 난 그를 알지도 못하는데. 이 책을 다 읽기까지의 시간을 한 달로 잡고 목차를 보며 하루에 읽을 분량을 나누기도 했는데 그렇게라도 니체를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전에 읽은 니체와 바그너의 이야기가 나를 끌어들인 탓일까? '신은 죽었다' 라는 말 하나의 울림이 멋져 보여서 일까? 아무 뜻도 모르고 말하던 그 말은 의미를 잃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을 매료시킬가?  대체 니체는 왜 사람을 끌어들이게 만들까? 저자가 니체를 이야기 함으로서 나에게 전해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계획을 세워서 책을 읽는 것이 괜찮은걸까란 마음 속 의구심은 책을 읽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나자 사라졌고 그 후로는 책이 아니라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질문을 하듯 앞을 다시 보기도 하며 혹은 수업 중간중간 딴짓을 하며 수업을 듣기도 했다. 수업은 횟차를 더 할수록 몰입의 순간의 연속이었고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듣을정도로 푹 빠지게 만들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왜 조금 더 참지 못하고 읽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만큼 니체의 말은 매혹적이었다.

 

 1부에서는 니체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다. 니체의 삶이 얇은 종이로 이야기 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면서도 서글퍼진다. 알면 알수록 그에게 '좋은 귀' 가 되어주지 못해 슬프다면 니체는 웃을까? 아니면 그냥 등을 보이며 듣는 척도 하지 않을까? 그도 '좋은 귀'를 찾지 못해 슬펐겠지만 나역시 '좋은 귀'가 될 자질을 갖고 있지 못해 누구보다 슬펐다.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 바늘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낚시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물고기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니체는 그에게 동조하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 니체의 고독이 일곱 겹이나 된다고 해도 그에게 친구가 되어 줄 수 없는 내가 혹은 더 많은 사람이 더 슬플 수도 있는 것이다. 고작 이 책 한 권을 읽고 니체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인데도 니체의 여러 책을 읽는다 해도 니체의 친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서글픈 것이다. 니체의 낚시 바늘을 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없는 것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이렇게 위로하면서 책을 봤다. 니체를 뛰어넘는 생각을 할 수도 없는 나는 니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나는 제대로 살고 싶어진다. 그래서 니체의 책은 위험하다.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 되었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고 자기 가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살 이유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니체만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주인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고 가슴 속에는 어느새 뜨겁게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나를 흔들어 놓는다. 끓어오르면서 불순물을 버리는 내가 되고 싶어진다. 온전한 나만의 나! 그것은 가능할까? 이런 망설임조차 니체에게 들킬까 무섭기만 하다. 나의 삶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운명애'(amor fati).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해 주는 것이다. 창조!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그 고통을 즐기는 자만이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위대한 형상을 끄집어낼 선물, 그것이 내게는 니체가 선물해 준 책이 아닐까?

 

 책의 2부로 들어가면서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의 해부가 시작된다. '신은 죽었다' 부터 '위버멘쉬'까지 읽어 내려 가다보면 푹 빠져서 고개를 연실 끄덕이는 나를 보게 된다.  신과 종교, 국가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맞아' '옳은 말이야' '왜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 못 한거지?' 라고 속으로 말하며 책을 보다 아차 싶다. 역시 난 니체로 부터 선택받지 못한 독자가 되고 말거야! 읽을 수 있는 눈이 달려 있지만 니체가 바라는 읽을 수 있는 눈은 아니기에!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르고스에게 백 개의 눈이라도 빌려볼까?

 

 3부는 <차라투스트라> 의 여행 가이드북과 총체적인 설명을 해주며 책을 마무리 해주고 있다. 또한 니체를 알고자 하는 이들이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들도 설명해주고 있어 내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을 덮고 책장에 꽂혀있는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의 빨간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니체를 알면 알수록 고통을 겪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통을 즐기고 견디는 자가 되고 싶게 만드는 것도 니체다.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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