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일럿 피쉬라는 게 있는데 그 건강한 물고기의 똥 속에는 건강한 박테리아의 생태계가 있는 법이야. 그러니까 수조를 설치할 때 제일 처음 넣는 물고기가 중요하고, 그 건강한 물고기가 생태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수돗물 안에서 똥을 싸면 약 2주일 후에는 건강한 물고기의, 즉 좋은 상태의 좋은 비율로 수조 안에 박테리아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본문 중에서
장마의 시작이란 뉴스를 보고 빨간 땡땡이 우산을 챙겨 들고 나가다가 우편함을 슬쩍보자 책이 와있다. '파일럿 피쉬'. 표지 속의 물고기가 빗물로 가득한 세상으로 당장이라도 나와 헤엄칠듯이 책속의 어항에 담겨있다. 가벼운 무게에 쉬이 읽겠다는 생각에 책의 페이지를 확인하자 263페이지다. 우와!! 이리 작은 책에 이리 가벼운 책에 이렇게 많은 종이들이 담겨있다니 이런 책은 조심해야해!라고 혼잣말을 한다. 가벼운 책일수록 남겨진 무게가 그보다 훨씬 더 무겁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 읽기에 적당한 책이 굳이 있겠냐는 생각도 있지만 가뜩이나 비만 오면 몸 속 가득 수분이 차오르는 내겐 수분이 솟아나게 하는 책은 비오는 날 읽지 말아야하는 책이 되었다. 분명 뒷 표지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 책임이 분명한데도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저 물고기들이 내게 어서 나를 헤엄치게 해주세요라는 투명한 목소리로 말하기 때문이겠지.
책을 넘길 때마다 손 곳곳에 물방울이 살아난다. 눈앞에 커다란 수조가 나타나 투명한 물을 가르는 물고기들이 나를 뚫어지게 보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쉬이 넘어가는 책장을 자꾸만 멈추게 되는 건 왜일까?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잠들어 있던 내 기억도 떠오른다. 책을 읽어내려가며 좋은 구절을 포스트 잇에 표시하는 버릇이 있는데 포스트 잇 2장을 넘긴 책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페이지를 표시할 때마다 들었던 연필을 손에 들고 아련히 떠오르는 내 기억들을 잠시 묶어놓으려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떠올려도 된다고. 넘기는 페이지마다 내 기억의 끈을 잡아두고 다음 페이지를 읽어내려간다. 2시간동안 나는 야마자키의 수족관에 들어있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다. 야마자키가 말을 할 때는 거실에 놓인 수조 속 물고기도 되고 그가 생각할 때는 몰래 그의 머리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어 버린 나. 그의 물 속은 한결 같았지만 그의 물 표면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물 표면도 물 속처럼 한결 같았다면 물 속을 헤엄치는 내가 마시는 물맛이 이렇게 다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의 물은 싱겁기도 했고 소금물처럼 짜기도 했으며 달콤하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고 상큼하기도 했으며 쓰기도 했다.
야마자키, 책의 주인공이다. 19년동안 예전 여자친구가 구해준 애로잡지사에서 편집을 맡고 있으며 쿠와 모모라는 치아와 강아지가 반겨주는 그의 아파트에는 90센티미터짜리 수조가 있다.수조 물갈이는 꼭 새벽에 하며 들릴듯 말듯하게 항상 노래를 틀어놓고 밤마다 캔맥주를 알콜중독이 되지 않을만큼 매일 마시는 남자. 19년만에 전화를 건 옛 여자친구의 목소리를 한번에 알아듣는 남자, 야마자키. 19년만에 전화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이번 주말에 그에게 스티커 사진을 찍자고 말하고 그는 승낙을 한다. 이 전화와 기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항상 술에 취해 전화했던 알콜중독에 걸린 친구로 인해 그는 예전 기억들을 꺼내 본다. 야마자키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파일럿 피쉬' 이것인가.
책을 덮고 나서야 책의 제목이 왜 파일럿 피쉬일까라는 질문에 어설프게나마 답할 수 있을 듯하다. '파일럿 피쉬' 다른 물고기를 잘 살게 하기 위해 살기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물고기를 일컫는 말. 그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음에도 그 물고기는 그 속에서 살지 못하고 버려진다. 그렇게 파일럿 피쉬는 잊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파일럿 피쉬로 인해 까탈스런 물고기가 살아도 건강하게 살 수 있을만큼의 물이 된 파일럿 피쉬가 살던 때의 물은 기억한다. 물의 기억은 그 물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물고기에게 전해진다. 파일럿 피쉬의 노력과 그들과 함께 행복했던 시간들을. 그 노력과 시간이 그대로 녹아있는 물에 다른 물고기가 산다해도 파일럿 피쉬는 소멸되는 것이 아닌것이다. 돌이켜보면 추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다시는 이 기억을 꺼내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었던 아픈 기억들도 잠시 저 깊숙한 곳에 있다뿐이지 소멸되지는 않는 것이다.
다시금 생각하는 것만으로 너무 아파서 꽁꽁 숨겨놓았던 기억도 지금의 나를 건강하게 살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그때는 아팠지만 그 아팠던 상처는 내가 겪었다는 이유하나로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돌이켜보면 행복했던 기억들보다 아팠던 기억들이 더 많다는 생각에 아픈 기억들을 보며 다시금 좌절하고 아파해야했다. 그 기억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관심도 없었고 아팠던 그 순간들만 생각하며 원망했었다. 원망할 대상도 없는 기억을. 그 아팠던 기억들은 나의 몸 속 곳곳에 녹아들어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프고 아팠던 과거의 기억들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된다. 나의 모든 기억들이 나라는 수조를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비록 사람의 수조이니 완벽할리는 없지만) 파일럿 피쉬가 되었다는 것이 몸 속 곳곳의 물을 따스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살아가면서 쓸모없는 기억은 없다는 것. 책을 읽으며 내 방식대로 정한 사실하나. 살아오면서, 이제 살아나가면서 만났고 만날 기억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거라는 생각을 하니 힘이 불끈난다. 내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것이 내 기억이라는 것이 (물론 기억을 구성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관계도 나를 정화시키는데 들어간다.) 앞으로 향하게 될 발에 힘을 실어준다.
파일럿 피쉬에 관한 리뷰를 적어보면서 내 수조의 파일럿 피쉬의 시작은 우리 부모님이 아니셨을까 생각이 든다. 우리 할머니께서 우리 엄마의 파일럿 피쉬였던 것처럼. 나도 이렇게 기억들을 쓰다듬으며 살아가다보면 누군가의 파일럿 피쉬가 될 수 있을거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