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요시모토 바나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혹은 친구들에게 이 질문을 자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제집이 아닌데도 바나나의 책을 손때가 타도록 가방 속에 넣고 다닐 때를 돌이켜 보며 다시 묻고 싶어진다. 왜 바나나의 책을 좋아하는 것일까?

 

<하얀강 밤배> <암리타> 이후로 바나나를 만나기가 두려워졌던 것은 그녀의 소설이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요즘들어 다시 바나나 월드로 빠져들고 있다. 얼마 전에 나온 <슬픈 예감>에 이어 선물받은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읽으며 전에 느꼈던 따뜻함을 만나게 된다.

 

책의 내용은 9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거기에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귀가 솔깃한 요시토모 나라가 그린 일러스트까지 뺀다면 70페이지가 조금 넘을 것 같다. 저번에 읽은 <슬픈 예감>보다 더 얇은 것에 서운한 것은 바나나의 따뜻한 바람을 더 오래 느껴보고 싶어서 일 것이다. 바나나의 책은 내게 비가 내린 후에 부는 상쾌한 바람과 뜨겁지 않은 햇빛을 떠올리게 한다. 산책하기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은 온도는 바나나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았던 시간을 이 책이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책의 내용은 단순하리만치 간단하다. 이건 바나나의 재주일까? 간단한 줄거리 속에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들어가 마치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형성하게 만들고 그럼으로 인해 나역시 바나나에게 위로받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해준다.

 

엄마가 죽고 난 후 비석을 만들던 아빠는 동네에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소문난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다 쓰러져가는 3층 건물에 들어가 산다. 그 소문을 들은 미쓰코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찾아가고 그 곳에서 엄마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고 아빠 역시 엄마를 위한 돌고래 비석과 만다라를 만들며 위로받는 것을 알게 된다.

 

엉뚱하고 지저분한 아르헨티나 할머니(유리)는 세상과 단절된 듯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익숙했던 무언가가 달라진 뒤에 우리는 그리움을 갖게 된다. 그것을 뒤늦게 알고서 슬퍼하는 미쓰코에게 유리는 그리움을 견디는 방법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쓰던 가구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아 점점 더 지저분해지는 건물 역시 그리움은 닿을 수는 없지만 곁에 둔다면,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면 슬프지 않은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유리씨를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미쓰코를 보며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과 받아들이는 일은 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유리씨는 신기하리만치 사람들을 잘 흡수한다. 아니, 미쓰코와 아빠가 잘 흡수되는 걸까?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일을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설령 그가 사랑했던 여자를 위한 비석을 만드는 일이라도. 사람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자 하는 유리씨의 모습은 만다라를 만들만큼 아빠의 마음을 빼앗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내의 죽음으로 공허함에 빠진 아빠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다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렇게 허탈하게 보내지 않겠다고.' 그 마음이 있었기에 유리씨를 사랑하게 되면서 만다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주는, 평며이 아니고, 시간도 없어. 그리고 무수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겹겹의 층 안에 시간과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고, 전부 이어져 있어, 마치 요술 상자처럼 말이야. 이건 어떤 이치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어. 어떤 부분이든 모든 부분과 통하게 돼있어. 깊숙한 공간이 한없이, 하염없이 겹쳐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나타내 보려고 한 것이 만다라가 아닐까." -p.19

 

만다라를 만드는 아빠를 보며 유리씨와 미쓰코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픈 아내를 죽기 전에 먼저 가슴에 묻었던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으리란 결심과 함께 유리씨를 온전히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을.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 절대 마음속에서 미리 묻어서는 안 된다.>  -p.23

 

투명한 눈물과 따뜻한 봄바람을 닮은 책은 바나나 스럽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은 유독 바나나의 글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하드보일드 하드 럭>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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