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한(恨) 많은 이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애달픔이 들어있다. 그 목소리는 빛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닌 듯한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듣는 다면 이런 기분일까? 세상에 한이 없는 사람이 어딨냐며 한을 속으로 삭히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이러할까?

 

<천년학>을 읽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서 듣는 기분이었다. 노을 지는 언덕 밑으로는 파도가 물결치고 조용히 이야기를 하던 중년의 남자가 떠나고 나면 그 자리에 단아한 여자가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내게 들려주다 조용히 일어나 소리를 할 것이다. 그저 나는 남자가 떠날 때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노을을 보고 여자가 구슬픈 남도소리를 마칠 때까지 손하나 까딱 못하며 그녀의 소리가 내 속으로 들어와 흔들어 놓아도 그저 듣고 또 듣고 할 뿐이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남도사람> 연작소설 세 작품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를 담고 있다. 현재 개봉 중인 영화 임권택 감독의 <천녁학>은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띠지에는 임권택 감독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이 띠지로 인해 이 책은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겠지만 띠지가 없다하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연작소설이니 주이공들의 삶은 얇은 인연의 끈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보일듯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희미함, 들릴 듯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함으로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닿고있다.

 

한 남자가 전라도 보성읍 박의 한적한 길목 주막을 찾아왔다. 주막집 여자와 그 남자의 이야기 속에 남자의 과거가 회상된다. 내 삶이 아니라는 듯,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는 듯 말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말에서 더욱 긴장이 되고 안달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남자는 어릴 적 홀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소리꾼의 아이를 낳다가 죽자 소리꾼과 함께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여동생과 함께. 남자는 어미를 죽인 소리꾼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햇덩이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 뜨거움은 남자에게 살의를 일으킨다. 다행히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태양때문'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하지 않고 남자는 소리꾼과 여동생을 두고 도망친다.

 

떠난 후에도 떠난 것이 아님을.

사람의 인연이 그리 쉽게 끊기지 않음을 남자와 여동생은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떠나지 않았을까?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여자의 아비는 그녀의 눈에 청각수를 넣어 눈을 멀게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의 소리는 지금처럼 한이 깊지 않았을까? 의붓아비는 아들이 자신에게 살의를 느낌을 알면서 일부러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는데 그가 아비를 죽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생각의 꼬리들은 부질 없는 것이다. 그녀와 남자의 초연한 목소리에는 용서가 담겨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용서. 용서 했기에 원한은 한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의 한이라는 것이 그렇게 심어주려 해서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걸세.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긴느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중략)

 

"... 그 여인이 제 아비를 용서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을지 모르는 노릇이지. 아비를 위해서도 그렇고 그 여자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여자가 제 아비를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건 바로 원한이지 소리를 위한 한은 될 수 없었을 거 아닌가. 아비를 용서했길래 그 여자에겐 비로소 한이 더욱 깊었을 것이고......"

 

얇고 가벼운 책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후다닥 읽어버렸다. 하지만 다 읽고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방에 넣은 책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 눈은 길을 쫓고 있는데 생각은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여는 순간 생각들은 한마리 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일까? 선학동의 학이 된 그녀일까? 이청준의 책은 읽고 난 후 한동안 독자에게 그를 잊지 못하게 하고, 주인공들의 마음을 대신 앓게 한다. 그것이 싫지 않다. 

 

이 책을 보고 난 후 <서편제> DVD를 구해왔다. TV에서 서편제를 간간히 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고 책을 읽고나니 여자의 남도소리가 듣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주에는 혼자서라도 조조로 <천년학>을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아직은 서편제도 천년학도 보지 않았지만 영화를 본 후에 이 책을 한번 더 손에 잡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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