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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에는 거북이가 없다
로이스 로리 지음, 서남희 옮김 / 양철북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서점에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까? 그 책의 제목도 작가도 처음 듣지만 서점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책이 있다. 구석진 책장에 꽂혀있는데도 한눈에 그 책의 제목이 내 눈에 띄어 들어본 책인가 하고 뒤적거리지만 처음 만나는 책이라 관심을 주지 않고 다시 내려놓는다. 그 후 그 책을 잊을만큼의 시간이 흘러 어느날 다른 서점에 가서 책을 보다가 또 다시 한권의 책이 눈에 띈다. 전에 그 책이다. 왜일까란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그 책을 손에 들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 눈에만 띄는 구석 자리에 있던 책을.
여섯 살의 엘리자베스가 책의 주인공이다. 이건 엘리자베스의 아주 오래 전 일일 것이다. 하지만 책 속의 엘리자베스는 여섯 살이다. 금발머리가 너무 귀여운 아이는 부모님과 예쁜 어니와 함께 뉴욕에 살고 있다.
<거리낌없이 붓질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난 내가 그린, 선이 뚜렷한 언덕과 연두빛 들판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가 좋았다. 무엇보다 멀리 있는 언덕과 하늘이 맞닿은 부분이 좋았다. 내 그림에서 유일하게 그 부분만은 두 가지 물감이 서로 번지게 그렸다. 실제로 시골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하늘과 언덕이 만나는 곳의 빛깔이 선명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그린 것이다. -p.18>
그림을 잘 그리는 엘리자베스는 유치원에서 주는 우유를 먹기 싫어하고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펄 하버(진주만)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는 말에 구멍가게의 아줌마를 생각한다. 엄마가 왜 전쟁이란 말에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르고 유치원 짝꿍과 손을 잡고 지하철 역까지 달려야 하는 공습훈련과 전쟁이 무슨 상관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 시절에 엘리자베스가 싫어하는 일을 어른들이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을 뿐이다. "전쟁 때문에!"
<그날 저녁, 아빠가 전쟁에 나가게 됐다고 엄마 아빠가 우리에게 말했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자 태평양이라고 했다.(중략) 그 하늘에서는 여러 빛깔이 부옇게 번져 보일 것만 같았다. 눈물이 끌썽글썽한 눈으로 바라볼 때처럼 -p.21>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엘리자베스는 슬프다. 그건 아빠가 전쟁을 하러 태평양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의 군복이 아주 멋지고 군복을 입고 장난을 치는 것은 재밌지만 아빠가 가는 것은 싫은 엘리자베스. 그 아이는 말한다. 태평양을 보지 않아도 어떤 곳인지 알 것 같다고. 그 곳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아픈 곳, 슬픈 곳이라는 것을 안다고.
그곳으로 아빠를 보내는 엘리자베스는 슬픔으로 가득차지만 곧 잊는다. 여섯 살은 다 그런거니까. 하지만 아빠가 꼭 돌아오길, 최대한 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아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말도 안 돼!'라고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 날 응접실에 모인 어른 중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아기가 필요하대? 남자, 특히 아빠들이 전장에서 죽어 희미하고 아련한 지평선 너머로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엄마와 할아버지와 여자 아이가 아기만 데리고 집에 남겨지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아기는 안아 달라고, 돌봐 달라고 울어 댈 텐데, 안아 주고 돌봐 주던 아빠를 데려가고 그 자리에 훨씬 더 작고 힘 없는 아기를 보내 주다니, 무슨 자연의 이치가 그렇담? -p.30>
이 부분에서 웃음을 지어야 할지 숨을 내쉬어야 할지 난감했다. 펜실베니아로 전쟁을 피해 간 엘리자베스는 할아버지 집에서 지낸다. 곧 동생을 낳을 엄마를 위해서 방이 너무 많아 자꾸 헤매게 되는 할아버지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엘리자베스는 남동생을 갖게 된다. 남동생이 태어나면 안된다고 그토록 기도했지만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엘리자베스는 고든이란 이름의 남동생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고든은 사랑스런 아기라는 것을 알았기에 엘리자베스는 아빠가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도하기로 했다. 꼭 무사히!
엘리자베스는 할아버지 집에서 흑인인 테이티 가정부의 손자 찰스와 친구가 된다. 찰스를 좋아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왜 찰스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면 혼이 나는지 왜 자신은 찰스가 사는 동네에 가면 안되는지 모른다. 찰스와 자신의 피부색 차이가 대체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다. 그건 어른들의 규칙이므로. 하지만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찰스와 노는 것은 괜찮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찰스와 함께 재밌게 시간을 보낸다. 찰스와 함께라면 오텀 거리 끝에 있는 숲에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들이 그곳에 백살이 넘는 거북이를, 무지무지하게 커져 식탁만한 거북이를 버린다고 해서 무섭지만 찰스와 함께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은 엘리자베스다.
<그건 오래 전 일이었다. '더 이상 나쁜 일은 없을 거야.'라고 했지만 아빠와 난 진짜로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봄에 우리는 그런 거짓말이 필요했고, 그렇게 시치미를 떼야 했다. 우린 둘 다 너무 큰 것을 잃은 것이다.
-p.215>
이 책은 엘리자베스의 성장기이다. 여섯 살에서 일곱살이 되는 시간동안 엘리자베스가 겪은 아픔에 대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셔서 겪은 아픔과 이웃집에 사는 친구노아가 죽어버린 아픔과 더 큰 아픔을 겪는 엘리자베스는 가슴으로 아픔을 채워나가고 테이티의 손길에 위로받으며 성장해나간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는 아픔보다는 확실히 삶의 아름다운 것들이 더 많았다. 푸르른 숲과 테이티의 따뜻한 품 속,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 고든의 귀여운 머리카락, 언니의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할머니의 투박하지만 사랑이 담긴 것을 알 수 있는 말투까지 그 시절에는 아름다운 것이 분명 더 많았기에 엘리자베스는 웃는 날이 더 많다.
누구나 아픔을 간직 할 수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이전의 아픔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큰 아픔과 슬픔을 겪지만 시치미 떼는 법을 배운다. 어른들이 자신의 아픔을 속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프다고 소리 질러야만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상처로 인해 누구나 아픔을 간직한 채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슬쩍 모른척 해줄 수도 있는 마음 깊은 아이가 되어간다.
여섯 살 엘리자베스가 감당하기에는 아픈 추억. 그래서 일곱 살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엘리자베스. 시간을 흐르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다.
-----------------------------좋았던 구절--------------------------
<나는 루이즈와 루이즈네 식구와 집을 가끔 떠올리며, 거기에 가 있으면 왜 그렇게 행복한지 생각해 봤따. 찰스와 찰스의 엄마와 테이티도, 그리고 내가 가면 안 되는 찰스네 집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문든 우리 가족 모두 언니의 종이 인형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름 잡힌 종이 파일에 깔끔하게 정리된 인형, 분류표까지 붙어 있는 인형. 언젠가 거대한 손이 그 종이 파일을 뒤엎어, 그 속에 든 우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뒤섞어 버렸으면......그래서 나중엔 우리가 원래 누구였는지, 어디에 속했었는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결국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p.161>
<릴리언은 여느 때와 달리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제야 난 깨달았다. 그런 행동은 할로윈 축제 때 내가 가면을 쓰는 것처럼 마음을 가리는 것임을. -p.181>
<"넌 우는 게 쉽겠지, 엘리자베스. 너는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 들켜도 울고 발가락만 어디 부딪혀도 우니까. 하긴 나도......나도 잘 우는 편이지.
하지만 네 할머니가 순복음 교회에 오셔서 찰스를 위해 우신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어.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