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
이응준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비가 내린 탓일까? 아니면  창 밖의 바람이 내게 이야기 하길 기다린 듯 창문을 열자마자 내 얼굴로 달려든 탓일까? AM 03:11. 이 새벽에 잠들지 못하고 찬 바람에 소름 돋은 팔을 모른 척하며 깊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 짙은 어둠은 완전한 검은색이 아니라 그 사이에 바람의 색이 뭍어있는 것 같다.

 

깊고 깊은 수렁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럴 때 생각나는 책이 얼마 전에 읽은 <약혼>이다.  이응준의 명성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건 사랑이야기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지인이 추천해 준 책이기 때문이다. 사랑이야기라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지인이 말한 독특한 사랑이야기라는 말을 흘려들었던 나는 책의 독특함에 휩싸여 한동안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난감했다.

 

깊은 어둠도 모잘라 그 곳에 안개가 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가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었다. 짙은 어둠과 안개로 휩싸인 책 속에서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나에게 숨쉴 틈을 주었으며  투명한 이슬이 맺히는  문장들이 나를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다. 안개가 물방울이 된 느낌이랄까. (그 물방울을 느낀 건 책을 두 번째 읽고 나서였다.  한번의 만남으로는 그 속내를 알기 힘든 책이 많은 것 같다. 하긴 사람도 만남의 횟수마다 다르게 느껴지는데 많은 사연을 닮고 있는 책이야 오죽할까.)

 

<약혼>이라는 행복한 제목은 검은 표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이 그 행복의 빛을 막고 있다. 하지만 행복이란 녀석이 워낙 강력해서 그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빠져나올 구멍을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책을 읽고서 떠오른 노래가 있었는데 <소울메이트>란 드라마에 나온 'This is not a love song' 이었다. 이 책은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기 아니었다. 사랑이야기라고 부르기엔 삶의 무게가 무거웠던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가슴을 옥죄게 만들기도 하고 그들의 힘든 한숨을 그저 멀리서 지켜보게 만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숨과 함께 나온 입김과 뿌연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가 만든 독특한 사랑이란 강에 주인공들과 빠져 있거나 작가의 아름다운 문체에 취해 있었다.

 

<약혼>은 총 9가지의 단편소설로 되어있다. 이 중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이 6개 아직은 더 읽고 생각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가 3개이다. (그 중 1개는 뒤에 해설을 보고서도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그 작품을 여러 번 읽다보면 이해가 될 수 있길 혹은 나만의 해석이라도 내릴 수 있길 바라본다. 그 중에서 한가지 이야기를 말해보자.

 

<누구는 누구에게 사랑했다고 말한다. 나는 모른다.

누구는 누구에게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모른다.

누구는 누구에게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나는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묻고 싶다. 예전에 내 곁에 있던 그대여,

그때 정말 내 곁에 있기나 했던 것입니까? 나는 모른다.>   -내 어둠에서 싹튼 것

 

책이 첫 이야기인 <내 어둠에서 싹튼 것>의 내용은 한 남자의 애인이 자살했다. 그의 애인은 구년이나 그를 짝사랑했다고 고백한 후 애인이 된 지 칠 일째 새벽에. 아무도 그가 그녀의 애인임을 믿어주지 않았다. 가끔 자신의 분신을 본다는 그녀의 자살은 주인공 남자는 방관만하며 지켜보았던 삶에 개입하게 된다. 섬뜩한 이 세계로. 그녀가 남긴 염주와 함께. 그녀의 죽음과 함께 그의 교수님이셨던 문교수님도 간암으로 죽음을 맞게 되고 주인공은 죽음이란 사건(?)으로 인해 자신과 교수 그리고 그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산책을 한다. 교수의 유언에 따라. 그의 모습에서 나는 무엇을 본 걸까? 분노? 해탈?

 

약혼에 실린 9개의 단편들을 만나면서 헤어질 때면 나는 안개 속으로 인사를 하는 여인인 된 것 같았다. 선명해보이지 않는 인사, 헤어짐이 아닌 인사를 하는 기분. 그 아련함을 짧은 단편들과 인사할 때면 나는 아련함을 느꼈다. 다시 꼭 만나야 할 친구를 안개 속으로 보내는 듯한 기분과 안타까움 혹은 이른 아침 사랑하는 이를 타지로 보내는 서글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은 이 책과의 만남이 끊어지지 않길, 다시 또 만나길 약속해야겠다. 그가 하고픈 말을, 그의 인사를 잘 보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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