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던이 ㅣ 우리들의 작문교실 2
이미륵 지음, 정규화 옮김, 윤문영 그림 / 계수나무 / 2001년 9월
평점 :
어머니 전상서
어머니 차마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면서도 너무 죄스러워 글한자 쓰기가 숨이 차도록 힘이듭니다.
무던한 삶을 살라고 지어주신 이름을 가진 무던이는 이렇게 어머니를 울리고 맙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시절 여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요. 어떠한 연유로 제 이름을 무던이로 지어주신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 하나 두고 제가 전부인줄 알고 사신 어머니 요즘은 일거리가 있으신지요? 저 시집 보내느라 가뜩이나 없는 살림 구멍내고 간 것 같아 시집가서도 내내 어머니가 걱정되었는데 이제는 어머니 생신날도 고기한근 사서 갈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이렇게 가슴이 메어집니다.
기억하세요? 어머니. 지금보다 더 어린 제가 주제도 모르고 지주의 아들 우물이를 좋아해서 어머니의 생신 고기를 사오는 것을 까맣게 잊은 것을요. 그 시절 저는 몰랐어요. 어머니. 소작인의 딸이라는 것이, 아비 없이 홀어머니의 자식이라는 것이 가진 그 시절의 아픔을요. 알았다 한들 우물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머니.
우물이는 제게는 어린 시절의 전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식교육을 받는 우물이가 방학때 집에 오면 저는 어머니 말씀대로 집에만 있기가 참 힘들었어요. 왜 저를 찾는 우물이를 만나면 안되는 것인지 어머니가 서운했어요. 아니 더 서운한 건 우물이었어요. 그 아이는 신식교육을 받은 여자랑 결혼해야 한다는 그말이 저는 얼마나 서운한지 다시는 그 아이와 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 아이가 그날 밤 작은방에서 어머니와 저와 함께 자고 난 후에 저에게 크면 시집을 오라고 했을 때 저는 그말을 그대로 믿어버렸어요, 어머니. 저는 정말 우물이한테 시집 가고팠어요. 어머니.
어머니.
세상에는 왜이리 안되는 것이 많은지요? 우물이를 가슴에 품고 저는 저를 좋아하는 부잣집 아들 일봉과 결혼하는 것이 참 아팠지만 할 수 없었어요. 그때 흉년이 들어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으니까요. 저는 어머니가 좋아하면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 아시다시피 일봉이란 이름의 제 남편은 저를 어여삐 여겨주었고 착하신 시부모님 밑에서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어머니.
이건 알아주세요. 저는 정말 사랑받아 행복했어요. 제 남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걸요. 우물이란 이름이 자는 중에 제 입에 나온 건 아마 다른 이를 좋아해야 하는 까닭에 꿈에서라도 이별을 고하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어머니. 우물이 이야기를 남편하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인줄 몰랐어요. 은기둥, 금기둥을 주어도 모자랄만큼 저를 사랑한다고 했던 그에게 마음에만 품은 정인을 말하는 것이 그리 죄가 되는 줄 몰랐어요. 어머니.
비가 와요. 어머니.
그 집을 나올 때도 비가 왔는데 어머니에게 가는 길을 그토록 바랬것만 그 길은 어머니 참 힘이 들었어요. 쉬고 또 쉬어도 힘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닿지 못했나봐요. 어머니.
죄송하고 죄송해요. 어머니.
무던히 살라고 지어준 이름값도 못하는 딸이라 죄송해요. 어머니.
이제 무던이는 어머니 생신에 고기도 사드리지 못하고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지도 못해요. 어머니, 이 하늘에서 무던이는 너무 슬퍼 울어요. 비가 내려요. 어머니.
#간결한 문체에 담긴 애절한 마음을 읽다.
어린이 책에도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발견할 때면 신기하다. 어른들의 책에만 고전문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 책에도 고전동화가 있다는 것을 왜 생각치 못했을까? 읽으면서도 이것이 옛날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지금 읽어도 매끄러운 문체 때문인걸까? 이주홍, 마재홍님의 동화를 읽으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국작가들의 동화만이 재밌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예전이 부끄러울 만큼 우리나라 동화작가들의 책도 아름다답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다.
이미륵 선생님의 자전적인 작품이라는 무던이에서 이미륵은 무던이가 사랑하던 우물이였다고 한다. 우물이란 소년의 이름에서 '볼우물'이란 우리말이 생각났다. 어쩌면 이미륵 선생님은 어렸을 때 보조개가 있던 귀여운 아이는 아니였을지 추측해본다. 선생님이 고향에 두고 온 첫사랑 무던이를 독일에서 얼마나 그리워했을지 작품에서 느껴진다.
군더더기 표현이 없는 문체들은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애절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 말을 많이 해야, 글을 많이 써야 감정이 전해진다고 느낀껄까? 세상에는 그러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데 말이다.
#이미륵 그를 기억해주세요!
한국인 작가로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일에 소개한 최초의 작가이자 유일한 사람이 이미륵 선생님이다. 1889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미륵 선생님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일로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가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압록강은 흐른다>로 독일문단에 이름을 알리고 작가 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글 속에서 조국을 그려낼려고 애썼다고 한다. 뮌헨 대학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한국학을 강의하기도 했던 이미륵 선생님은 1950년 고국 땅을 밟지도 못하고 뮌헨에서 돌아가셨다.
<무던이>를 네이버 책에서 찾으니 외국 창작소설로 분류가 되어있다. 한국인이었고 한국이 그리워 글에서, 삶에서 한국을 말하던 작가의 작품이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소설로 되어있음에 가슴이 아리다. 그의 재능을 품어줄 수 없었던 과거의 잔인한 현실도 아프고 아직도 그의 이름 하나 기억하는 이가 적다는 것에 아프다. 그리고 죄송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