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겨울의 끝자락에서 읽은 책은 봄을 생각나게 했다. 천천히 읽자고 마음 먹어놓고도 편히 읽지도, 천천히 읽지도 못했던 책이었다. 그녀의 글이 따뜻해서, 그녀의 글에 봄이 담겨잇어서. 아프고 시린 시절의 그녀도 있었건만 내게 그녀는 아프도록 따뜻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마치 한겨울 눈이 내린 날 밖에서 놀다가 꽁꽁 언 발을 할머니가 아랫목에 덮힌 이불에 넣어주셨을 때의 따끔따끔한 따뜻함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 달콤하고 따뜻한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책을 빨리 읽어버린 것은, 휘뤼릭 감정을 담지 않고 읽어버린 것은 추억을 떠올리기 싫어서였다.

 

얼어버린 마음이 녹아버리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 잠 들기 전에 읽을 용기도 없으면서 꿈꾸었다. 꽁꽁 언 내 마음의 땅을 그녀가 호미질 해주길. 그리고 봄이 오고, 봄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다시 읽었다. 내 마음의 땅을 갈아줄 호미를 그녀가 내게 선물했다. 그렇게 봄이 왔다, 내 마음에.

 

누군가의 삶을 읽어간다는 것은 몇년 전만 해도 흥미가 없었다. 숨가쁘게 호흡하느라 타인의 삶에 호기심을 가질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나만을 위한 삶도 바빠 죽겠는데 타인의 삶까지 읽어볼 시간이 어딨겠냐고 말하며 책을 내팽겨치고 달리느라 바빴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방향치인 아이라는 것을.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장거리 달리기에 맞는 호흡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그렇게 삶이란 길에서 방향을 잃고 헉헉 거리다보니 궁금해졌다.  다른 이는 어떻게 숨쉬는 지, 흔들리는 방황의 시기를 지나간 이들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었고 그때부터 산문집을 읽어내려갔다.

 

산문집은 한사람의 삶의 한자락이 들어가있다. 전부가 들어가있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서 소중한 시간 한조각, 아픈 시간 한조각, 행복했던 시간 한조각, 그리움이 가득한 시간 한조각, 누군가에에 베풀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던 시간 한조각이 산문집에 들어있다. 한조각들이 모여 책을 구성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소중하고 아픈 시간을 독자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겨울만 지속될 것 같던 내 마음에도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호미>는 박완서라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유명한 작가여서 읽어야만 하는 책이 아니라 77년이란 삶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기에, 가슴에 뜨거운 불을 담아 놓고도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녀의 이야기가 읽혀지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한다. 가슴에 불을 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뿐더러 그녀처럼 그 불을 밖으로 내놓는 이도 많지 않으니까.

 

할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작가를 그녀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 읽는 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했다. 왜 할머니를 그녀라고 부르는 걸까? 내게 그녀는 대체로 젊은 여성을 부를때 쓰이는 표현인데 말이다. 아마도 그녀의 글에서 늙음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도 알고 일제시대를 직접 경험했다는 것도 알지만 그녀의 글에서 늙음을 발견할 수 없다.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 지인들을 사랑하는 마음, 가족을 아끼는 마음을 늙었다고 단순히 나이가 지긋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에게는 겨울을 녹일 힘이 있으니까. 봄은 늙기보다는 찬란함을 준다. 작은 호미하나 들고 70년을 자신의 삶을 호미질 한 그녀의 봄은 평온하면서도 찬란하다. 그 파릇함이 책에는 있다. 아픔보다는 그 파릇함에 나도 봄을 맞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 삶의 방향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방향을 찾는데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다만, 자연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숨쉬는 법을 조금은 알려주었다. 그게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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