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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 - 꿈꾸는 여행자의 산책로
에릭 파이 지음, 김민정 옮김 / 푸른숲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새벽 2시에 깬 소년을 감싸는 건 깜깜한 어둠이다. 자신이 사라진다해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그대로 깊은 바다에 가라앉는 느낌을 받은 소년은 심장이 아파서 두 조각이 나버릴 것 같다.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소리가 들린다. 정말 멀고 먼 기적소리가 들린다. 어디에 철로가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먼 곳에서 들리는 기적소리에 어둠 속에서 소년의 심장은 아파하기를 멈추고 정지된 시계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적소리가 소년을 살린다. 깊은 외로움과 깊은 어둠 속에서. 소년은 그 기적소리만큼 소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내용의 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 부분이 너무 좋아서 책을 읽고, 그 작가를 좋아하게 되고 야간열차를 꿈꾸게 되었다. 아직까지 한번도 나는 야간열차를 본 적도 없고 한밤중에 그런 기적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한번은 꼭 야간열차를 타보고 싶다고, 그 소리를 직접 듣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밤이면 소년의 이야기가 귓가에, 머리 속에 머물러 나를 떠나게 만들었다. 기적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야간열차를 탈 수 있는 곳으로 그런 상상을 하다 날이 밝아왔다. 기적소리가 들리지 않는 나의 밤은 새벽빛을 기다리며 흘러갔다. 새벽빛을 보며 얼마나 많이 다짐했던가, 한밤중에 열차가 지나가는 곳에 가서 살자라고. 불면증은 고쳤지만 가끔씩 잠을 자다가 깰때면 한번도 듣지 못한 한밤의 기적소리가 그리워진다. 그런 내가 <야간열차>라는 제목의 책을 봤을 때 손에 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책을 읽기도 전에 책이 그리워졌으니.
<야간열차-꿈꾸는 여행자의 산책로>가 부제로 붙어있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여행자에게 철도가 산책로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궁금해졌다. 그는 무슨 이유로 야간열차를 타는 걸까? 그는 어떠한 위로를 받고 싶기에, 무엇을 위해 야간열차를 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와 야간열차, 그리고 기차가 지난 장소들의 흔적이 궁금해졌다.
<밤잠 못 이루는 사람들은 시간과 시간 사이를 떠도는 유목민이다.>
그는 불면증이다. 사람은 어쩌면 삶의 한 조각에 잠을 잃어버리는 조각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내가 불면증으로 힘들 때가 있었던 것처럼 작가역시 그렇듯. 멀뚱히 누워서 밤의 까만 점을 세며 새벽빛을 기다린 나와 달리 작가는 야간열차를 탄다. 그가 야간열차를 탄 이유는 아마도 자신과 같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였을까? 한밤중에 혼자 잠에서 깬 사람은 한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그 지독한 외로움을. 누구나 잠드는 시간에 나만 홀로 깨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힘든지를.
한밤의 야간열차는 그런 불면증 환자들에게 호텔이 되어준다. 접이식 의자가 침대로 쓰이는 호텔로 들어서면 그들은 밤의 우울을 떨쳐내고 금세 활기를 찾는다. 그들은 그렇게 야간열차에 중독 되어 있다. 작가는 말한다. '꼬마 불면증 환자' 출신들인 그들이 기를 쓰고 야간 열차에 올라타는 건 사라져버린 그 세계를 되찾기 위해서라고. 작가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열차는 작가가 찾고 싶은 그 세계로 출발한다. 철로와 철로가 얽히고 설킨 그 세계로. 시간은 상관없다. 야간열차는 시간과 상관없는 유목민을 꿈꾸는 이들의 열차이므로.
러시아, 프라하, 스위스, 베를린, 황하, 몽골 등 많은 곳을 열차를 타고 가면서 작가는 그곳과 연관있는 예술가들을 떠올린다. 아니 예술가를 떠올렸기에 그곳과 예술과가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고 싶어서 시작했다는 야간열차는 작가의 머리 속에 추억을, 기억을 집어 넣어 준다.
달콤한 여행이 아님은 확실하다. 사라져가는 것들은 낡고 쓰러져간다. 그렇기에 빛을 잃고 메마르다. 작가가 말하는 풍경들이 내게는 갈증을 일으키게 했다. 그 장소에, 그 기억에 작가는 수분을 집어넣는 듯도 했다. 문제는 내게 이 책은 갈증만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마음이 편했다, 불편했다를 반복했지만 나는 내내 불편했다. 작가가 말하는 카프카, 안톤 체호프, 크리스타 볼프에 대해 나는 모른다. 주석이 있음에도 그것만으로 작가가 아는 모든 것을 내가 알 수는 없다. 알 수 없기에 거기에 따른 감흥도 내게는 없었다. 내가 가진 문학, 예술의 깊이가 없음이 읽는 내내 나를 힘들게 했고 야간열차를 세우 내리고픈 충동을 일으켰다.
더 많이 알고 읽었으면 하고 바랬다. 한번쯤 저 속에 나와있는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보고서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그때는 나도 느리게 밤을 여행하는 야간열차를 편하게 타고 어둠을 가로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