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상상해보세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는 한 가장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솨아아아아아아____
아이의 키보다 몇배는 더 큰 호두나무가 서있습니다. 잎이 울창하고 꽃까지 피어있는 걸 보니 봄이겠네요.
바람에 따라 호우나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죠?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나는 소리를.
솨아아아아아아____
그 바람에 날개를 펴는 아이가 있습니다. 깃털 핥는 바람 소리.
날아봐. 날아봐. 바람아, 호두나무야 나를 데려다 주렴.
내 엄마가 있는 곳으로.
솨아아아아아아____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충북북도 영동군 양강면 지촌리 내궁골에 호두나무에 올라가 항상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박상복이 할머니와 살고 있다. 봄에 오신다던 엄마는 호두가 여물어가는 가을에도 오시지 않고 공부 잘하면 오신다던 엄마는 상을 받아와도 오시지 않는다. 호두나무 왼쪽 길은 어른들이 말하는 지름길이다. 옆에 공동묘지가 있어 어른이 아니면 어떤 아이도 지나간 적 없는 길을 혼자 걸어나온 상복이는 그 길로 내내 앞으로 걷는다. 언젠가는 엄마가 계신 서울에 닿을까란 마음에...중학교에 가서는 자전거로 엄마를 찾아 나서고...19살이 되어 오토바이로 엄마를 찾아갈거란 결심을 한다. 그제야 안다. 엄마가 재혼을 해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열아홉이 되기까지 상복이가 꿈꾼 건 얼른 자라 이 호두나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 꿈이 사라진 상복이는 스무살 여름 불타는 호두나무를 뒤로하고 서울 반대 방향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길고 아름다운 여행을. 마을 누나가 부탁한 딸기라는 별명을 쓰는 사람을 찾는 여행을.
#만화책,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이 만화책을 손에 넣은 순간 가슴에 훅~하고 바람이 불어들어 온 것은 표지 속 호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이 만화책에 반하게 될 것임을 예고 했던 것일까? 만화책, 아주 좋아한다. 이 만화책이 손에 들어왔을 때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겨울에 따뜻한 방바닥과 고구마와 동치미 그리고 만화책까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만화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여름이 아님을 휘회했다. 여름 밤 시골에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가슴을 식혀줘야 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손에서 놓고 차가운 겨울바람이라도 좋다며 밖으로 나가기를 여러번. 가슴 속 감동을 식힐 방법은 차가운 겨울바람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상복이가 여행하는 길을 실타래를 잡고 있는 딸기를 따라 가는 길이라고 해야할까? 아니, 실타래는 길에 있을지도 모른다. 곽재구 시인의 말대로 여행은 나아가야 할 길과 시간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 여행길에 동참하며 참 많은 것을 다 담지 못할 소중한 것들을 얻으며 마음 속 보물상자가 넘치고 넘쳤다.
<호두나무 왼쪽 길로>에는 길이 있고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또한 그 속에는 내내 사람의 정이 흐르고 있다. 눈물과 웃음, 한숨과 아픔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정이 상복이가 가는 길 내내 흐르고 있다. 옛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넘은 문경세재, 이름은 웃기지만 가슴을 아리게 하는 무진장에서 만난 친정엄마와 딸, 겨울에 눈이 내리면 꼼짝없이 갇혀버리는 정선등 많은 장소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책을 꼭 소장해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누구에게도 빌려주지 않을 책 말이다. 책 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우리나라의 절반에 해당되는 남도 곳곳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내 어디서 구할 수가 있겠는가!!
#이보다 멋진 여행이 담긴 책은 만나본 적이 없다.
마을 누나의 부탁으로 딸기를 찾아주기로 한 상복이는 오토바이로 길을 떠난다. 상복이 가는 길을 정리하자면, 영동->옥천(어릴때 여행한 곳)->함양->목포-> 해남- > 하동 -> 남해 -> 삼천포 -> 진주 -> 부산 -> 밀양->경주->문경세재->......(물론 빼먹은 곳도 있을 것이며,그 다음으로도 여행길이 기다리고 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복이가 찾는 것은 딸기라는 단 한사람이지만 상복이가 길에서 만나는 소중한 사람들은 상복이를 성장시킨다. 상복이의 성장만큼이나 이 책의 묘미는 바로 장소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이다.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에 얽힌 충청도와 경상도의 이야기,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에 얽힌 사연, 여러지방의 아리랑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까지 상복이가 가는 곳곳에 이야기들이 샘솟아 난다. 상복이와는 다르게 진행되는 그 마을의 이야기는 상복이가 여행으로 그곳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정말)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여행을 떠날 때 가져가서 읽고 싶은 만화책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게 만들고 떠나서도 함께 할 만화책은 많지 않다. 아니, 내 경우에는 이 만화책 하나이다. 이 만화책에 적힌 장소들을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란 생각을 해보았다. 책 곳곳에 담긴 이야기를 그 장소에서 읽고 적힌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면 어떤 여행보다 멋질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시간의 얽매이지 않는 좀 더 젊은 내 스무살에 만났더라면 더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생각했다. 이 책을 서른이 넘어 만났더라면 지금보다 더 안타까워 했을지도 모른다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이 책 5권 중 한권을 뽑아 떠나야겠다. 그렇게 일년에 한권씩 여행하다보면 언젠가는 상복이의 오토바이가 지나간 길을 나도 뒤쫓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남도여행을 위한 여행책을 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가 남쪽지방으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꼭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 되었다. 아니, 남쪽으로 여행을 가라고 부추길 것 같다.
#출판사의 세심한 배려로 탄생한 정말 여행책
내용도 좋았지만 나를 감동시킨 건 각권마다 뒷부분에 이번 책에서 상복이가 여행한 장소들을 실제로 찾아가 사진과 글로 적어놓은 것이다. 한편에 거의 40페이지에 달하니 합치면 200페이지가 되는 것이다. 가는 길과 그곳의 먹거리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담긴 사진은 소중한 여행자료가 될 것이며 책을 읽는데 도움을 준다. 이것이 작가가 아니라 출판사 측에서 한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놀라고 말았다. 독자에 대한 배려에 읽고 난 후 감동이 더 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