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혹시 그런 생각한 적 있나요? 불안한 이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워낙 회피하는 것으로 문제에서 도망치고 했던 나로서는 자주 그런 소원아닌 소원을 빌고는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자고나면 10대가 지나 20대가 꿈꾸길 기도했고 불안하기만 하고 막막하기만한 20대 중반에는 자고나면 모든 것이 안정될 30대가 되어있길 꿈꾸었다. 어리석은 바램인지 알면서도 그랬다. 10대의 내가, 20대인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시간이 훌쩍 지나가길 바랬다. 내 힘으로 걸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도망칠 생각만 했다. 이 책을 읽고 그런 나를 떠올렸다. 시간의 소중함. 어떠한 시간이든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해. 열일곱 살의 나를!

-1965년에 열일곱 살이란 나이에 맞게 활발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살아가는 아이가 있다. 이름은 이치노세 마리코. 고등학교 2학년으로 노래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어른은 어떻게 되는 걸까를 고민하며 친구와 까르르르 웃을줄도 아는 아이다. 비가 오는 날 잠깐 든 잠이 그녀의 생을 바꿔놓았다.

잠을 자고 난 후, 그녀를 반기는 건 4분의 1세기가 지난 25년 후이다. 그녀의 나이와 같은 딸이 있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배 나온 아저씨인 남편이 있다.

 

잠깐의 낮잠이 그녀를 25년 후로 데려다 놓았다. 그녀가 그대로 순간이동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시간이 그대로 달아난 것이다. 40대의 아줌마의 몸에 17세의 그녀가 있는 것이다. 신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믿지 못하던 17세의 딸도 아저씨같은 남편도 믿게 되지만 정작 이치노세 마리코에서 사쿠라기 마리코라고 불리는 그녀만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것이 사실일 될것만 같아 가슴에 눈물 덩어리를 꾹꾹 눌러담는 그녀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녀의 17살, 부모님, 그녀의 잃어버린 25년이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 더군다나 추억도 기억도 없는 25년이라니 그건 어떤 느낌일까를 짐작해보지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분명, 나는 바랬었다. 힘든 시간을 뛰어넘고 싶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다 알아서 나를 그 다음 시간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마리코를 보며 내가 했던 그 바램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를 보는 내내 현재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결말이 기대되서 책을 덮고  나서야 그녀의 눈물이, 아픔이 느껴진다. 그녀는 정말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현실에 적응해야했으며 밤이면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떠올리며 홀로 속으로 울어야했을 것이다. 좋았던 구절들을 적으며 작가의 심리묘사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느끼며 이제야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쓰다듬는다. 그녀는 겨우 17세였던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 17세로 어른으로 살아야했던 것이다.

 

#씩씩하고 따뜻한 미나코, 당신을 응원해요.

-17세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자존심'이다. 자만한 것이 아닌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자존심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는 <단 한 번뿐인 내 인생. 나중에 가서 '이렇게 할걸, 그렇게 하지 말았을걸' 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었다. 17살의 나는 도저히 생각못했을 삶에 대한 미나코의 태도는 참 단단하고 올곧게 보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갑자기 42살이 되어버린 삶에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따뜻한 배려였을까. 그녀의 힘든 현실에는 그녀가 42살이 되기 전에 나이와 같은 친구같은 똑똑한 딸이 있었고 차분하고 그녀를 도와주려는 남편이 있었다.

 

42살인 그녀의 몸 안에 있는 17살의 미나코는 열심히 살아간다. 처음에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시간에 대한 원망으로 울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 17살의 당찬 아이였던 것이다.42세의 그녀도 그녀라는 것을 받아들이까지 힘이 들었지만 그녀의 지금 시간역시 자신이 쌓아온, 걸어온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삶을 망치고 싶지 않은 착한 그녀였다.

 

그녀가 삶에 적응하는 것을 보며 나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내내 미안했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었던 내 17살을 나는 너무나 설렁설렁 보낸 것만 같아서, 누군가가 간절히 원한 시간을 너무 쉽게 써버린 것 같아서 미안했다. 지금의 내 시간도 그녀는 갖지 못할 시간이란 사실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를 뚫어지게 보게한다. 하지만 그녀, 더이상 시간을 탓하는 건 하지 않는다. 더 열심히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가지다. 열심히 사는 것, 그리고 그녀를 응원하는 것.

 

#신기하고 놀라운 책.

-신기하고 독특한 소재였다. 시간여행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할 것 같다. 소재의 독특함과 500페이지가 넘도록 전혀 지루함이 없는 오히려 두근거리게 하는 구성, 여성작가가 아니라는 것에 의심을 하게 만드는 주인공의 심리묘사까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하나의 작은 캡슐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만을 위해 상영되는 영화관에서 책이 영화처럼 펼쳐져갔다. 그만큼 묘사는 글자가 아니라 영상으로 다가왔다. 글자들이 춤을 추며 등장인물들을 만들고 배경을 만들고 나는 그들의 성대묘사를 하는 성우가 되었다.

내가 이 작가를 잘못 본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의 기쁨과 반하게 된 작가를 만났다는 것의 행복은 책이 내게 준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소중한 시간들 꼭꼭 씹어먹으며 살기!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살고 싶게끔, 열심히 살고 싶게끔 만드는 소설을 만나면 그렇게 가슴이 뛴다. 어떤이는 소설에서 건질 것은 없다고 했지만 나는 소설이 좋다. 소설 속 주인공이 허구라고 해도 내가 그들을 읽는 순간 그들은 살아 숨쉬며 내게 이야기한다. 소설도 사람이 쓴거라는 사실은 소설 역시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주고픈 희망이 담겨있다는 뜻이지 않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소설을 읽는 이유는 희망을 갖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그 이유 중에 위로 받는 것까지 넣고 싶어진다.

 

미나코를 보며 시간을 꼭꼭 씹어먹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선물이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뒤를 돌아보며 그때 잘할걸, 혹은 현재를 살며 멋진 미래만을 상상하며 살고는 한다. 그렇기에 현재를 한탄만하거나 과거를 품지도 미래를 기대하지도 못하게 된다. 현재를 제대로 사는 것, 그것부터 먼저 해봐야겠다. 과거를 품고 현재를 꼭꼭 씹으며 살고 싶어진다. 미나코처럼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해서 말이다.

 

당신의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따뜻하고 투명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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