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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 책 ㅣ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지음, 조우호 옮김 / 들녘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교양』의 저자인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크리스티아네 취른트의 『책』 서문에서 다소 냉소적인 어투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래된 법률 원칙 중 이런 말이 있는데, 의도하지 않은 행동으로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예컨대 실수로 자신의 아이를 친 어머니의 경우처럼―가중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누구든 스스로 문화를 떠났다고 해서 비난받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유산을 거절함으로써 숭고한 사상과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 대화할 기회를 놓친 것 뿐.
그러나 문화적 기억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다. 전체에 대한 조망보다는 소통 자체가 중시되는―어디에도 없으나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인터넷을 생각해 보라―오늘날 그것을 온전히 향유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박제가 되어가고 있는 '교양'을 되살려내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그리고 일회적인, 또 일방적인 이미지의 습득이 아닌 반성적인 사고를 제공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책의 영역이다.
크리스티아네 취른트의 『책』은 바로 그런 맥락 안에 놓인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를 제공하는 책. [신곡]과 [데카메론],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해리 포터]에 이르는 서구문화의 정전 100권에 따분한 현학을 배제한 채 간결하고 흥미롭게 접근하는 탓에 가볍지만은 않은 내용임에도 술술 읽힌다. 요컨대 가볍다, 무겁다의 이분법보다는 명료하다는 표현이 이 책에 가장 들어맞는 수사일 것.
먼저 눈에 띄는 건 카테고리 구분이다. 세계, 사랑, 정치, 성, 경제, 여성, 문명, 정신, 셰익스피어, 현대, 통속 소설, 컬트문학, 유토피아: 사이버 세계, 학교 고전, 그리고 아동 도서까지 15부문으로 나뉘어진 섹션들은 강요하지 않아 미더운 느낌이다. 통속소설 카테고리 안에는 [프랑켄슈타인]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아동도서 카테고리 안에는 [해리 포터]와 루소의 [에밀-교육에 관하여]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 식.
한편 '사랑'이란 섹션 안에서 취른트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화 [타이타닉]에 연결시킨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금지된 사랑은 결국 자기 포기를 의미하며, 둘 다 정체성을 포기할 때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는 이미 자살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과포기인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은 사랑할 때 정반대를 기대한다. 사랑이 우리들의 개성을 풍성히 해줄 것으로 말이다." 이어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아남아 가난하고 평범한 부부가 되었을 상황을 가정하며, 저자는 사랑의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 요컨대 셰익스피어는 그저 '위대하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고전은 생동감 있는 현실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는 올해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원작으로 유명세를 탄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역시 그냥 연애소설은 아니다. 비극적인 연애담인 동시에 복잡한 위선과 조작, 전략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게임이었던 프랑스 앙시앵 레짐 하의 사랑이 끝났음을 고하는 신호라는 것. 최고의 전략가인 발몽이 결국 자신의 유혹기술에 굴복해 생명을 잃는 것처럼, 그가 속한 프랑스 사회 전체는 얼마 후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는다.
『책』은 고전의 새로울 것 없는 정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저 불후의 명작이 아니라 시대성과 사회성을 통해 독자에게 저자의 사고를 역동적으로 전달해 온 작품들이라는 것. 대중적인 접근을 고려한 채 '문화적인 책읽기'를 시도하는 이 책은 그래서 반갑다. 책을 읽으며 독자는 J. S. 밀을, 장 자크 루소를,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교과서의 죽은 지식으로 가물대던 아도르노와 프로이트, 세익스피어가 살아 꿈틀거리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개된 정전들이 서구의 그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나, 어디까지나 타인인 우리로서는 좋은 길잡이를 얻은 셈이다.
"1930년대에는 독일 문명이라는 엘리베이터의 줄이 끊어진다. 그것은 나락으로 추락한다. 이상하게도 많은 수의 동승자들은 엘리베이터의 잔해가 땅을 뚫고 수십 미터 아래에 파묻혔을 때 비로소 추락한 사실을 알게 된다....(중략)... 그 파국은 결코 문명이 물질로 인해 과로했던 까닭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명이 물질에 대해 태만했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문명이 인간 사회의 추락을 결코 막지 못한다는 점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야만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다름 아닌 문명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상은 본문 중 '문명'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챕터의 서문이 설파하고 있는 내용. 책과 교양의 문제도 이와 같다. 서가의 골동품이 되어버린 책을 소중한 문화적 기억으로 되살리기 위한 수단도 오직 책일 따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