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내가 뭘 하고 놀겠는가. 여전히 너디한 삘루다가... 최근 1, 2주간 뭐 봤는지 간략 정리.

 

1. <살인자들의 섬> 데니스 루헤인

Holy crap! 입 한 번 뻥긋해도 다 스포일러라 말 못하는 게 유감이다. 존엄한 옥체에 떡 하니 붙어있는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 당나귀귀 나부랭이와 조우하고 만 신라 경문왕의 이발산지 뭐시긴지의 마음을 이해하겠다. 사람 죽이는군 정말. 별 네 개 반.

우습게도-아니 우습다고까지 할 일도 아닌데-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책들 중 많은 것이 장르소설이었다. 내게는. 얘기는 이렇게 만드는 거다.

 

2.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이미 썼지만.. 언니 사랑한다니깐요. 내가 사랑해! (그리고 적립금 감사합니다 알라딘. 가난한 백수입니다)

 

3. <알리바이> 에드 맥베인

대체가 일본판 중역이라는 사실을 전혀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니 용감하다고 해야할지.... 중역의 폐해를 알고 싶으면 이걸 읽어라. 이끼 핀 툇마루 밑처럼 칙칙한 표지부터 불길하더라니... <경찰혐오자>를 비롯해 87분서 시리즈의 팬임에도 도저히 읽을 수 없어서 포기. 지금도 새삼 표지의 카피를 보면서 좌절중이다. "세계명작추리소설공포여행"은 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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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몇 줄 소개:

그리고 나서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로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그만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자기가 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버리겠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경우냐? (-_-;;) 그렇지 않아 앤디. 나는 이런 짓을 그만두자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만두다니 뭘? 널 사랑하는 것 말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니? 너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 살지 말아버려! 젠장할) 앤디는 죽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너도 똑같아!) 그는 옷을 벗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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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랄... 무슨 암호 같지 않은가.  이미 중역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데 그런 구절이 주택가 음식물 쓰레기 수거지에 널린 여름날의 수박껍질처럼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Fuck you very much.

 

4. <법의관> 패트리샤 콘웰

길게 말할 거리는 없는 책이지만 재밌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때도 잘 읽히는데, 동성의 작가가 쓴 소설을 읽을 때의 일종의 이점이랄까 그런 것을 느끼게 한다. 공감대라고 세 글자로 쓰면 촌스러워지는 것.

 

5. <십자군 이야기 2 > 김태권

동생이 샀기에 몰래(?) 집어다 읽었다. 우직하고 재미있는 한편 1권보다 말장난은 좀 늘었다. 엄청난 레퍼런스들이 권말과 중간중간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중 대학 때 수업 들었던 강철구 교수도 있었다. <문명의 충돌> 레포트 냈던 생각도 나고. 그 수업 C였지 (먼 눈) 여튼 이 책의 한 가지 흠은 너무 늦게 나온다는 것. 동생한테 "1년도 훨씬 더 걸리는 것 같다"고 불평했더니 자기 고 2때 1권 나왔으니까 햇수로 3년이란다. 음.

 

6. 비디오: <밀리언스>

뉴욕 타임즈의 한 리뷰에서는 대니 보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좋은 훅과 기억에 남고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비트의 힘을 알고 있다. 마치 좋은 뮤지션처럼." 멋진 평 아닌가. 이런 리뷰어들을 좋아한다. 이것 저것 차치하고라도 정말로 더 잘 이해하게 만들어주니까.

나로서도 대니 보일을 좋아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이클 윈터바텀의 <24시간 파티 피플>의 각본가였던 머시기씨-이름 까먹었다. 생면부지의 서양남자 이름들을 줄줄이 머릿속에 담고 있기에 난 너무 늙었다고. kiddo-와 손잡고 만들어 낸 <밀리언스>는 착하고 예쁜 영화지만, 그 안에는 확실히 대니 보일의 경박하리만큼 뚜렷한 지문들이 눌러져있다. 성자를 보는 데미안의 순수하다 못해 청승맞은 환상들을 보라. 죄책감에서 출발했음이 너무도 명백한, 마크 렌튼의 '목돌아가는 아기' 환각은? <쉘로우 그레이브>의 돈가방과 <밀리언즈>의 돈가방이 가져오는 전혀 다른 결과를 서로 비교해보는 건 어떤가.

공포, 환각, 모 아니면 도, 낙천주의가 만들어내는 어딘가 서글픈 웃음-나는 지금 <트레인스포팅>의 유명한 마지막 나레이션을 떠올리며 이 말을 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난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난 달라질 거다. 삶을 선택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를 선택하고, 나인 투 파이브를 선택하고, 퍽킹 빅 텔레비전을 선택하고..." choose life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울림이 얼마나 쌉쌀한가. 그 흥겨운 비트에도 불구하고 이건 언제라도 울증으로 돌면할 수 있는 일종의 조증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뭐 그런 것들이 대니 보일의 세계. 나는 심오하지 않아서 그 사람 영화가 참 좋다.

 

7. 비디오: <미스터 히치>

재밌다! 에바 멘데스와 윌 스미스의 건강한 섹시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이거.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좋겠다 -_-* 근데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으로는 윌 스미스는 상당히 철자나 어법 등에 집착하는 사람이란다. MIT 재학 때의 별명이 '교정왕'이었다나. 아유 귀여워라.

 

8. 만화: <그린빌에서 만나요 2> 유시진

좋다. 좋음에도, 유시진의 만화 중 가장 덜 좋아하는 것이 되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다. 이비, 이언 남매에 정이 안 가는 게 제일 문제다. 주인공도. 하지만 유시진과 강경옥은 언제나 나의 투톱!

 

9. 만화: <맛의 달인> 89, 90, 91

1) 맛의 달인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처음 보는 여자가 등장하면 둘은 반드시 결혼한다.

2) 젊은 나이에 출세한 남자에게는 소박한 가정요리를 권해라. 아버지와 딸이 사이가 나쁘면 아버지에게 요리를 시켜라. 장래를 결정하기 힘들면 요식업계로 가도록. 왜냐면 바른 먹거리야말로 밝은 미래의 첩경이니까.

3) 자고 일어났더니 맛의 달인의 세계로 들어가버렸다? 그 때를 대비해 간단한 회화를 익혀두자.

동서신문사를 방문할 경우: 문화부 기자 지로는 게으름뱅이 월급도둑이라고 말하라.

까다로운 모임을 끝내고 싶을 경우: 후쿠이 차장에게 술병을 쥐어주라. 틀림없이 타이를 머리에 매고 바지를 벗어 확실히 자리를 파토내줄 것이다.

카라스미 등등 비싼 재로료 만든 요리가 나올 경우: 대사 두 개만 외워두길. "이거 사치스럽군" "어른의 맛이에요"

나머지는 생각나면 더.

 

10. <식객 1> 허영만

재미없었다. 허영만 선생님은 멋있는 분인데다 전에 뵈었을 때 내게 예쁘다고 말해주셨지만. (슬쩍 자랑)  

 

11.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

Holy crap! (2;;)  시청자의 기대를 계속 배반하는 주인공들과 노니는 즐거운 양가감정. 나레이터가 자살한 메리라는 점에서부터 그 묘하게 약먹은 것 같은 몽롱한 분위기 하며, 죄의식을 느끼되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대단히 색다른 경험. 늦게야 보기 시작했지만 다른 이들의 열광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위기의 주부들>에 대해서는 이번 주 [한겨레21]의 평이 읽을만 했다. 특히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보다 성경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보수주의자 브리에 대한 분석-비판과 옹호가 동시에 존재하는- 등은 아주 좋았다.

 

12. <공중곡예사> 폴 오스터

"만일 내가 그것을 몰랐다면 나는 바보 멍청이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결국 내가 그들에게 길이 들었다는 얘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마침내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것처럼." 폴 오스터의 소설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다. 이 '미스터 버티고'가 다른 것들보다 더 이상한지 아니면 덜 이상한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무척 독특한 것만은 확실하며, 이 사람에 한해서는 내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알겠어요 그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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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0-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 쵝오! -_-)b

nightlife 2005-10-0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 입니다 >ㅁ< 그런데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 몽롱~ 해요 하하하.
 

 

순식간에 선선해졌다. 하반기는 너무 빨라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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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비록 <화재감시원>이 실린 고려원의 시간여행 SF 걸작선이 애저녁에 절판되긴 했지만(그 책 구성도 좋고 참 재미있다. 르 귄의 파리의 4월을 비롯해 재미있는 단편이 가득. 하지만 다른 8편을 다 합친다 해도 내게는 권말에 실린 <화재감시원> 한 편의 무게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스토리상의 연결관계를 따지자면 <둠즈데이북>은 <화재감시원>쪽과 직접적으로 닿아있지만, 코니 윌리스의 옥스포드 시간여행 시리즈에는 이미 많은 독자들이 관심과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그 정도의 매력이 있었고, 아울러 그만한 인기도 있었다.


발표시기상으로 볼 때 데뷔작인 <화재감시원>이 가장 먼저, <둠즈데이북>이 그 다음,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마지막이다. <화재...>는 읽고 싶어하는 사람에 비해 정작 구해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은 모양이므로 이 작품에 대한 기대치는 상당부분 <개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소설의 색채가 전혀 다름을 알았을 때의 심경은 말 그대로 기대 반 실망 반. 읽고 난 후의 심경? 전적으로 전자의 손을 들어주마. <둠즈데이 북>은 최고였다.


우선 설정상으로는 이미 <개는...>의 독자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 21세기 중반, 옥스퍼드의 역사연구가들은 '네트'를 통해 시간여행을 한다. 그런데 이 시간여행은 엄격한 규칙에 의한 것으로,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모순을 일으킬 수 있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과거에 영향을 미쳐 현재를 변하게 할 수 있는(이를 미리 숙지하기 위해 변수계산을 비롯한 치밀한 준비과정이 필요해지는데) 어떤 물건이나 생명체도 가져오거나 가져갈 수 없으며, 심지어 시공간의 편차를 일으켜 시간여행자를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이는 히틀러를 죽이거나, 의자왕을 거세하거나; 기타 등등 역사적으로 크나큰 변수가 될 수 있는 사건을 피해가기 위해서다.


여기부터 스포일러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피해가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연약한 외모와는 달리 소처럼 굳은 심지-따라서 지도교수 던워디의 시점에 주로 의지하게 되는 초반부에서는 그녀를 좋아하기 힘들다. 어쨌든 던워디는 이 무모한 여행을 말리는 입장이었으니까-의 소유자 키브린은 20세기 중반도 아니고 빅토리아 시대도 아닌, 하필이면 중세로 여행하겠다고 고집한다. 일은 그럭저럭 풀려나가는 듯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키브린이 떨어진 곳은 예정보다 20년 이상이나 뒤인 1548년이었다. 이런 전례없는 엄청난 실수가 일어난 것은 21세기 중반의 미래영국을 강타한 정체불명의 인플루엔자 때문.


여기서부터 두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대조를 이루며 나란히 나아간다. 질병으로 고립된 옥스포드 일대와 병을 피해온 영주일가가 살고 있는 시골의 외딴 장원. 기도와 마녀사냥-꼭 화형식만이 아니라 엄청난 불행에 대해 누군가-주로 핍박받는 존재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의 총칭으로서-외에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무식한 과거의 사람들과 질병을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려는 역시 무식하고 이기적인 미래의 사람들. 하지만 역시 존재하는 친절한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 용기있고 총명한 과거와 미래의 어린이들, 대가없이 희생하는 과거와 미래의 성자성녀들. 곳곳에 복선을 심어놓으며 두 세계를 대비하여 묘사해나가는 코니 윌리스의 솜씨는 매우 뛰어나다. 예컨대 크리스마스를 맞아 울려대는 디지털 종소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위기상태에 놓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패닉에 빠지게 하는데, 이는 중세의 종소리와 완벽한 대구를 이룬다. 자그마한 마을의 적막감을 더욱 강조하는 만종과 조종 뿐 아니라 누군가 죽었을 때 남자의 경우에는 아홉 번, 여자는 세 번, 그리고 아이는 한 번을 치게 되는 사망을 알리는 종소리 말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은 아니지만 <둠즈데이북>의 주제를 말해본다면 아마도 인간애이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애란 병세가 덜한 병자가 더 심한 병자를 돌보고, 시체가 널린 상황에서도 죽음에 대해 적절한 예를 갖출 수 있게하는 마지막 보루를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특히 작가가 경의를 표하고 있는 대상은 대가없이 희생하는 이들이다. 이 점은 <둠즈데이북>이 전쟁의 포화 속에 피어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를 다룬 <화재감시원>의 속편이자 전편임을 확실히 하는 부분. 700년 후의 미래에서 온 키브린이 시골신부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진짜 성자의 모습, 그리고 몸을 아끼지 않고 환자를 돌보다 결국 병으로 죽음을 맞는 700년후 미래의 의사의 모습이 대비되며 감동을 던져준다.


한편 코니 윌리스표 시간여행의 재미있는 부분은 과거에 떨어진 미래인들이 무력하다는 점에 있다. 이는 전쟁과 전염병 같은 거대한 적에서 사소한 풍습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에서 드러나는데, 예컨대 키브린은 페스트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사용할 수 없다. 고름을 닦아내고, 종양을 잘라내며,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약초를 달여마시게 하고 종국에는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친구들을 묻을 구덩이를 팔 뿐이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시차증후군에 시달리며 '주교의 새그루터기'를 찾아헤매는 역사연구가 네드의 얼빠진 모험과 빅토리아 시대의 신경증적 소극, 방약무인한 아씨와 충직한 집사의("언제나 집사가 범인!") 앗쌀한 연애담-적어도 난 진짜 설Ž었고 많은 사람이 나와 같았을 것이다-이었다. <둠즈데이북>은 800쪽에 달하는 고통스러운 묵시록이다. 물론 <개는...>도 700쪽을 훌쩍 넘긴 하지만, 두 소설을 읽는 것은 상당히 다른 색채의 경험이다. 이미 언급했듯 시간여행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무력하며, 코니 윌리스식 웃음은 많은 경우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개는...>의 베리티와 네드는 꼼짝없이 빅토리아시대의 비과학-강신술을 비롯해-과 장황함에 적응해야만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 폭소를 터뜨리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기도 뿐인' 세계, 백신도 위생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도 없는 중세를 그려낸 <둠즈데이북>에 와서 시간여행자들의 무력함은 진정한 비극이 된다. 누가 코니 윌리스를 수다쟁이라고 했던가. 전, 중반부에서 웃음을 터뜨릴만한 부부닝 적지 않았음에도 키브린을 제외한 중세의 등장인물 모두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문장들은 엄숙하며 냉혹할 정도로 고요하다.

 
과학소설의 애독자들은 <둠즈데이북>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플루엔자와 페스트의 동시(?)발생은 아귀가 모호하고, 199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니만큼 무선통신에 대한 묘사도 없다. 주인공들은 대학학장과, 친척과, 네트를 통한 강하를 돕는 기술자와 연락이 되지 않아 내내 갈팡질팡한다. 21세기 중반인데도! 그러나 소설의 세계는 나름의 균형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고, 적어도 나는 '몇 가지 사물'의 부재를 욕할 마음이 전혀 없다.
 

[덧붙임]


1) 지극한 인간애와 상호존경에 토대하고 있는 키브린과 로슈 신부의 절절한 감정은 아주 잠깐 언급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눈물을 쏙 빼기에 충분하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토시와 베인 때도 그랬지만, 이 코니 윌리스란 아줌마 로맨스에 대해 뭘 알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2) 요시나가 후미의 걸작만화 <사랑해야 하는 딸들>의 영어제목은 'All My Darling Daughters'다. <마니아를 위한 SF 걸작선>에 수록된 코니 윌리스의 단편과 제목이 같다! 비록 요시나가 후미가 코니 윌리스에 대해 언급한 것을 (적어도 나는) 보지 못했지만, 이 단편으로부터 영향받은 작명이라는 데 왠지 돈을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은 두 사람의 작품세계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뚜렷한 공통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언급하자면 유머 속에 묻어나는 초연함과 현명함, 살짝 현학적인 분위기, 인간애 같은 것들. 어떤 작가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독자를 '그 이들, 분명 같은 별에서 온 사람들이야'라고 믿어버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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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아 2005-10-0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저도 일개 SF 팬으로서, 저 '인플루엔자와 페스트의 동시발생' 부분에서 상당한 반감을 느꼈지만, 작품의 흡인력이 1급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요시나가 후미와 코니 윌리스, 두 작가 모두의 기저에 흐르는 잔잔한 여성주의적 시선도 저도 느꼈고요.

nightlife 2005-10-22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해주시니 더욱 기쁩니다. 과분한 말씀 감사해요 헤헷.
 
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을 가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꿈은 기를 쓰고 꾸며낸 어떤 영화나 만화보다 완벽한 개뻥이기 때문이다. 엑스포 마스코트 꿈돌이가 그렇게도 막연하고 추상적인 외양을 가진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요구의 최종적인 목적은 대상과 결합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타인의 태도를 확증하는 것"이라고 지젝선생도 쓰셨던 바, 꿈은 어떤 것도 실체화되지 않은 개뻥이다. 숙변처럼 고스란히 몸 속에 쌓여 유독한 가스를 만들어낸다. 세상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주창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먹기에 따라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는 제 1요소는 바로 꿈이다.


<어제>라는 소설을 걸작이라고 평하긴 뭣하지만, 이건 숨쉬기 힘든 사람들의 호흡을 닮아있는 소설이다. 정말이지 그렇다. 토비아스는 하루 열 시간 씩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며-이 부분은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듯 한데- 어린날의 친구이자 실은 이복동생인 린을 꿈꾼다. 린은 토비아스가 꿈꾸는 다른 삶 그 자체를 표상하는 존재다. 린과의 재회-비록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지만-는 토비아스에게 만개한 절정의 순간이자, 꼭대기에 올랐기에 앞으로는 굴러떨어질 수 밖에 없는 파멸의 시작점이다. 먼 곳에서 단지 그려만 보던 린은 완벽한 이상의 여인이었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토비아스의 마음은 응집되고 또 응집되어 단 한 문장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이제 매일밤 그녀가 남편 곁에서 자는 꼴을 보는데도 신물이 난다." 픽션 속에서 만난 그 어떤 것보다 무섭고 절절한 사랑의 토로.


사랑을 잃고 꿈을 버린 주인공의 에필로그는 건조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바수어져 사라질 것 같은 일곱개의 문장이다. 글을 쓰지 않는 토비아스는 공장의 다른 노동자들과 어떤 변별점도 가지지 못하는 셈이다. 아니 변별 따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만 존재하던 마지막 끈 하나, 다 썩은 시체를 매장했을 뿐이다. "카롤린, 넌 날 그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근본은 같아." 영원히 입밖에 내어보지 못한 비밀만이 동반자가 되어 함께 무덤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딱 짝사랑의 풍요로움만큼 행복한 하루하루가 간다.


..........


카롤린이 떠나고 이 년이 지난 뒤, 내 딸 린이 태어났다. 일 년 뒤, 내 아들 토비아스도 태어났다.
우리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겼다가 저녁이면 데려온다.
내 아내 욜란드는 아주 모범적인 엄마다. 나는 여전히 시계공장에서 일한다.
첫번째 마을에서는 버스를 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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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하도 오래 문맹에 가까운 상태로 지내다 읽으려니 읽을 책은 첩첩 많고, 시간은 정말이지 없다. 만성피로로 빠질 것 같은 눈에 안돌아가는 머리. 이런 걸 만시지탄이라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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