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일본에서 야생 곰 때문에 발생한 인명 피해가 어마어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살짝 의아했었다. 그곳에는 예전부터 곰이 많았던 만큼 곰을 잡는 전문 사냥꾼도 많았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련 뉴스를 검색해 보니, 바로 그런 곰 사냥꾼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야말로 지금처럼 관련 사망 및 부상 피해가 증가한 원인 중 하나라는 모양이다.


단적으로 작년 한 해에만 해도 일본에서 곰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자가 238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13명이었으며, 올해 7월 말까지의 통계만 해도 피해자가 53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6명이라 한다. 이쯤 되자 일본 정부에서도 곰 포획 예산을 260억 엔쯤 투입했다고 전하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을 찾은 외국인에게 걷은 출국세로 상당 부분을 충당한다 해서 논란이다.


그나저나 일본의 전문적 곰 사냥꾼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생각난 책이 하나 있었으니, 무려 20세기 후반에 그 나라를 주름잡았던 한국계 곰 사냥꾼의 자서전이다. 일본에서는 출판사에서 정식 간행된 책인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특이하게도 <곰사냥 일대기>(후지와라 쵸타로 지음, 김영련 옮김, 1996)라는 300부 한정 비매품 책자로서 간행되었다.


저자 후지와라 쵸타로(藤原長太郎)는 본명이 나성현(羅成賢)으로 1926년에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1940년에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와카야마현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혼자 일본에 남았다. 이후 한국의 가족과는 소식이 끊겼다가, 조카인 대안건설 대표 나무(羅武)가 삼촌을 수소문해 자서전을 번역 간행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평소에도 사냥을 취미로 삼았었는데, 1957년에 거주지 인근에 곰이 출몰해 농민의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토벌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후 1980년까지 총214마리의 곰을 잡았다고 한다. 특히 1964년에 NHK의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큰 화제를 불러 모았으며, 급기야 시청자 중 한 명의 적극적인 구애로 늦게나마 결혼까지 했다.


문득 저자의 근황이 궁금해 구글링해 보았는데, 일본 쪽에서도 저 책과 관련된 게시물은 일부 남아 있지만, 이후의 자세한 소식은 찾을 수 없었다. 생존해 있어도 이미 100세이니 아마 지금쯤은 이미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조카가 운영했다는 대안건설이란 업체도 30년 뒤인 지금에 와서는 흔적조차 찾기 힘드니 이래저래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곰사냥 일대기>에서 저자는 사냥에 뛰어든 계기, 사냥에 쓰는 총기와 장비, 곰 사냥에서의 주의점,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화, 관련 정책의 문제점 등을 서술한다. 기존에 발표한 짧은 글을 엮기라도 했는지, 기대에 비해 체계적이거나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아니어서 아쉬운 면도 있지만, 곰 사냥이라는 보기 드문 주제에 관한 자료라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겠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냥꾼을 '마타기'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심마니처럼 독특한 풍습을 유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곰사냥 일대기>의 저자가 받드는 철칙 중에도 '좋은 꿈을 꾼 날에는 사냥에 나가지 않는다'와 '여자가 앞에 지나가면 사냥에 나가지 않는다'는 미신적인 내용이 있는데,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까닭에 최대한 신중을 기하려다 보니 나온 습관이 아닐까.


마타기를 다룬 소설로는 2004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어느 포수 이야기>가 있다. 일본 도호쿠 지방의 청년이 사냥꾼으로 입문해서 파란만장한 경험을 거친 끝에, 오랜 숙적인 거대한 곰에 맞서 일대일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를 적어놓고 보니 마치 <모비 딕>과도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연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의 나약함을 더 부각시킨 느낌이다.


일본에서는 제법 인기를 끌었는지 훗날 만화로도 각색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원제 그대로인 <해후의 숲(邂逅の森)>으로 번역되었는데, 다소 거칠고 잔인한 내용이 포함된 소설에 비해서는 상당히 순화된 편이라고 해야 맞겠다. 만화책 각 권 말미에 원작자의 첨언이 한 페이지씩 붙어 있으니 소설을 읽고 마음에 들어 했던 독자라면 만화로도 한 번 읽어볼 만하겠다.


마타기 관련 소설과 논픽션이 일본의 곰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서양사 분야에도 관련서가 몇 가지 있다. <곰과 인간의 역사>는 부제인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애증관계"처럼 저 맹수와 인류의 복잡다단한 인연을 개괄하는 내용이다. <곰, 몰락한 왕의 역사>는 프랑스 역사가인 저자가 서양 중세사를 중심으로 저 맹수와 관련된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내용이다. 


곰 사냥 관련 국내 기록으로는 독립군 출신으로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 <우둥불>에도 몇 가지 일화가 언급되었다고 기억한다. 한 번은 곰과 마주친 상황에서 갑작스레 총이 고장나서, 마치 만화의 한 장면처럼 곰과 사람이 커다란 나무 둘레를 이리저리 뱅글뱅글 돌면서 쫓고 쫓기다가 간신히 총을 고쳐서 사살했다는 일화도 있었던가 그랬다.


곰이라고 하면 지금은 푸우부터 벨리곰까지 친근한 이미지가 대부분이지만, 실제로는 호랑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숲속 최강의 맹수이기 때문에 야생에서 맞닥트렸을 때에는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당장 빌 브라이슨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체험기인 <나를 부르는 숲>에도 곰의 위험성에 대해서 아예 한 장(章)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우리나라도 1980년대까지는 야생 반달곰이 포획되다가 이후 멸종되었다고 기억하는데, 2000년대부터는 생태계 복원이라는 미명으로 반달곰 복원 사업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도 수십 년이 지나고 보니 그 성과가 미미하고 안전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비판과 이의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자연 보호도 좋지만 일본의 사례를 감안하면 좀 더 주의가 필요하겠다.


어쩌면 이런 생태계 복원 시도는 과거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 지역에서 일어난 늑대 개체수 감소의 영향에서 착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장주가 가축 보호를 위해 늑대를 제거하자, 천적이 없어진 사슴 등 초식동물이 급증하면서 오히려 생태계의 균형을 깨트렸다. 결국 균형 유지를 위해서는 상위 포식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외지에서 늑대를 데려왔다던가.


하지만 이건 미국처럼 땅 넓은 나라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에서 늑대나 곰 같은 맹수를 복원한다면 부작용도 적지 않을 법하다. 지난번 '늑구' 한 마리 탈출한 사건에도 열흘이나 난리법석이 벌어진 것을 감안하면, 현실적인 위험 가능성을 고려하여 좀 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슬기 같은 곰 처녀를 조상으로 여기는 민족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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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서투른 나귀님인 탓에 뭘 또 잘못 눌렀더니 '알라딘 특별 기획: 다시 뽑아보는 3대 미스터리' 페이지가 나온다. 흔히 '세계 3대 미스터리'라고 일컬어지는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번 기회에 알라딘 나름대로 새로운 '3대 미스터리'를 선정했다는 거다.


기획 취지에 따르면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이 목록이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꾸준히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고 비판하면서, "알라딘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새로운 3대 추리소설을 선정해보고자" 했다고 한다. 결국 자기네는 기존 3대 미스터리에 비해 더 '근거 있는' 선정을 해 보았다는 뜻이려나.


하지만 그 결과물은 어쩐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 및 독자 선정단 112명 중 각각 22명, 20명, 19명의 추천으로 찬호께이의 <13.67>,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새로운 '3대 미스터리'로 선정했다는데, 이쯤 되면 애초의 거창한 의도와 달리 단순 인기 투표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은 알라딘이 공개한 선정단 112명 추천 도서 451종 목록에서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10명 이상 추천 작품은 10종인데 그중 7종이 일본 소설이고, 크리스티의 고전 2종을 제외한 8종 모두 21세기 작품이다. 5명 이상 추천 작품 34종으로 범위를 넓혀 보아도, 60퍼센트인 21종이 일본 소설이고, 그중 1990년 이후 작품은 19종이며, 21세기 작품은 12종이다.


이쯤 되면 '알라딘 선정 3대 미스터리'는 2026년 현재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책들에 대한 인기투표에 불과하다고 봐야 할 것만 같다. 차라리 '21세기 3대 미스터리'로 범위를 줄였다면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포와 도일의 시대까지 망라하는 미스터리 역사 전체에 대한 평가라면서도 최근작에 과도히 편중된 결과가 나왔으니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울러 작품과 선집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아서, 이 장르의 비조 E. A. 포는 "모르그 가의 살인"과 <포 단편선>으로 표가 갈렸고, 코넌 도일도 시리즈의 통칭인 "셜록 홈즈 시리즈"와 단편집 <셜록 홈즈의 모험>으로 표가 갈렸다. G. K. 체스터튼이 '추천 이유'에만 거론되고 선정되지 않은 것, 미스터리 장르의 패러디인 <장미의 이름>이 고평가된 것도 기묘하다.


알라딘의 애초 의도는 "베스트셀러나 최근 화제작 중심의 소개를 넘어, 지금의 미스터리 장르 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작품, 더 많은 독자가 읽었으면 하는 작품, 그리고 오래도록 회자될 만한 작품들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는데 결국 인기 투표에 불과했으니, 이쯤 되면 알라딘 측의 설문 조사 설계에 근본적이고 만성적인 문제가 있지 않나 의심하게 된다.


이런 문제점은 지난번 '21세기 최고의 책' 선정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선정된 책이 대부분 신간이다 보니, 그냥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우수작을 고른 수준이었다. 자격 자체가 의문인 책도 적지 않았으니, 선정단 중 일부가 자신의 저서와 역서를 선뜻 추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추천작 10권 중에 추천인의 저서와 역서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경우까지 있었다. 


제대로 된 설문 조사라면 이런 편향이나 장난질을 걸러낼 수 있는 장치를 갖추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했듯 연도 범위를 줄여 시대별 최고작을 선정해 경합시키든가, 아니면 전체 이용자나 구매자의 설문을 전문가가 검토해서 편향과 오류를 줄이는 과정을 거치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전문가에게만 의뢰해 더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하려 고민했어야 한다.


지난번 영화배우 김지미와 안성기가 타계했을 때에 부고 기사를 보면 하나같이 데뷔작과 최근작 몇 가지를 거론하는 데에서 그쳤는데, 각각 1960년대와 1980년대였던 두 사람의 전성기를 직접 목격한 사람 중에 현재 언론계에 남아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들 자기가 아는 내용만 가지고 쓰려다 보니, 그들의 활약상을 제대로 전달 못한 셈이다.


지금이야 일본 추리소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정작 10년 뒤나 20년 뒤까지 그 인기와 호평이 지속될지는 모를 일이다. 해방 이전 국내 작가의 추리소설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김내성의 <마인>도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고, 이번 설문 조사에서도 딱 한 명만 추천하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보자면 포, 도일, 크리스티는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여하간 단순 인기 투표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다면, 알라딘의 설문 조사는 향후로도 공신력을 얻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강의 소설이 '한국 3대 소설'과 '세계 3대 소설'을 싹쓸이하고, '한국 3대 SF 소설'과 '한국 3대 호러 소설'에서도 '한국의 미래를 보여주었다'나 '한국의 무시무시한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황당한 이유로 한 권쯤 선정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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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엔가 심훈의 육필 원고가 국내로 귀환한다는 뉴스가 연이어 나오기에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 살펴보았더니, 뭔가 약간의 과장인지 호들갑인지가 섞인 보도가 아닌가 싶었다. 뉴스 제목만 놓고 보면 마치 부당하게 국외 반출이라도 된 문화재가 환수되기라도 한 모양새이지만, 실제로는 해외 교포인 유족이 오랫동안 잘 보관하다가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심훈의 육필 원고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셋째 아들이 잘 간수해 왔다는데, 수년 전에 그도 사망하자 유족의 결정에 따라 국내 기관에 기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당 기관은 2027년 개관 예정이라는 국립한국문학관으로, 무려 7년에 걸쳐 유족을 설득한 끝에 <상록수> 육필 원고와 초판 단행본을 비롯해서 50여 종의 관련 자료를 기증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자기네가 직접 발굴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해외에 거주하는 적법한 상속자로부터 기증받은 물건을 가져오며 굳이 요란을 떤 것은 한국문학관 측의 과도한 언론플레이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심훈의 자료는 유족 덕분에 비교적 쉽게 확보했지만, 다른 작가의 자료는 어떻게 확보할지도 궁금하다. 가치 높은 자료는 이미 누가 가져갔을 테고, 초판본도 가격이 비싸니까.


결국 현대 문학의 중요한 초판본을 대부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윤길수 장서' 같은 수준 높은 개인 컬렉션을 통째로 인수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문제는 결국 가격일 것이다. 유명한 <진달내꼿> 초판본을 비롯해 최소 수억 원에서 최대 십수억 원대로 추정되는 그 책들을 인수할 만한 예산을 국가 기관인 한국문학관 측에서 선뜻 내놓을지는 의문이니.


그렇잖아도 그간 각지의 유사 문학관이며 기념관의 행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소문도 많았다고 알고 있다. 쉽게 말해 지자체에서 '건물 지어줄 테니 물건 내놓으라'는 식으로 해당 인물의 유품이나 자료를 반강제로 기증받는 방식이 성행한 것인데, 막상 옆구리 찔러 절 받듯 기증받고 나서는 제대로 관리도 안 해서 뒤늦게 유족과 갈등이 벌어진 경우도 있다 한다.


심지어 심훈의 경우에도 충남 당진에 '심훈기념관'이 이미 있는데, 정작 이번의 육필 원고 반환에서는 배제된 듯한 모양이니 의아한 일이다. 당진은 <상록수>의 집필 장소이자 심훈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자격이 충분하기에, 2014년 당진시가 유족과 협의하고 장서와 유품 414점을 기증받아 개관했으며, 현재도 '심훈상록문화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육필 원고 기증에서도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한국문학관보다는 심훈기념관이 더 우선이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거꾸로가 되었으니 그 와중에 또 어떤 우여곡절이 있는지 궁금하다. 당진시의 입장에서는 심훈의 유품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만한 것을 놓친 셈이니 두고두고 원망스럽지 않겠나. 물론 정확한 이유는 유족 측의 설명도 들어보아야 하겠지만.


고서업자 릭 게코스키의 에세이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외국에서는 유명 작가의 육필 원고나 소장 도서를 대학이나 도서관에서 매입하는 것이 일반화된 듯하다. 국내에서도 주요 관련 기관이 이런 자료를 '기증 압박'하는 대신에 제값을 주고 매입하는 풍토가 자리잡아야 할 텐데, <진달내꼿> 초판 선정 논란에서도 드러났듯이 아직까지는 영 인식이 부족한 듯하다.


현실은 오히려 반대라서, 심훈의 작품을 이용해 부당한 수익을 챙긴 국가 기관도 있다고 한다. 올 초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체부 산하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문저협)에서 심훈과 김영랑 등 저작권 보호 기간 만료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판권료를 받아냈다가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문저협은 한강의 판권료도 미지급한 전과가 있었으니 이쯤 되면 상습적이다.


시 "그날이 오면"와 소설 <상록수>에 드러난 것처럼 심훈은 민족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였으며,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두 형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파라고 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심지어 친일파로 평가된 큰형의 아들(즉 심훈의 조카)가 <상록수>의 모델로 간주되고 있으니 더욱 아이러니하다.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결국 심훈도 친일파 집안 출신이고 <상록수>도 친일파 아들이 모델이니 양쪽 모두 배척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진 않으려나. 마침 어느 신인 여배우가 집안 자랑을 하다 친일파 내력이 파묘되어 연일 입방아에 오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급기야 일각에서는 친일파 재산 환수 주장까지 나온다지만, 글쎄, 그게 과연 말처럼 간단한 문제일지...



[*] 비교적 일찍 타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훈의 저술은 개인 전집으로 여러 번 간행되었다고 알고 있다. 알라딘 중고샵에만 해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간행된 두 가지 전집이 등록되어 있고, 2000년에도 새로운 "심훈문학전집" 간행이 시도되었지만 1권만 간행되고 말았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2016-2019년에 "심훈 전집"이 전9권으로 간행되어 여전히 판매 중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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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들어온 바깥양반이 아침 일찍 극장 가서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왔다기에, 과연 어느 정도로 원작과 다르게 각색이 되었나 궁금해서 몇 가지 기억나는 대로 질문을 던져 (예를 들어 '아르고스를 연기한 배우는 누구인가?') 답변을 들어 보니, 현대적 해석이 상당 부분 가미되며 사실상 원작 훼손 수준의 변형이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오디세이아>는 완전한 비극만도 아니고, 오디세우스 역시 완벽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현대식 해석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려면 제신과 마법을 완전히 배제한 청동기 시대 야만인들의 생존 투쟁기로 묘사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과격한 수준까지 각색이 이루어졌다면 복식 고증이나 배우 섭외 등에서의 논란도 애초부터 안 생기지 않았을까.


이번 영화의 고증 논란은 보르헤스가 지적한 '투명인간'의 난점을 연상시킨다. 고대의 플라톤은 '기게스의 반지'를 설명하면서 그런 마법 반지가 있었다고 말하고 넘어가면 끝이지만, 현대의 웰스는 '투명인간'의 사실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구구절절 들어야 하니 힘들었단 거다. 평소 사실성을 중요시한 영화 감독이니 고증 논란도 자연히 따라붙은 것이 아닐까.


배우 섭외 관련 논란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엘리엇 페이지이다. 트랜스젠더인 탓에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왜곡 시비가 벌어질 것 같더니만 결국 원작에는 없었던 배역을 담당한 듯하다. 나귀님 생각에는 이 배우야말로 남녀 양성 모두로 살아보았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역할에 안성맞춤이었을 것 같은데, 어째서 그 역할을 안 맡겼는지 의아할 뿐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간교한 영웅이다. 거짓말과 시치미는 기본이고, 자만한 행동으로 위기도 자초하니, 마블 영화로 치면 시종 진지한 캡틴보다는 깐죽대는 아이언맨과 더 유사하다. 긴 여정에서 동료들을 모두 잃고 감금당했지만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목표를 위해서는 굴욕조차 받아들이니, 그를 무조건 지치고 힘든 인물로만 묘사한 것은 절반만 본 셈이다.


현실의 전쟁을 의식한 까닭인지, 이번 영화는 <오디세이아>를 너무 어둡게만 그리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감독의 이름값 때문인지 흥행과 평론 모두 호평 일색이지만, 좀 더 객관적인 평가는 더 기다려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호프> 논란에서도 유사하게 전개되듯이, 관객의 반응이 기껏해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일색이라면 걸작까진 아닐 수 있으니까.


나귀님이 이제껏 본 그리스 신화 영상화의 최고봉은 <이아손과 아르고호 원정대>(1963)이다. 고증 따위는 가뿐히 씹어버리고 순수한 재미로 승부하는 영화인데, 특히 레이 해리하우젠이 전설적인 스톱모션 특수 효과로 구현한 청동상과 해골의 모습은 지금 봐도 충분히 신기하다. 작품성으로 따질 수는 없어도 오락성으로 따지자면 가히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하다.


그나저나 <오디세이아> 이야기가 나왔으니, 엉뚱하게도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한 대목에서 그 작품이 언급된 것이 생각난다. 작년엔가 예능 프로 <케냐 간 세끼>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꺼낸 책인데, 왜냐하면 저자인 이사크 디네센(카렌 블릭센)이 한때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했고, 그 기억을 더듬은 회고록이 훗날 영화로도 유명해진 이 책이기 때문이다.


그중 한 대목에서는 저자가 책을 쓴다며 타자기를 두들기자, 옆에서 지켜보던 원주민 하인 소년이 나름대로 논리정연한 반론을 제기한다. 즉 책장에서 꺼낸 책 한 권을 보여주며 '책이란 이렇게 한데 묶인 것이지만, 주인님의 글은 낱장으로 떨어져 있어서 책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은 원고(낱장)와 제본서(책)의 차이를 오해한 것뿐이다.


이때 소년이 꺼낸 책이란 바로 <오디세이아>였는데, 저자가 내친 김에 그 내용을 설명하며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양을 이용해 탈출했다고 말하자, 소년은 그 양이 자기가 본 양과 비슷한 것인 듯하다고 단언한다. 허구 속의 대상을 자기 주변의 대상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특이한 사고방식은 백인과 원주민의 접촉을 다룬 책에서 흔히 등장하곤 했었다.


이번에 뒤적여 본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열린책들의 '미스터노' 페이퍼백 판본인데, 뒤표지를 보면 "국내 최초 번역"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하지만 그보다 20년쯤 전에 나온 <아웃 오브 아프리카>(위미숙 옮김, 포커스, 1991)라는 번역본도 있었다. 생각난 김에 그것도 꺼내 대조해 보니 전5장 중 단상 위주인 제4장(어느 이민자의 노트)를 제외하고 번역했다.


포커스 판본은 예를 들어 개 이름 "더스크"(dusk)를 "다스크"로 표기하는 등, 고유명사 표기가 어색한 것으로 미루어 일어 중역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거꾸로 포커스 판본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경우도 있었다. 예전에 저자의 하인이었던 원주민이 보낸 안부 편지에서 상대방을 "암사자"라고, 즉 "암사자 블릭센"과 "존귀하신 암사자님께"로 호칭한 대목이 그러했다.


열린책들 판본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넘어간 반면, 포커스 판본에서는 저 원주민의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까닭에 '남작부인'(Baroness)을 '암사자'(Lioness)라고 잘못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역주가 붙어 있다.(문득 국문학자 양주동의 일화에서 어느 제자가 보낸 안부 편지를 보니 "恩師(은사)"를 "鬼帥[귀신 장수]"라 잘못 적었더라던 대목이 떠오른다). 


그래도 과거에 포커스 판본이 반가웠던 까닭은 '영화 소설'이 아니어서였다. 저작권 개념이 없었던 2000년대 이전의 간행물 중에는 어떤 외국 영화가 개봉되면 그 원작이 아니라 영화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가 소설로 각색하고 영화 포스터를 표지에 붙인 조악한 출판물이 범람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영화 개봉 후에 그런 책들이 여러 종 나왔다고 기억한다.


아울러 포커스 판본의 또 한 가지 장점은 저자와 주요 인물의 사진이 흑백으로나마 몇 가지 수록되었다는 점인데, 이에 비해 열린책들 판본은 도판이 전무하다. '포커스'라는 출판사 발행인이 사진작가 김용범이고, 뒷날개에 그의 아프리카 사진집도 선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아웃 오브 아프리카> 원작 번역서도 아프리카에 대한 개인적 관심의 연장이었던 걸까.


앞서 언급한 원주민 소년은 케냐 총인구의 20퍼센트에 달하는 키쿠유족이었다. 외계 행성에 아프리카 같은 자연 환경을 만들어 전통 문화를 유지한다는 묘한 내용인 <키리냐가>의 주인공도 바로 키쿠유족이었다. 유명한 고고학자 루이스 리키의 아들인 리처드 리키도 어려서부터 키쿠유족과 생활해서 그 부족 특유의 성인식(!)까지 치렀다는 이야기가 문득 기억난다.



[*] 루이스 리키에 관한 이야기는 제인 구달에 이어 비루테 갈디카스까지 타계함으로써 '어쩐지 모두 세상을 떠난 세 딸들'에 대한 글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자. 물론 '나스타샤 킨스키 4종 세트'나 '마리루이제 플라이써의 길고 화려한 극작가 생활'처럼 머릿속에는 다 들어 있지만 막상 옮겨 적으려니 귀찮아서 어영부영하다 결국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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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무려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 하와이대저택의 세네카 편역서를 살펴보다 보니, 언제부턴가 '성공론' 저자들이 이 스토아 철학자의 저서를 앞다투어 이용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보통 '인생론'으로 지칭되는 그의 대화편이 섭리, 분노, 행복, 평상심, 시간,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룬다는 점 때문에 자기계발 분야에도 적격이라 여기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세네카의 인기 요인은 그보다 먼저 자기계발 분야에서 인기를 끌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경우와도 유사하지 않나 짐작된다. 각종 금언을 창작하고 시간 계획을 세우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성공한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각별히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사실 프랭클린은 원래부터 천재라서 성공한 것이지 근면만으로 성공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프랭클린을 좋아해 저서 제목도 <가난한 찰리의 연감>인 투자자 찰리 멍거도 마찬가지인데, 동업자 워런 버핏처럼 원래부터 똑똑한 사람이었으니 성공했을 뿐이다. 그러니 같은 국정교과서로 공부해도 1등과 꼴등이 생기듯, 일반인이 이들의 조언을 마음에 새긴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깐부치킨 좌석에 앉는다고 누구나 젠슨 황이 될 수는 없듯이 말이다.


만약 오늘날의 독자가 세네카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려 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비참한 최후에서 얻는 반면교사뿐이 아닐까. 그는 뛰어난 철학자였고 정치인이었고, 여러 '대화편'에 드러난 것처럼 내면에서는 갖가지 사색과 통찰이 넘쳐났지만, 부와 권력에 과도하게 집착한 까닭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야말로 과유불급의 사례이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차라리 군주를 잘 섬겨 대업을 이루고도 '토사구팽'이란 명언을 남기고 잠적해 천수를 누린 도주공(범려)이 세네카보다 한 수 위인 듯하지만, 주식에서도 고점에서 익절하기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고들 하니, 빠져나올 때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앎을 서슴없이 실천에 옮기는 것만 해도 예나 지금이나 이미 일반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듯하다.


사실 천병희와 김남우 등의 원전 번역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네카는 중역의 피해를 종종 입은 작가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심각한 번역서 2종을 소개하자면, 1980년대부터 간행된 범우사의 <행복론>(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와 합본되어 지금도 <명상록/행복론>으로 간행 중이다)과 2000년대 들어 간행된 동서문화사의 <세네카 인생론>이 있다.


우선 범우사의 <행복론>은 세네카의 원저가 아니다! 17세기 영국인 로저 레스트레인지(Roger L'estrange, 1616-1704)의 편저 <세네카의 도덕론: 요약본(Seneca's Morals: By Way of Abstract)>(1678)에 수록된 "행복한 삶에 관하여"(Of a Happy Life)를 옮긴 것인데, 편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세네카의 여러 저서에 흩어져 있는 내용을 주제별로 재구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네카의 '대화편' 중에도 "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a Beata)가 있어서 마치 같은 작품이겠거니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세네카의 "행복한 삶"은 총28장(미완)인 반면, 레스트레인지의 "행복한 삶"은 총25장이고 내용도 더 많으며, 세네카의 동명 대화편의 내용뿐만 아니라 <도덕 서한>의 내용도 군데군데 조합해 놓았다.


출전 표시가 전무해서 각 문단의 유래를 확인할 수 없다는 가장 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요약본조차도 이미 옛날 책이니 지금에 와서는 고전으로 대접받을 만하지만, 출판사가 오랫동안 독자를 기만했다는 점은 괘씸할 수밖에 없다.(어쩌면 번역자나 출판사는 이 책이 세네카의 온전한 저술까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지 모르지만, 책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다음으로 동서문화사의 <세네카 인생론>이 있는데, 무려 970쪽에 달해 지금까지 나온 세네카 번역서 중 최대 분량이다. 세네카의 대화편 전10편, <도덕 서한집> 전124편 중 65편, <자연의 의문들> 전6편에, 심지어 풍자 산문 "아포콜로킨토시스"와 위작으로 간주된 "불행의 치료에 대하여"까지 들어 있어서, 사실상 희곡을 제외한 그의 작품 대부분을 수록한 셈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동서문화사 번역서와 마찬가지로 일어 중역으로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고유명사부터 "마르쿠스 카토"(Marcus Cato)를 "마르크스 카트", "라엘리우스"(Laelius)를 "라에리우스", 베르길리우스"(Vergilius)를 "웰기리우스"로 틀리게 썼는데, 하나같이 가타가나로 표기된 라틴어를 잘못 옮기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형적인 실수이다.


그런데 이 책의 또 다른 부분에서는 위의 인명이 "마르쿠스 카토"와 "베르길리우스"라고 제대로 표기되어 있으니, 이쯤 되면 번역도 문제지만 편집도 문제임을 짐작하게 된다. 지금은 그나마도 절판되어 '대화편'은 <세네카 인생철학이야기>로 재간행되고, '도덕 서한'은 <세네카 삶의 지혜를 위한 편지>로 재간행되었으나, "자연의 의문들"과 다른 저술은 사라졌다.


C. S. 루이스는 고전 독서에 관한 조언에서 '플라톤 해설서를 읽는 것보다는 플라톤을 읽는 것이 더 쉽다'고 말했다. 세네카도 마찬가지이니, 맥락도 결여되고 왜곡도 의심되는 갖가지 '성공론' 류의 편역서를 읽기보다는 원전 번역서를 읽는 편이 더 유익할 것이다. 약간의 인내와 관심은 필요하겠지만, 그건 하다못해 일일 연속극을 보더라도 필요한 자세 아닐까.


원전 번역서로 추천할 만한 것은 당연히 천병희의 <세네카의 행복론>으로 '대화편' 중 4편의 완역이다. 김남우 등이 옮긴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는 '대화편' 전12(10)편을 한 권으로 완역했다는 점이 장점이다. 다른 원전 번역서도 몇 가지 더 나온 것 같은데 수준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이런 몇 가지를 빼면 나머지는 중역본에 편역서라 추천할 수 없겠다. 



[*] 나귀님이 보기에 지금까지 나온 세네카 편역서 중에서 최악의 제목은 <사형당했지만 이 편지는 주고 싶습니다>이다. 언젠가 뉴스에서 최근 출판계에서 몇몇 베스트셀러의 제목을 무작정 따라하는 유행이 있다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그 대표 사례로 들어서 황당하다 싶었는데, 저 제목을 보고 나니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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