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스에서 '복기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에 그건 또 무슨 신조어인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의외로 사람 이름이었다. 무려 현역 국회의원이고, 심지어 재선 의원이라는데도 불구하고 나귀님으로서는 전혀 몰랐던 셈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바둑이나 뭐 그런 데에서 쓰는 뜻처럼 이미 진행된 뭔가에 대해 '복기'를 잘 하는 사람 정도의 뜻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런데 또 어제인가는 뉴스에서 어느 공직자를 거론하며 '이억원' 운운하기에 누군가가 또 그 액수만큼의 뇌물을 받아 먹었나 싶어서 검색해 보니 이번에는 금융위원회 위원장 이름이었다.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저 양반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놀림과 웃음을 겪어야 했을지 생각해 보면 뭔가 측은하고 숙연한 마음마저 들어 미안했다.


이처럼 이름 중에는 유사한 의미나 야릇한 발음 때문에 자연스레 웃음을 유발하는 것들이 없지 않다. '궉'이나 '팽'처럼 희귀한 성씨도 비슷한 상황인데, 정작 본인들은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니 한편으로 딱하기도 하다. 실제로 법원을 거치는 복잡한 절차에도 불구하고 개명 신청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니,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듯하다.


지난 주에 박명수 유튜브를 보니 최근 사람 이름을 넣어 출시해서 인기라는 칸초를 까보는 내용이 나왔다. 요즘 제일 흔한 이름 수십 종을 선별했다는데, 지난번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목록을 확인하니 나귀님의 이름은 없고 바깥양반의 이름도 없었으며, 우리 부모나 형제자매나 지인의 이름도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비로소 이제는 유행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예전에는 보통 이미 정해진 대로 돌림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고, 그러다 보니 같은 성씨라면 이름만 들어도 대충 항렬이 짐작되게 마련이었는데, 지금은 돌림자에서 벗어난 한글 이름도 많이 늘어난 듯하다. 다만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이제는 한글로 이름을 먼저 짓고 한자를 나중에 갖다 붙이는 식의 주객전도도 늘어나는 모양이라 우스울 수밖에 없다.


한때는 '이슬'이란 여자 이름이 가장 흔한 한글 이름 아니었나 싶다. 외관상 한자 같아도 실제로는 외국 이름(?)인 경우도 있는데, 기독교인 중에 흔한 '예'와 '하'가 그런 경우로, 각각 '예수님'과 '하느님'을 가리킨다. 일본어의 잔재라 해서 지금은 외면되는 여자 이름 '-자'도 사실 한때는 '제니'나 '제시'처럼 세련되다 여겨져서 유행하던 외국식 이름이었다.


외국 이름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갖다 붙이는 것도 이상한데, 언젠가 미국 유학 중인 지인이 아들 이름을 '아이작'이라고 지었다기에 어색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영어 이름은 대개 성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아이작'(이삭)은 대표적인 유대계 이름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미나리>의 감독도 '아이작'인 것을 보면 비슷한 사례도 많았던 모양이지만.


외국인이 한국식 이름을 짓는답시고 '박김리'나 '오최정'으로 자처하면 우리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지듯이, 한국인도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 캐릭터처럼 '주니어 3세'로 자처한다면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기업의 경우에는 회사명이나 상품명이 뜻하지 않게 웃음이나 반감을 자아내는 바람에 현지 정서를 감안해 변경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이름의 중요성은 '사람 운명은 이름 따라 간다'는 속설로 잘 요약되고, 그래서인지 한때 '이름 함부로 짓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은 운명론보다 그냥 우스갯소리로만 언급되는 듯하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성기나 욕설 같은 부적절한 단어를 자녀 이름으로 못 쓰게 하는 법령이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하겠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이름 중에도 그리 평판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모비 딕>의 주인공인 '에이해브' 선장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악한 왕 '아합'의 이름을 뜻하기 때문인데,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어머니가 붙여주는 바람에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아 왔고, 문제의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는 등의 불운이 평생 따라다닌 것으로 묘사된다.


구약성서에서는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 역시 부창부수로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강철 도시>에는 주인공의 아내가 하필이면 그 영어식 이름인 '제저벨'을 부여받은 까닭에 큰 사고를 치게 된다.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름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받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나쁜 쪽으로 이끌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식으로 이해하자면 어쩌다 본명이 '장희빈'인 여학생이 본래는 착한 성격이었지만 친구들의 놀림을 견디지 못해 진짜 악녀로 변하게 되는 셈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숱한 동명이인 '김건희'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물론 동명이인 '차은우'나 '장원영'만큼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남들의 '기대'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까진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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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과 저녁마다 산책하는 길에 종종 달리기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언제부턴가 그 숫자가 대폭 늘어나는 바람에, 가뜩이나 좁은 산책로에서 이리저리 비켜주기 바빠 살짝 짜증까지 났었는데, 뉴스를 보니 그렇잖아도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러닝 크루'라는 이름으로 공원이며 도로에서 단체 운동을 하는 바람에 차량이며 행인으로부터 불만이 속출한 모양이다.


급기야 일부 공원에서는 3인 이상 달리기 금지, 상의 탈의 금지, 구호 외치기 금지 등 '러닝 크루'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만류하는 구체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내걸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이다. 기존의 각종 '동호회' 관련 논란처럼, 개성 중시와 참견 거부라는 최신 풍조의 이면에는 뭐든 떼를 지어 몰려다녀야 안심하는 인간의 본성이 남아 있는 것이려나.


달리기와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는 나귀님이니 종종 병원에서 운동하라는 지적을 받아도 차마 시도조차 하지 않는데, 모든 운동의 기본이 달리기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체중이며 체력, 도가니며 선지로는 선뜻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그냥 저녁 먹고 바깥양반과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장바구니에 맥주만 가득 사서 들고 다니는 것쯤으로 대신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운동 삼아 달리는 것을 '러닝' 대신 '조깅'이라고 했었고, 보통 새벽에 일어나서 밥 먹기 전에 동네 한 바퀴 뛰고 돌아오는 것을 가리키곤 했었다. 아울러 이것은 운동 선수라든지 특별히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의 유별난 취미로만 간주되었고, 기본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서양에서 유래한 운동 방법이라고 간주되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자서전을 보면, 미국에 오래 살다 칠레로 귀국해서 아침마다 '조깅'을 하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던 일화가 나온다. 고국보다는 미국의 생활 방식에 더 익숙한 까닭에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디서 굴러 들어온 젊은 녀석이 미국인 흉내를 내고 다니는 모습이 영 못마땅해 보인 까닭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이식된 문화의 일종으로 간주된 '조깅'인지 '러닝'도 한때 의외의 열풍을 일으키며 유행한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사반세기 전인 2000년에 요슈카 피셔의 <나는 달린다>라는 책이 번역된 것이 시작이었는데, 중년을 맞이해 인생의 변곡점에 선 독일 정치인이 달리기를 통해서 건강과 삶의 목표를 되찾는 내용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해당 출판사 대표도 이 책을 내면서 운동화를 사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후 달리기 열풍이 불면서 과거의 '조깅'과는 결이 다른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런저런 관련 서적까지 간행되는 듯 제법 유행을 타나 싶더니만, 대부분의 유행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며 시들해지고 피셔의 책도 이제 절판이다.


유행의 반복은 어찌 보면 역사의 법칙 같기도 한데, 치마나 바지 길이가 주기적으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개인 이동 수단의 경우, 처음 나온 세그웨이는 기술의 한계로 반응이 미미했다가 사반세기 뒤에는 킥보드의 형태로 재현되어 크게 유행했는데, 전자와 후자 사이에 배터리 기술이 크게 발달해 충분한 동력을 마련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반복이 항상 좋지는 않다는 점은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여 실수를 반복한다'는 밈으로 잘 요약되는데, 최근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대책 역시 십수년 전의 유행 아닌 '우행'을 반복한 셈이니 기시감이 든다. 물론 가장 놀라운 점은 재테크 개미들치고 주가나 금값이나 집값 폭등 같은 유행의 반복에서 손쉽게 수익 올리는 경우가 의외로 없더라는 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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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난리가 난 캄보디아 한국인 납치 감금 사건 보도를 접하다 보니, 그 배후의 중국 범죄 조직이 운영하는 범죄 단지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지명 중에 '시아누크빌'이라는 것이 있기에 흥미가 동했다. 십중팔구 '시아누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지명인 듯한데,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을 뉴스에서 들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싶어서 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노르돔 시아누크(1922-2012)는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시절 어린 나이로 허울뿐인 왕위에 올랐다가, 이후 독립, 전쟁, 축출, 연금, 복귀라는 파란만장한 체험을 했던 인물이다. 허수아비 국왕, 줄타기 외교의 달인, 제3세계 독자 노선의 대표 인물, 우방국을 떠도는 망명객, 속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 같은 다양한 평가를 받은 것도 그래서다.


특히 망명 시절에는 각별히 친했던 김일성의 배려로 한동안 북한에서 머물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중국과 북한을 오락가락하던 '시아누크 공'의 동향에 각별히 주목해서 뉴스에서도 언급했던 모양이다. 군주제를 반대하는 북한이었지만, 왕따 시절 자국을 국제 무대에서 최초로 인정했던 캄보디아 전직 국왕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평가이다.


물론 '교황은 몇 개 사단을 갖고 있느냐?'는 스탈린의 일침을 적용하자면, 국력 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전세계의 말석에 머물 수밖에 없는 캄보디아였지만, 시아누크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린 덕에 한때마나 여러 강대국의 주목을 받았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다만 그 지인 대부분이 불운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였다는 점은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른바 '킬링 필드'라는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 때문에 살짝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사실 시아누크 치하라고 해서 태평천하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아누크의 정치적 오판과 줄타기 외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실정으로 고질적인 사회 불안이 발생했고, 이후 크메르 루주와 군부 독재가 뿌리를 내릴 토양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오늘날의 대체적 평가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가 미국 언론인 버나드 크리셔의 도움으로 쓴 회고록이 번역되기도 했다. 출판사가 무려 '디자인하우스'인데, 그 당시에는 잡지 위주였고 단행본은 개척 단계이다 보니 이런 의외의 책도 낸 듯하다. 뒷날개를 보면 심지어 '화성인' 유리마의 책도 간행했던데, 한 시대를 풍미한 기인이었는데도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무니 꽤 허무한 일이다.


시아누크의 회고록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자서전까지는 아니고, 그가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며 만났던 드골, 네루, 수카르노, 주은래, 나세르, 모택동, 티토, 차우셰스쿠, 흐루시초프 같은 각국 정상들에 대한 추억을 풀어놓은 일화집이다.(다만 '절친' 김일성에 대한 회고까지는 없던데, 원래부터 없었는지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빠졌는지는 나귀님도 잘 모르겠다).


공저자의 서문에도 나온 것처럼 캄보디아의 역사와 현실을 회고하는 본격적인 자서전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지만, 비록 자기미화 성향의 짧은 관찰기에 불과하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한 다양한 인물에 대한 일화와 평가를 색다른 각도에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흥미로운 자료이다.(다만 번역과 교정 모두 그리 좋지 않아서 종종 황당한 오타가 눈에 띈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에 비하면 '다시 보니 선녀 같다'던 시아누크였지만, 이후에도 군부 독재가 지속되면서 캄보디아의 상황은 그리 좋아지지는 않은 모양이고, 이번에 한국인 납치 감금 사태라는 역대급 사건이 터지면서 새삼스레 국제적인 악명을 더 쌓아 올리는 모양이다. 지나친 과장이란 교민들의 항변도 있지만, 어쨌거나 안전한 나라까지는 아닌 듯하다.


배후 세력인 중국이 문제라는 지적도 맞기는 하지만, 애초에 독재 정권 치하이다 보니 그런 무법천하도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자정 노력이 없는 한 저런 상황이 지속될 터이니, 당분간은 아예 발을 끊는 것이 방법일 듯하다. 일각의 지적처럼, 현재 캄보디아의 상황이야말로 마치 무슨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범죄 국가, 또는 기능부전 국가의 모습이다.


세계적으로 흥행하다 못해 심지어 일본에서는 포르노 패러디까지 나왔다는 (심지어 원작 출연 배우가 바로 그 포르노를 언급했다가 뭇매를 맞았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설득력 없는 부분이 바로 현대 한국을 그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점이었다. 총기 소지가 금지되고 곳곳에 보안 카메라가 설치된 나라에서 과연 그런 행사 개최가 가능할까. 


따라서 차라리 재난이나 전쟁 같은 파국 직후에 사회 질서가 교란되고 약육강식이 일반화된 근미래의 한국이라든지, 아니면 가상의 독재 국가라면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의 캄보디아야말로 그런 창작물에는 가장 어울리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사태를 보며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겠다'며 혀를 찬 사람도 없지 않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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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의 시각에서 보자면, 흔히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역대 군주 중에서도 가장 매력이 없었던 인물은 한 고조 유방이다. 왕조의 창업자로서의 성과는 인정하더라도 능력 면에서는 딱히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사기> "본기"에 기록된 행적만 살펴보면 확고한 주관도, 압도적 무력도, 뛰어난 인품도 없이 오락가락했었던 것만 같다.


훗날 소설 <삼국지> 속 등장인물을 통해 대중화된 영웅상과 비교해도, 대범한 듯하다가 편협하고 너그러운 듯하다가 잔인한 유방의 면모는 어딘가 불량스럽게도 보인다. 일본 역사가 사타케 야스히코의 평전 <유방>을 보니, 심지어 종종 욕을 남발하거나 발을 씻으며 중요 인물을 접견하거나 등의 무례함을 출세 전에 체득한 건달 습관의 발현이라 설명하고 있었다.


평전에서도 "생애"와 별도로 "됨됨이"라는 장을 두어 해당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 저자도 나귀님과 비슷한 의문을 품었을지 모르겠다. 그의 결론은 비록 유방에게 건달 특유의 허세며 무례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와 의리를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부하들로부터는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삼국지>의 주인공인 세 나라의 군주만 해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반면 유방의 경우에는 그들만큼의 매력도 찾기 힘드니, 결국 본인의 능력보다는 참모와 장수의 '템빨'로 행운을 얻었다는 박한 평가를 해도 무리는 아닐 법하다. 물론 유비 역시 비슷한 '템빨' 덕을 본 사람이기는 하지만, 답답할만큼 의리를 강조하는 점은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한데 앤드류 카네기의 묘비명에 나왔듯이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을 데려다 쓰는 것도 능력이니, 이런 점에서라면 유방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해야 맞겠다. 그의 장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 회음후 한신인데, 본래 항우 밑에 있다가 등용되지 못해 유방 밑으로 자리를 옮겼고, 여기서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등용되어 유방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물론 한신도 항상 고분고분한 것은 아니어서 종종 꾀를 부리기도 했는데, 이때마다 유방은 기분 나빠 하면서도 상대를 잘 구슬려서 써먹었다. 하지만 전쟁의 달인 한신도 천하를 제패한 유방에게는 허를 찔려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그때에 가서야 '토사구팽'(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이란 격언을 인용해 자신의 처지를 비유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지난 주에 새삼스레 한신의 일화를 떠올린 까닭은 최근 논란이 된 검찰청 폐지 결정과, 곧이어 나온 특검 파견 검사들의 복귀 요구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는데, 한창 파견 근무 중에 모기관이 사라진다면 누구라도 불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에서는 배신자 취급을 하지만, 검사야 군인과는 다르니 여차 하면 사표 쓰고 나가면 그만 아닐까.


결국에는 이것도 여당의 자칭 '검찰 개혁' 가속화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일 듯하다. 비유하자면 빈대가 있다고 초가삼간 태운 격인데, 알고 보니 당장 써야 할 세간살이도 초가삼간 안에 들어 있었다고나 할까. 여러 방면에서 답답하게 진행되는 특검 조사나 다 끝나고 하면 모를까, 역시 뜬금없던 방통위 폐지처럼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니 불만이 나오는 듯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검찰이라는 밑동을 흔드는 상황에서 특검이라는 가지가 멀쩡할 리 없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검찰 개혁보다 내란 특검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 것이야 사냥꾼 마음대로지만, 문제는 아직 토끼를 다 잡지도 못한 상황 아닌가. 지나치게 성급하고 거친 행보이니, 자칭 '개혁'으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될 수밖에.


사실 '토사구팽'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생기는데, 대표적인 것이 문재인 정부의 윤석열 파면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미운 털이 박혀 좌천된 검사를 굳이 검찰총장으로 등용했는데, 이후 갈등이 벌어졌지만 곧바로 쳐내지 못하며 결국 야당 대선 후보까지 되고 말았으며, 그렇게 출범한 정권이 어떤 부작용을 낳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이다.


당시 법무장관 추미애와 징계와 소송을 주고받으며 논란이 커지는 와중에 대통령 문재인은 혼자만 좋은 사람인 척하는 위선적 면모를 보였고, 윤석열은 마치 '도깨비 사과'처럼 때리면 때릴수록 인기가 커진 끝에 여당과 원수지고 야당으로 가서 대선 후보까지 되어 보란 듯 원한을 되갚았으니, 앞서 설명한 회음후 한신의 행적과도 유사한 바가 없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후에 드러난 논란을 보면 윤석열은 검찰총장 등용 이전부터 허물 많은 사람이었는데, 문재인 정권에서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특검 이후에도 써먹을 칼잡이가 필요해 건사하다 결국 뒤통수를 세게 맞은 셈이다. 비유하자면 토끼를 잡고 나서도 사냥개를 삶지 않아 생겨난 문제인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듯 세상 모든 개의 씨를 말릴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검찰 대신 경찰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경찰도 검찰 못지않게 크나큰 비판과 불만의 대상인데다가, 양쪽 모두 역대 정권에서 '주구' 역할에 충실해 왔음을 감안하면, 이제 와서 제멋대로이고 입질 잦은 이 사냥개를 버리고 역시나 제멋대로이고 입질 잦은 저 사냥개를 택한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검찰청이 없어지고 검사의 역할이 변해도, 여전히 누군가는 그 일을 담당해야 한다. 흔히 말하듯 칼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부가 잘못했다고 조직을 없앤다면, 사실 대통령실과 국회야말로 제일 먼저 없어져야 할 조직이 아닐까. 역시나 갑작스러운 '배임죄 폐지' 제안처럼, 과연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런 와중에 뜬금없이 방통위를 폐지하고 눈엣가시 위원장을 쫓아냈지만, 이진숙이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과거의 윤석열과 유사한 '도깨비 사과' 효과 덕분에 야당의 새로운 영웅으로 대두했으니 한심한 일이다. 개고기 금지법이 생겨서 그런가, 어쩐지 지금은 사냥개는 고사하고 그냥 개 삶는 방법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많아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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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 코진스키의 중편 "정원사 챈스의 외출"의 주인공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려서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사실상의 감금 상태에서 살아온 것으로 묘사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느 부잣집에서 식객으로 살면서, 낮에는 정원사 노릇을 하고 밤에는 TV 시청을 낙으로 삼다가, 어느 날 집주인이 사망하며 실직자가 되어서야 난생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19세기 초 독일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된 소년 카스파르 하우저와도 유사한 상황이다. 정확한 나이까지는 몰라도 10대임에는 분명했는데, 말도 몇 마디 못하고 세상살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는 점에서 혹시나 어려서부터 어딘가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고, 워낙 이례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코진스키의 소설 속 주인공도 여차 하면 현대의 카스파르 하우저가 될 뻔했지만, 운 좋게도 그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미국 정계의 유력자를 만나게 되고, 이후 대화 중에 자기가 유일하게 아는 내용인 식물과 원예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음으로써 상대방에게 의외의 영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그의 '멘토'로 간주되어 미국 정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주인공이 주위 사람으로부터 감탄과 존경을 얻어내는 과정은 전형적인 '착각물'의 전개 방식과 다르지 않다. 최근의 어떤 정치경제적 사안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제때 맞춰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어쩌고 하면서 식물의 재배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이 답변이 해당 사안을 원예에 빗댄 비유라고 착각하고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다.


급기야 대통령까지도 주인공을 만나서 들은 '원예론'을 연설에서 인용하는 상황이 되자, 미국 정부에서는 물론이고 냉전 시대 경쟁국인 소련 정부에서도 저 수수께끼의 '멘토'에 대한 뒷조사에 착수하지만, 아무리 알아보아도 그 출신이나 이력에 대해서는 나오는 것이 없어 당황한다. 이런 와중에도 주인공은 여전히 타인의 착각 덕에 출세가도를 질주하게 된다.


오래 전에 읽은 작품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낸 까닭은, 최근 대통령 보좌관 가운데 하나인 여성 직원의 정체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최측근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렇다 할 경력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신상까지도 공개된 적 없다 보니, 새로운 문고리 권력이 아니냐는 추측에서부터 심지어 북한이나 중국 출신 간첩이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신인 연예인이 잘 나간다 싶으면 곧바로 학폭이나 비행 증언이 나오곤 했던 과거 사례를 감안하면 확실히 이례적이어서, 잘만 하면 외계인이나 인조 인간이나 파란 해골 13호가 아니냐는 추측마저 나올 법한데, 국회 소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제 발이 저린 듯 청문회 출석 의무가 없는 보직으로 재빨리 옮겨간 것을 보면, 뭐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문고리 권력'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박근혜 정부 당시 최순실 논란이 벌어졌을 때라고 기억하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여전히 특검이 진행 중인 윤석열 정부에서는 물론이고 더 이전의 역대 정권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비선실세는 항상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나같이 그 말로가 좋지는 않았으니, 이번에 논란이 된 인물은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나귀님이 보기에는 이번 논란 제기 직후에 나온 제보 가운데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한 야당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해당 인물이 신구대 '환경조경학과'를 졸업했고, 그 인연으로 자기 은사를 '산림청장'에 임명하는 데에 관여했다기 때문이다. 곧바로 오보로 밝혀져 도로 묻히기는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면 코진스키 소설의 현실판이 나올 뻔했다!


왜냐하면 신구대는 한때 명성을 떨친 신구출판사의 창업주 이종익이 자신의 농장 부지에 설립한 학교이다 보니, 조경학과와 인쇄학과 등 본인의 관심사를 반영한 분야를 중점적으로 육성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차 하면 한국의 '정원사 챈스'가 나올 뻔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코진스키와 신구문화사 모두 좋아하는 나귀님으로서는 아까울 수밖에...



[*] 나귀님이 알기로, 위에 언급한 코진스키 중편의 최초 번역본은 책세상에 나온 미국 현대 작가 4인 (로버트 쿠버, 하비 스와도스, 카슨 매컬러스, 저지 코진스키) 작품집인 <하녀 볼기치기>에 수록된 "챈스 박사"였고, 이후 웅진출판 "포스트모더니즘 걸작 선집" 중 하나인 코진스키의 <편력>에도 "정원사 챈스의 외출"로 함께 수록된 바 있으며, 저작권 계약이 불필요하던 시대이다 보니, 그 외에 다른 번역본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한동안 이 모두가 싹 절판되면서 한때나마 희귀본 대접을 받기도 했는데, 2010년쯤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근간 예고만 하고 소식이 없더니, 엉뚱하게도 2018년에 미래인이라는 출판사에서 툭 하니 나왔는데, 이미 숱한 절판본이 따라갔던 경로와 유사하게 '절판일 때에는 수요가 높다가, 재간행되니 수요가 사라지는' 신기한 현상이 반복되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민음사의 근간 예고에 올라온 제목이 원제를 직역한 듯한 <거기 있으므로>이고, 나머지 번역서는 하나같이 "챈스"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살려 제목을 붙였다는 점이다. <하녀 볼기치기>에 붙은 편역자 안정효의 의견에 따르면 원제인 Being There는 "박통"(博通), 즉 척척박사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라던데, 사실 여부는 나귀님도 모르겠다. 코진스키의 중편은 1979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주연을 맡은 피터 셀러스의 '어른의 모습을 한 어린이' 연기와 몇 가지 세부 묘사는 격찬을 받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이 마치 초월적 존재라도 된 것처럼 나온 묘사는 사족에 불과했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고 보니 나귀님도 영화에 나온 셀러스의 사진을 표지에 사용한 페이퍼백을 하나 갖고 있는데, 어디 뒀는지는 영 모르겠다. 다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뒤늦게 표절 의혹도 제기된 바 있는데, 폴란드 출신 미국인인 저자가 국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작가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주장이었다. <페인트칠 당한 새>를 비롯한 다른 저서에 대해서도 표절이나 대작 혐의가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무명 시절의 폴 오스터도 그의 작품 '윤문'에 참여했던 경험을 훗날 밝힌 바 있다) 이래저래 논란이 되는 인물이기는 한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싹 절판이어서 더 이상 논란은커녕 화제조차도 되지 않는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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