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깥양반과 저녁마다 산책하는 길에 종종 달리기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언제부턴가 그 숫자가 대폭 늘어나는 바람에, 가뜩이나 좁은 산책로에서 이리저리 비켜주기 바빠 살짝 짜증까지 났었는데, 뉴스를 보니 그렇잖아도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러닝 크루'라는 이름으로 공원이며 도로에서 단체 운동을 하는 바람에 차량이며 행인으로부터 불만이 속출한 모양이다.
급기야 일부 공원에서는 3인 이상 달리기 금지, 상의 탈의 금지, 구호 외치기 금지 등 '러닝 크루'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만류하는 구체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내걸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이다. 기존의 각종 '동호회' 관련 논란처럼, 개성 중시와 참견 거부라는 최신 풍조의 이면에는 뭐든 떼를 지어 몰려다녀야 안심하는 인간의 본성이 남아 있는 것이려나.
달리기와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는 나귀님이니 종종 병원에서 운동하라는 지적을 받아도 차마 시도조차 하지 않는데, 모든 운동의 기본이 달리기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체중이며 체력, 도가니며 선지로는 선뜻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으니, 그냥 저녁 먹고 바깥양반과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장바구니에 맥주만 가득 사서 들고 다니는 것쯤으로 대신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운동 삼아 달리는 것을 '러닝' 대신 '조깅'이라고 했었고, 보통 새벽에 일어나서 밥 먹기 전에 동네 한 바퀴 뛰고 돌아오는 것을 가리키곤 했었다. 아울러 이것은 운동 선수라든지 특별히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의 유별난 취미로만 간주되었고, 기본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서양에서 유래한 운동 방법이라고 간주되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자서전을 보면, 미국에 오래 살다 칠레로 귀국해서 아침마다 '조깅'을 하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던 일화가 나온다. 고국보다는 미국의 생활 방식에 더 익숙한 까닭에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디서 굴러 들어온 젊은 녀석이 미국인 흉내를 내고 다니는 모습이 영 못마땅해 보인 까닭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이식된 문화의 일종으로 간주된 '조깅'인지 '러닝'도 한때 의외의 열풍을 일으키며 유행한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사반세기 전인 2000년에 요슈카 피셔의 <나는 달린다>라는 책이 번역된 것이 시작이었는데, 중년을 맞이해 인생의 변곡점에 선 독일 정치인이 달리기를 통해서 건강과 삶의 목표를 되찾는 내용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해당 출판사 대표도 이 책을 내면서 운동화를 사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후 달리기 열풍이 불면서 과거의 '조깅'과는 결이 다른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런저런 관련 서적까지 간행되는 듯 제법 유행을 타나 싶더니만, 대부분의 유행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며 시들해지고 피셔의 책도 이제 절판이다.
유행의 반복은 어찌 보면 역사의 법칙 같기도 한데, 치마나 바지 길이가 주기적으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개인 이동 수단의 경우, 처음 나온 세그웨이는 기술의 한계로 반응이 미미했다가 사반세기 뒤에는 킥보드의 형태로 재현되어 크게 유행했는데, 전자와 후자 사이에 배터리 기술이 크게 발달해 충분한 동력을 마련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반복이 항상 좋지는 않다는 점은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여 실수를 반복한다'는 밈으로 잘 요약되는데, 최근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대책 역시 십수년 전의 유행 아닌 '우행'을 반복한 셈이니 기시감이 든다. 물론 가장 놀라운 점은 재테크 개미들치고 주가나 금값이나 집값 폭등 같은 유행의 반복에서 손쉽게 수익 올리는 경우가 의외로 없더라는 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