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바깥양반 성화로 신촌에 벚꽃 보러 갔다가 알라딘에 들러 허탕만 치고 (예전에는 책장 맨 꼭대기까지 물건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장식품만 놓여 있고, 1층 가운데 매대도 절반은 팬시용품뿐이다) 혹시나 싶어서 단골 헌책방에 들러 보았더니 지학사 오늘의 세계문학 가운데 하나인 <광야의 집>(호세 도노소 지음, 김창환 옮김, 1988)이 눈에 띄어 구입했다.


이 시리즈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초였으니까, 대략 30년째 찾아다닌 셈인데 아직 완질을 갖지는 못했다. 전34권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두 권이 비었으니까, 어쩌면 평생 다 사지는 못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지금이라도 중고로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절판본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언젠가 때가 되면 만나겠지 여유를 부린 까닭이다.


아주 흔치는 않은 시리즈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까닭은 그 대부분을 단 한 번에 구매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서울역에서 남영동 쪽으로 큰길에 헌책방이 대여섯 군데 있었는데, 하루는 그중 맨 끝에 있는 별빛서점에 들렀더니 이 시리즈 가운데 스물대여섯 권이 꽂혀 있었다. 생소한 작품이며 작가가 대부분이었지만,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모조리 샀다.


지학사라면 대부분 교과서와 참고서 출판사로 기억하겠지만, 한때는 단행본을 간행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벽호'로 브랜드명이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성과물이 '오늘의 세계문학'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을 해당 언어 전공 교수가 번역했다는 점인데, 그래서인지 아직도 유일한 번역서로 남은 것들이 많다.


세계문학전집이라면 지금도 영미유럽 작가에 편중된 것이 문제로 지적되는데, 이 시리즈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등 이른바 제3세계 작가를 많이 소개했다. 당시 노벨문학상을 이미 받은 작가로는 클로드 시몽, 월레 소잉카, 나집 마흐푸즈, 나딘 고디머를 넣었고, 유력 후보로 거론된 작가로는 치누아 아체베, 응구기 와 시옹오, 막스 프리쉬를 넣었다.


훗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페터 한트케의 작품도 하나씩 넣었으니, 이 시리즈의 선구안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미유럽 작가 중에서 앤서니 버제스, 토머스 핀천, 마가렛 앳우드, 조이스 캐롤 오츠 등을 넣었던 것도 당시로서는 꽤나 특이했고, 중국 작가 중에서 장애령을 넣었던 것 역시 특이했다.


나귀님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역시나 버제스의 대표작 <시계태엽 오렌지>의 번역본인 <조직과 인간>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국판이 아니라 미국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판은 영국판의 맨 마지막 장을 삭제함으로써 더 암울하고 충격적인 결말을 제시했지만, 저자의 허락을 받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다.


반면 나중에 번역된 민음사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영국판을 대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미국판의 결말에서 수년 뒤의 상황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도 고스란히 실려 있다. 물론 편집자나 출판사가 감히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멋대로 내용을 가감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작품의 내용을 감안해 보면 영국판보다 미국판의 결말이 더 그럴싸하게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 보니 미국판의 결말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결말과도 똑같은 셈이니,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의견보다 편집자/출판사의 의견이 더 정확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여하간 나귀님은 <조직과 인간>을 통해 미국판의 결말이 유일무이한 결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도 그렇게 나왔으니까!) 나중에야 또 다른 결말이 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작품이 바로 그제 타계한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녹색의 집>이다. 중앙일보사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빤딸레온과 위안부들>을 먼저 읽었는지, 아니면 이 작품을 먼저 읽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간 수많은 '목소리'가 정신없이 교차되면서 사건의 윤곽이 점차 뚜렷해지는 서술 기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후 <미라플로레스에서 생긴 일>과 <궁둥이>를 읽고 나서부터는 이 작가의 책이라면 일단 사고 보는 버릇이 생겨 버렸는데, 막상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한동안 절판되었던 책들도 재간행되고, 새로운 작품이 대거 번역되는 것을 보니 어쩐지 관심마저도 시들해져서, 지금은 읽은 것보다 읽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채, 마루 책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책 중에서도 막상 읽고 나니 살짝 어리둥절했던 경우가 있었으니, 사실 원저자가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자가 문제였던 경우다. <픽션에 숨겨진 이야기>라는 책인데, 원래는 1968년에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수정해서 내놓은 것이다. 판형도 작고, 분량도 적어서 150쪽에 불과하지만, 원문도 수록되다 보니 번역문은 그 절반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자의 무지와 편집자의 부재다. '알렉상드르 뒤마'를 '알레한드로 듀마스'로, '플로베르'를 '플라우베어'로 오기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오타도 들어 있다. 아마존 토착민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벨기에 탐험가를 가리켜 "그 역시 마르께스이다"(60쪽)라고 첨언한 것이 있어서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만, 무려 '후작'(marques)의 오역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오역과 오타가 그득한 몰골이라도 이 책을 감히 내버릴 수 없는 까닭은, 그 내용이 바로 <녹색의 집>의 창작 과정에 대한 회고이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 잠깐 살았던 동네의 유곽인 "녹색의 집"을 멀찍이 지켜보며 느낀 호기심부터, 청년 시절 아마존에서 목격한 원주민과 선교 단체와 범죄 조직에 대한 기억이 뒤섞여 저 소설이 나왔다는 거다.


즉 "소설을 쓴다는 것은 스트립쇼와 비슷한 의식이다"(11쪽)라는 상당히 당혹스럽기까지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강연록은 바르가스 요사 나름의 창작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트립걸이 음탕한 조명 밑에서 옷을 벗어 던지며 자신의 감추어진 매력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가도 역시 작품들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자신의 은밀한 부분들을 발가벗는다."


하지만 소설은 단순한 노출로 그치지 않는다. "물론 둘 사이의 차이점은 있다. 소설가가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것은 스트립걸이 전개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추어진 매력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 추한 부분, 즉 그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향수, 실수, 원한 등과 같은 악마이다." 아울러 "소설가는 옷을 반쯤 벗고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옷을 입는다."


이후의 강연 내용에서 드러나듯이, <녹색의 집>은 그의 수많은 기억들이 뒤섞이고 변형되어 현실에서 재창조된 허구이다. 소설의 내용이 현실의 사례와 정확히 대응하지는 않더라도 근거가 없지는 않으니, 저자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딱 들어맞는 셈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위된 스트립쇼이고, 모든 소설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노출광들이다."(11-12쪽)


강연 말미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저 소설을 발표한 이후, 그 소재가 된 유곽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 번 날을 잡아 방문하려 했지만 번번이 이런저런 이유로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고 언급한다. 때로는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충분히 기회가 있었는데도 저자 스스로가 막판에 결정을 번복해서 방문을 취소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어쩌면 노출 후 이미 옷을 도로 입은 까닭일까.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자극물이었던 개인적인 경험(일상생활, 꿈, 듣기, 독서)들은 창작 과정 동안 아주 심술궂게 감추어져서, 소설이 끝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때때로 소설가 자신조차도, 모든 허구의 이야기 안에 길게 늘여져 있는 자서전적인 그 마음을 용이하게 귀담아 들을 수가 없다."(11쪽)


하지만 저자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고,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녹색의 집>의 소재를 제공한 "그 도시, 그곳의 사람들, 그곳의 모래밭조차도 나를 자유롭게 풀어 주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강연문의 마지막 몇 마디는 마치 지금까지 모든 작품 창작의 토대였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보내는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러분들 중에 누구라도 우연히 삐우라에 가서 만가체리아를 둘러보고 '녹색의 집'을 방문한다면, 만가체리아 사람들과 아비딴따들에게 내가 계속해서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제발 전해 주십시오. 각고의 노력으로 그들에 대한 글을 쓰는 데 지루한 3년을 보냈고 (...) 아직도 나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그들이 남아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72쪽)



[*] 그나저나 <픽션에 숨겨진 이야기> 번역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다른 번역서 중에는 마르케스의 단편집 <이방의 순례자들>도 있었다! 교통사고가 나서 전화를 쓰려고 우연히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로 오해받아 영영 나오지 못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라든지, 딸의 썩지 않는 시체를 트렁크에 넣어 다니며 바티칸에서 성녀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기괴하면서도 인상적인 단편이 많았는데, 지금 와서 다시 읽어 보면 바르가스 요사의 번역서처럼 잘못된 문장이 줄줄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미 오래 전에 사다 놓은 (아마 한 번 읽기도 했던 것 같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중남미 소설 개론도 이 양반 번역이라니, 그건 또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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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과 임어당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가 후자의 휘문출판사 전집을 오랜만에 꺼내 뒤져 보니, 예전에 한 번 보고서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쉬웠던 반세기 전의 은행 금리 안내 전단이 나온다. 예전에 아름다운가게에서 구입했던 책이니, 십중팔구 거기 딸려 왔던 물건이었던 듯하다. 1970년대 책이니 원래 주인이 보고 책갈피로 끼워 놨던 게 아닐까.


전단 내용만 보면 마치 예전에는 통장에 돈을 넣어두기만 해도 쑥쑥 불어났던 것처럼 보이지만, 예금 금리와 함께 나온 대출 금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디 가서 돈 빌리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설령 저 당시에 많은 돈을 벌어 둔 사람이라도 반세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갖가지 흥망성쇠를 겪었을 수 있으니, 과연 예전이 지금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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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스틴 파워>에서 세계 정복을 꿈꾸다가 주인공에게 저지당한 악당 두목은 좆같이 생긴 (욕하는 게 아니라 진짜 레이더에 c==3 형태로 나온다!) 우주선을 타고 도망쳐 냉동 인간이 되었다가 30년 만에 돌아와 다시 지구를 위협한다. 그런데 수십 년 사이에 화폐 가치가 달라졌음을 모르고 무려 "100만 달러"를 협상 조건으로 내놓았다가 오히려 비웃음만 당한다.


그런데 가만 보면 현재 미국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불과 4년 만에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가 내놓는 정책마다 이처럼 세상의 변화를 감안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발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에 정책이 오락가락하며 혼란이 지속되던 차에, 급기야 무분별한 관세 부과와 실시 유예의 영향으로 미국과 한국 모두 증시가 요동쳤다고 전한다.


관세 장벽은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나름대로 자국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악명 높은(?) '칼라 힐스'가 출몰하던 시대도 아니고, 게다가 이른바 세계화로 인해 지구 전역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 영향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상황에서 거칠고 섣부른 조치가 이어지니 자연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탄핵 심판으로 쫓겨난 한국의 전직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서는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진지한 의문도 제기되었던 모양인데, 그러고 보니 비상 계엄 선포 동영상을 유튜브로 보면서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반국가 세력이니, 공산주의 위협이니, 마약 천국이니 하는 횡설수설한 내용이 어딘가 시대착오적이라 느꼈던 까닭이다.


일각의 지적처럼 극우 유튜버 동영상이나 인터넷 뉴스 댓글 내용과도 유사하니, 마지막 계엄 선포가 있었던 한 세대 전 사고방식 그대로 머리가 굳어진 걸까. 어쩌면 계엄 선포가 일상적이었던 시대에 살았던 까닭에 그걸 상당히 쉬운 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치는 파장 따위는 계산하지 못한 채 일단 저질러 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요즘 들어서는 이런 식으로 '내가 곧 법이다'라는 주장이 흔해진 것만 같다. 한국과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논란이 지속 중인 동덕여대 락카칠 사태며 뉴진스의 계약 파기 사태에서도 핵심은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런 독불장군 행보가 국가와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마치 시대정신이라도 된 듯한 모양새다. 


트럼프부터 뉴진스까지 저 여러 사건의 공통점은 '내 생각에는 불법이 아니므로 실제로도 불법이 아니다'라는 단순하고 일방적인 주장이 아닐까.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말처럼 간단할 리는 없으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봐도 무리하고 설득력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저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거나, 조만간 치르게 생겼으니 사필귀정이 아니려나.


특히 미국은 그놈의 세금 때문에 혁명이며 독립까지 했던 나라임을 감안해 볼 때 미국인들로서도 지금의 사태가 달가울 리 없을 듯하니, 트럼프가 폭주의 결과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궁금하다. 이미 야당에서부터 탄핵 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보도가 있으니, 여차 하면 징검다리 재선 대통령에서 징검다리 탄핵 소추 대통령이라는 진기록도 세울 만하다고나...



[*] 그나저나 트럼프 당선 직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갖가지 '예측' 서적 중에서 지금의 사태를 정확히 예언한 것이 있기는 했는지 궁금하다. 알라딘에서 목차를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관세'에 대해 언급한 책도 몇 권 있기는 하던데, 만약 지난 주의 주가 요동 같은 구체적인 사건까지 콕 집어냈더라면, 적어도 그 서적과 저자의 '주가' 만큼은 급등하지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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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넷의 신간이 나왔기에 클릭해 보니, 신작이 아니라 무려 반세기 전인 1972년에 나온 초기작을 번역한 것이었다. 문예출판사에서 나왔다가 한동안 품절되었던 다른 책 두 권도 재간행된 것으로 미루어 꾸준히 독자가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바깥양반이 어디선가 이 양반 이야기를 듣고 와서는 책을 좀 구해 보라고 하는데 절판된 것이 많아서 꽤 고생했다.


문제는 늘 그렇듯이 책을 사 놓으라고 말만 해놓고 바깥양반이 곧바로 흥미를 잃었던가, 아니면 다른 주제로 넘어갔든가 했다는 점이다. 나귀님이야 일단 사기 시작했으니 이후로도 신간이 보이면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한 번은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을 구입해서 뒤적이다 이 저자에게서 '이야기꾼'이라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사회학자이다 보니 딱딱한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인지 논의 중에 개인적 회고가 종종 곁들여져서 희한하다 싶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게 의외로 재미있다! 예를 들어 <짓기와 거주하기>에는 도시 이론가인 제인 제이콥스와 루이스 멈포드와 직접 만나서 나눈 대화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일화가 소개되는데, 이게 웬만한 소설 뺨치게 상당히 재미있었다.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은 서두에서부터 이혼 후 사회복지사로 일한 어머니와 함께 20세기 중반 도시의 빈민 주택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후 첼로를 전공했지만 손에 이상이 생겨서 음악을 포기하고 사회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는데, 이 과정에서 루돌프 제르킨과 머리 페라이어, 데이비드 리스먼과 에릭 에릭슨 등이 언급되니 눈이 번쩍할 수밖에 없다.


여하간 이론보다 여담이 더 재미있는 사람이다 보니, 본격적인 사회학 저서보다는 차라리 회고록이 더 흥미로울 듯한데, 이미 80대에 접어들었건만 자서전 출간 소식은 없는 듯하다. 2024년에도 <공연자>라는 신작을 내놓으면서 음악에서 사회학으로 건너온 본인의 경험에 대해서 언급했던 모양이지만, 본격적인 회고록이나 자서전까지는 아닌 듯하니 살짝 아쉽다.


그나저나 <살과 돌> 신판 역자후기를 보면 구판에도 참여했던 번역자가 "1999년 우리나라에서 세넷의 저작 중 처음으로 번역되기도 했던" 책이라고 설명했는데, 미안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1977년 작 <공적 인간의 몰락>이 <현대의 침몰: 현대 자본주의의 해부>(리차드 세네트 지음, 김영일 옮김, 일월서각, 1982)라는 제목으로 먼저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침몰>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뒤적여 보니, 제14장 제목이 "예술을 빼앗긴 연기자"인 것으로 미루어, 결국 2024년 신작의 단서가 1977년 구작에도 이미 들어 있지는 않았나 싶기도 하다. 반세기 동안의 꾸준한 연구에 감탄하는 한편, 결국 누구에게나 범위, 또는 한계는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여하간 어서 빨리 회고록을 좀 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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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지브리풍(風) 그림 만들기'가 인기라고 한다. 챗GPT에 사진이나 그림을 올리고 '지브리풍'으로 바꿔달라면 진짜로 그 회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바꿔준다던가. 심지어 이 유행 덕분에 챗GPT 유료 사용자가 급증했다고 보도하는 뉴스 기자들도 취재를 핑계로 자기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꿔 게재할 정도이니, 확실히 인기는 인기인 모양이다.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명 작가나 특정 시대 고유의 화풍을 모방한 모작이며 위작이 종종 등장해서 훗날 그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그림을 그려야 하는 모작은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일인 반면, 챗GPT를 이용한 화풍 따라하기는 일반인도 가능할 만큼 손쉽고도 파급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과 논란의 대상이 되는 듯하다.


이런 인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지브리의 명성 때문일 것이다. 이미 수많은 걸작 애니메이션을 통해 대중에게 사랑을 받은 까닭에, 그림체마저 거부감 없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아닐까. 저작권 문제를 이유로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만한 상황이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는 이유도 자칫 대중의 열광에 찬물을 끼얹었다 생길 역풍이 두려워서는 아닐지.


일각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예전 인터뷰를 근거로 '지브리풍' 그림의 원조인 그가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추론하지만, 비록 저작권 위반일망정 전세계가 자신의 그림체에 열광한다는 사실 자체를 기분 나빠할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진짜' 지브리의 신작이 나온다면, 일본과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마 전세계를 제패하게 될 것도 같아 보이니까. 


어쩌면 지브리는 자기네가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복수를 계획 중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기술 문명을 비판하고 전원 생활을 예찬하며, 질주와 낙하, 로봇과 비행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신작 애니메이션에서 타인의 생각을 훔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은 '샘'이라는 지브리 캐릭터가 나와서 빌런 노릇을 하다가 결국 주인공 소년소녀에게 응징당한다든지...




[*] 그런데 '지브리풍'의 원조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체도 역사상 선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도 하다. 나귀님이 맨 처음 본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지브리 이전에 그가 제작진의 일원으로 참여한 <태양의 왕자 홀스의 모험>(1968)이었는데, 훗날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소년, 소녀, 꼬마, 동물, 질주, 낙하, 거인(로봇), 비행(기) 같은 소재가 모조리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림체 자체는 오히려 <하늘을 날으는 유령선>(1969) 같은 동시대의 애니메이션과 유사하지, 지금 유행하는 '지브리풍'과 아주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홀스>는 이후의 본격적인 지브리 애니메이션만큼 '지브리풍'은 아니지만 (어쩐지 '영향에 대한 불안' 개념도 떠오른다. 제프 다이어는 재즈 분야에서 '마치 빌 에반스의 연주가 키스 재릿의 연주를 모방한 것처럼 들린다'는 예시를 통해 이를 깔끔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래도 미야자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브리풍'이라고는 할 수 있으니, 과연 문제의 '지브리풍'을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해서부터 갑론을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귀님이 보기에도 챗GPT의 '지브리풍'은 어디까지나 '요즘 지브리풍'이지, <나우시카>나 <라퓨타> 같은, 또는 <코난>이나 심지어 <홀스> 같은 '옛날(?) 지브리풍'까지는 아닌 듯하니, 어찌 보면 이것 역시 과거의 콘텐츠보다는 최근의 콘텐츠가 더 흔하게 마련인 인터넷을 답습한 챗GPT의 근본적인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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