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안의 화제라는 드라마 <옥씨부인전>이 무려 "마르탱 게르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기에 흥미가 생겼다. 물론 관심이 돋은 까닭에 드라마까지 봤다는 뜻은 아니고, 저 중세 프랑스의 기묘한 일화를 서술한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책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는 뜻일 뿐이다. 


드라마 줄거리의 또 다른 축은 이항복의 "유연전"이라는데, 그러고 보니 작년 말엔가 당쟁을 '중의 머리카락과 처녀의 불알'로 풍자했다는 그의 일화가 문득 생각나서 <국역 백사집>을 뒤적인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처녀의 불알'이 아니라 '고자의 불알'이라고 해서 살짝 실망했었지만.


어쩌다 보니 또다시 아랫도리 이야기로 돌아간 나귀님인데, 마침 "마르탱 게르 이야기"에 대한 몽테뉴의 기록을 살피다 보니, 저 에세이스트 역시 남자가 하루에 몇 번을 할 수 있느냐, 여자는 하루에 몇 번을 원하느냐 하는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시치미 떼고 은근슬쩍 잘도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라면 몽테뉴보다는 동시대인 브랑톰이 한 수 위일 법하고, 비록 최악의 오역본이기는 하지만 그의 풍속담이 이미 우리나라에도 나와 있으므로 자세히 설명해 볼 만하지만, 여하간 오성부원군을 위시한 다른 이야기는 나중으로 기약하고 일단은 "마르탱 게르"에 집중해 보자.


줄거리는 꽤나 기묘하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마르탱 게르라는 남자가 아내를 두고 가출했다가 몇 년 만에 돌아와 재결합했는데, 이후 그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친척이 나와서 법적 분쟁이 벌어졌고, 뒤늦게 진짜 마르탱 게르가 귀향하면서 가짜 마르탱 게르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몽테뉴도 <수상록>의 "절름발이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짧게 언급한 바 있었지만, 오늘날 이 내용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중세 프랑스 역사 전문가인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가 저술하여 이른바 미시사 분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다.


흥미로운 점은 데이비스가 애초부터 책을 쓸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클로드 카리에르와 다니엘 비뉴가 공동으로 집필하던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 역사 전문가로서 자문을 맡은 것을 계기 삼아, 본인의 말로는 영화/시나리오의 비역사성을 극복하기 위해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련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데이비스도 저서 대부분을 배경 설명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고, 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짧은 분량과 흥미로운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책 자체는 오히려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사료의 부족을 상상으로 때운 것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미시사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로버트 핀레이의 "마르땡 게르 다시 만들기"가 그런 비판인데, 마침 데이비스의 반박문 "절름발이에 대하여"와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증거와 가능성"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핀레이는 데이비스가 사료보다 상상에 의존한 경우가 많으니 그 결과물도 역사보다 소설에 가깝다고 꼬집고, 데이비스는 핀레이가 비판의 근거로 삼는 전통적 해석 역시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반박하며, 긴즈부르그는 역사와 소설의 경계가 항상 모호했었다고 지적하며 데이비스를 두둔한다.


나귀님 같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데이비스는 굳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가려다 '에바' 한 것처럼도 보인다. 아내의 모호한 행동을 "여성의 주체성"으로 해석하고, 가짜의 사기 행각을 스티븐 그린블랫의 "자기 형성" 개념으로 해석한 것처럼 가장 비판을 받는 부분도 그렇다.


그런 식이라면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청조가 여성이자 무일푼인 주제에 남성이자 재벌 후계자를 사칭한 것도 "자기 형성"으로 해석할 수 있고, 어이없게도 그런 얄팍한 술수에 넘어가서 동조했던 남현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여성의 주체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미국 공중보건의 역사를 서술한 낸시 톰스는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의 "순수와 불결" 개념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에이즈 창궐 당시 피임도구 사용을 권장했던 실제 사례에도 무작정 적용하면 오히려 부조리해진다고 지적한 바 있었는데, 혹시 데이비스도 비슷한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닐까.


'가짜 마르탱 게르'와 전청조 모두 뛰어난 말재주와 대담함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했고, '마르탱 게르의 아내'와 남현희 역시 그 행동에 여전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 "자기 형성"과 "여성의 주체성"을 끼워 맞추기는 어려워 보인다.


데이비스를 겨냥한 핀레이의 비판은 역사가의 서술이 어디까지나 사료가 보여주는 곳까지만 가야 한다는 뜻이므로 지당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긴즈부르그의 지적처럼 역사와 소설의 경계가 항상 뚜렷히 정해진 것까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는 충분히 준수될 필요가 있는 기준처럼 보인다.


물론 데이비스는 "절름발이에 대하여"라는 답변에서 핀레이의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해석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제목의 유래이자 마르탱 게르에 대한 언급이 수록된 에세이에서 몽테뉴는 오히려 단언을 삼가고 가능성을 열어두라 권고한다는 것이다.


데이비스의 문제는 거꾸로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무리한 단언으로 끝났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대신 마지막까지 몽테뉴처럼 '가능성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단언 못한다'는 회의적 태도를 유지했거나, 차라리 카리에르와 비뉴가 훗날 시나리오를 개작한 것처럼 '소설'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아이러니한 점은 데이비스의 저서가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또 하나의 권위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스페인사 전문가인 존 H. 엘리엇이 마르탱 게르(Martin Guerre)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보다 유명해진 것이야말로 역사학계의 왜곡된 현실이라며 꼬집었을 정도니까.


물론 졸지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행방불명자 겸 오쟁이 진 남편이 된 것이 '진짜' 마르탱 게르의 잘못까지는 아니듯이, 졸지에 저 위대한 종교개혁가의 명성을 뛰어넘는 명성을 획득한 것 역시 마르탱 게르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루터의 명성 역시 게르보다는 더 오래 갈 것이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뒤 기록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에서 극소수의 사료에만 의거해, 21세기 한국에서 "자기 형성"과 "여성의 주체성"의 대표 사례로서 전청조와 남현희가 거론되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살짝 황당할 것도 같다. 물론 그것이 역사의 본질이자 한계라면 할 말은 없지만...



[*] 드라마 <옥씨부인전>은 딱히 보고 싶은 마음까지 없어서 그냥 넘겼는데, 가만 보니 4월에 간행 예정인 대본집인 2월 말 현재 예약 판매로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와 있다. 요즘에는 인기 영화나 드라마는 대본집 간행과 구매가 활발한 모양인데, 예전부터 희곡을 종종 구입했던 나귀님으로선 신기하기도 하고 솔직히 부럽기도 한 일이다. 그만큼 영상물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것도 결국 반짝 인기에 불과한 것일까. 어쨌거나 시간이 더 지나 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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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바깥양반과 산책하다가 옆동네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과 마주쳤는데, 푸러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하얀 놈이 갑자기 나를 보고 미친 듯이 짖어대는 거다. 내가 먼저 위협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지랄발광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황당했고, 그걸 보고 제지하기는커녕 멀거니 서 있는 개주인의 행동 역시 황당했었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한동안 그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 까닭은 '그 개가 도대체 뭘 보고 그랬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내 뒤에 다른 뭔가가 없었으니 분명 나를 보고 짖은 것일 터인데,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 개의 눈에는 똑똑히 보인 걸까?


어쩌면 이런 의문이 든 까닭은 그보다 얼마 전에 읽은 J. D. 베레스포드의 단편 "인간 혐오"의 내용 때문일 수도 있다. 화자는 우연히 어느 외딴 섬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 남자는 사람의 본성을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 때문에 인간 혐오를 느낀 끝에 사회를 떠나 혼자의 삶을 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남자는 누군가를 어깨 너머로 돌아보면 상대의 본성을 단숨에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게 파악한 주위 사람들의 인성이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뿐이라서 자연히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한 화자가 자기 인성도 한 번 감정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양하던 남자도 화자가 배를 타고 떠나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기로 약속한다.


예정된 시간이 되어 화자가 섬을 떠나는 배에 올라타기 직전, 육지에 남아 있던 남자가 약속대로 멀리서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데... 곧이어 그의 얼굴에 지독한 혐오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바보처럼 혐오와 질색의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예전에 어느 천치 꼬마가 토하기 직전에 지었던 표정에서 이와 비슷한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화자는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배에 올라타 그곳을 떠났으며,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줄곧 떨치지 못했지만 차마 다시 가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도대체 남자는 화자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점잖은 외모 속에 과연 어떤 역겨운 악덕이며 단점이 숨어 있었던 걸까?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의 격언이야말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임을 자각했다고 주장했는데, 베레스포드의 단편을 읽고 나면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을 넘어서서 자칫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이 될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단편 속 화자는 마치 누명이라도 쓴 듯한 투로 그 신비한 성격 판별법의 진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실제로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본인 외에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화자는 자신의 평소 됨됨이며 마음가짐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뭔가 찔려서 애써 변명을 내놓는 것은 아닐까?


최근에는 MBTI인지 TSMC인지 하는 성격 유형 판별법이 유행한다지만, 자기 성격이 어떤지를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미 아는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서, 또는 다른 누군가의 더 권위 있는 목소리로 확인하고 싶어서 알아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타로나 사주처럼 '재미'로 가장한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성을 가감 없이 직면하게 된다면, 십중팔구 "인간 혐오"의 화자처럼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까. "늑대 눈썹"인지 "호랑이 눈썹"인지 하는 유사한 민담도 있다. 제목에 나온 마법 아이템을 이용해 사람을 쳐다보면 외양 너머 실체가 드러나는데, 주인공이 길에 나가 검증해 보니 진짜 사람은 없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뿐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본인이건 타인이건 간에 사람의 성격을 미리부터 정확히 판단하는 재능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 수 있겠다. "인간 혐오"와 "늑대 눈썹"의 주인공처럼, 또는 "젊은 굿맨 브라운"처럼 주위 사람들의 실체에 실망한 나머지 불신과 혐오에 빠져 우울하게 살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사회를 떠나 고립을 택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령 당혹감을 느꼈더라도 더 이상은 굳이 캐묻지 않기로 작정했던 "인간 혐오"의 화자처럼, 마음 한편으로는 찜찜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나도 완벽하지 않지만 상대방도 완벽하지 않으니, 그냥 모른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MBTI니 TSMC니 하는 성격 유형을 새로운 세대의 신주단지처럼 툭하면 들먹이는 행동이 무의미해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검사는 이렇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저런 쪽이더라'는 식의 변명이 종종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맹신과 부정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셈이니, 이것이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닐지.


결국 '나는 누구일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은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젊어서는 모를 수도 있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모른다고 행세하는 것은 기만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나이 들며 겸손해진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한계를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며, 굳이 바란 적도 없었던 그런 앎은 하루가 다르게 갱신되므로...




[*] 위에 언급한 "인간 불신"은 <세계 괴기 소설 걸작선>(전3권, 유인경 옮김, 자유문학사, 2004)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다. 기존의 유사한 단편집과 중복된 작품도 더러 있지만, 여기에만 수록된 것들도 있으니 공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1권

유령 저택 (불워 리턴)

에드먼드 옴 경 (헨리 제임스)

포인터 씨의 일기 (M. R. 제임스)

원숭이 손 (W. W. 제이콥스)

위대한 목신 (아서 매컨)

유충 (E. F. 벤슨)

비서의 기이한 이야기 (알제논 블랙우드)

염천 (W. F. 하비)

녹차 (조지프 셰리던 르 파누)


2권

생각하는 식물 (존 콜리어)

돌아온 소피 메이슨 (E. M. 델라필드)

배가 지나가지 않는 섬 (L. E. 스미스)

울부짖는 해골 (F. M. 크로포드)

스레드니 바쉬탈 (사키)

늑대 인간 (프레드릭 매리엇)

주택 임대 (헨리 커트너)

인간 불신 (J. D. 베레스포드)

난쟁이의 저주 (E. L. 화이트)

먼 훗날 (에디스 와튼)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피츠제임스 오브라이언)


3권

스페이드의 여왕 (알렉산드르 푸슈킨)

요물 (암브로스 비어스)

클라리몽드 (테오필 고티에)

신호원 (찰스 디킨스)

빌 부인의 망령 (다니엘 디포)

라파치니의 딸 (너새니얼 호손)

폐가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성찬제 (아나톨 프랑스)

환상의 인력거 (러디어드 키플링)

이층 침대 (프란시스 마리온 크로포드)

라자루스 (레오니드 니콜라이비치 안드레프)

유령 (기드 모파상)

유령의 이사 (프랜시스 리처드 스톡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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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효율부(DOGE) 장관에 임명된 일론 머스크가 국제개발처(USAID)를 공개 비판했다고 하더니만, 급기야 홈페이지 접속 중단, 사무실 폐쇄, 출근 금지가 이어지며 조만간 조직 자체가 폐지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모양이다.


국제개발처는 1961년에 케네디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립된 미국의 정부 기관으로 이름 그대로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 원조 사업을 담당한다. 제3세계의 재난과 빈곤 구제를 중심으로 현재 100여개 이상의 국가를 지원 중이며, 직원이 1만 명에 연간 예산만 65조 원에 달한다.


물론 인도주의적인 외양과 달리 실제로는 해외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선전 및 공작 기구라는 비판도 줄곧 있었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관인데 트럼프와 머스크는 "범죄 조직"에 "과격 좌파"라며 축소를 추진한다니 의아한 일이다.


그간 USAID에서 팔레스타인 등을 지원했던 것이 표면상의 이유로 보이고, 트럼프가 추구하는 미국우선주의 정책에 따라서 불필요한 해외 지출을 줄인다는 맥락과도 일치하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하여 러시아와 중국만 웃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머스크는 예산 절감과 공무원 감축을 빌미로 물 만난 고기마냥 날뛰면서 재무부며 교육부와도 갈등을 일으키는 모양인데, 과거 "빨갱이 사냥"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기고만장한 나머지 군대까지 건드렸다가 역관광 당한 매카시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USAID라는 기관명을 오랜만에 들으니, 예전에 헌책방에 돌아다니던 영어 원서의 면지에 종종 붙어 있던 "악수 마크"가 혹시 그 상징 아닌가 싶었다. 구글링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위키피디아의 USAID 항목에 성조기 바탕에 악수하는 두 손의 문장(紋章)이 나온다.


종교학자 정진홍의 회고에서도 미국의 원조를 통해 들어온 영어 원서에 이 마크가 붙어 있더라는 증언이 있는데, 비슷한 연배의 김열규나 유종호 같은 학자들 역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문학 잡지를 통해 최신 연구 동향을 접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정확히 45년 전입니다. (...) 저는 아직 그 책을 기억합니다. 표지를 열면 미국의 원조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미국기 문장을 바탕으로 두 손이 맞잡은 그림이 있는 우표 네 배쯤 크기의 딱지가 붙어 있던 The Modern Library Giant 판."(<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117쪽)


나귀님이 가진 영어책 중에서도 "악수 마크"가 붙은 것이 있는데,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구입한 브라우닝 시 전집(The Poetical Works of Robert Browning.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05; rep. 1957)이다. 물론 USAID라는 명칭은 없지만 "악수 마크"임은 분명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번역본이 없는 브라우닝의 희곡 <피파가 지나간다>를 바로 이 책으로 완독했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니 / 세상이 온통 평안하도다!"라는 찬탄으로 마무리되는 "피파의 노래"가 나오지만, 사실 이 희곡 자체는 정반대로 상당히 어둡고 "불편한" 내용이다.


주인공 피파는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로 매년 딱 하루뿐인 휴일을 맞이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가난해도 긍정적인 주인공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이웃들 역시 자기처럼 보람차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사실 그들은 시커먼 속내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간통과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심지어 피파의 유산을 강탈한 권력자는 이 소녀를 유곽에 팔아치울 계획까지 세운다!) 저지르거나 모의하는 사람들은 피파가 지나가며 부르는 노래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소녀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든다.


"피파의 노래"는 워낙 경건하고 긍정적인 내용이다 보니 <빨간 머리 앤>의 결말에도 인용되는 등 기독교인이 좋아하는 시로 유명한데, 사실은 주위의 음모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피파의 순진함을 강조함으로써 통렬한 아이러니를 드러내려는 저자의 의도가 깃든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피파가 지나간다>의 내용을 언급한 글 대부분에서는 '순진한 소녀가 이웃을 회개시킨다'라고만 설명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초판 간행 당시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에두른 해석에 가깝고, 지금에 와서는 그 암울함과 모호성이 더 주목받는 듯하다.


1950년대 말로 짐작되는 그때 고학생이던 정진홍은 과외로 번 돈의 절반을 털어서 USAID 마크가 붙은 <모비 딕> 원서를 구입했다고 회고한다. 구체적인 설명까지는 없지만 정황상 원조품으로 국내에 무료로 배포되었다가 헌책방으로 흘러든 영어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었을까.


구글링해 보니 한국전쟁 직후 미국이 보낸 밀가루 등의 원조 식량에도 이 마크가 붙어 있어서, 옛날 양반들 중에는 이 마크를 식품 회사 상표로 오해하고 "악수표"로 부른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식량부터 서적까지 한국과도 적지 않은 인연을 맺은 USAID라고 봐야 할 듯하다.


얼마 전에 송승환의 유튜브를 보니 가수 민해경이 나와 인터뷰한 내용 중에 과거 강남의 에이아이디(AID) 아파트에 살았다고 회고한 부분이 있던데, 이것 역시 과거 USAID의 원조로 지었음을 아예 이름에다가 밝혀놓은 이른바 "AID 차관 아파트" 가운데 하나였다고 알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일 수밖에 없지만, 누군가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굶주림을 채워준 식량과 서적 같은 구체적인 원조의 사례를 보고 들은 나귀님으로서는 USAID를 백해무익한 조직으로 몰고 가는 것 역시 선뜻 수긍이 가는 조치는 아니다.


그런데도 의견 수렴이나 여론 청취 같은 절차 없이 전격적으로 USAID 폐지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니 놀랄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권 교체 직후 기관장 물갈이며 조직 개편 같은 칼바람이 부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한데, 트럼프에 머스크를 "곁들인" 탓인지 유난히 매운 맛이다.


아직까지는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살아 있는 미국이다 보니, 이것 역시 관세 폭탄이며 이민자 단속 같은 트럼프 정권의 여러 겁박 시도처럼 결국은 흐지부지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의 무모한 비상 계엄 시도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자충수임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간 민주당 정권 하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제도며 정책을 하루아침에 뒤집고 싶어 하는 트럼프이지만, 누군가의 지적처럼 이렇게 일관성 없는 깜짝 조치가 결과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에 오히려 불리하리라는 점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점은 현재 대립 중인 두 기관의 이름 약자가 DOGE와 USAID이다 보니 졸지에 "강쥐"(doge)와 "원조"(aid)의 다툼이 되어 버렸다는 거다. 세인트버나드처럼 조난자를 구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강아지도 있었다던데 어째서 미국의 상황은 이처럼 "개판 5분 전"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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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막바지에 알라딘 중고샵에 <국역 요사> 상권과 하권이 있기에 구입했다. 사실은 "있기에"와 "구입했다" 사이에 "잠시 고민하다가"라는 첨언이 들어가야 맞겠다. 권당 정가가 6만 원이나 하는 비싼 책이다 보니, 중고가가 절반 가까이로 책정되었어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가격이며, 솔직히 당장 필요한 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고로는 원체 보기 드문 물건에, 지난번에 알라딘 서울대입구점에서인가 달랑 중권만 구입해 놓은 상태였고, 최근에는 처세의 달인 풍도의 전기를 읽으면서 요 태종과의 일화도 ("부처도 할 수 없는 일을 전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간언해 요나라 군대의 약탈을 중단시켰다) 접했으니, 고민 끝에 지르기로 했다.


애초에 구입을 망설였던 이유 중에는 완질이 있을 때에 일부만 빼서 구입해서는 안 된다는 예전 '오프라인' 헌책방 시절의 국룰(?)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 <국역 요사>는 낱권 구입도 가능하도록 등록되었으니 셋 가운데 둘만 가져가도 잘못은 아니겠거니 싶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남은 한 권도 금방 팔린 듯하다.


지난번 서울대입구점에서도 <국역 요사> 중권을 보고 혹시 상하권은 없나 확인했더니, 검색은 되지만 재고는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누가 사간 직후인 듯했다. 혹시 지난번 구매자도 전3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상하권만 구입했다가, 뒤늦게야 실수를 깨닫고 이번에야 중권을 구입해서 나귀님처럼 완질을 맞추게 된 것은 아닐지.


<요사>는 원나라 때 저술된 기전체 역사서로, <사기>부터 <명사>까지 중국의 역대 정사를 통칭하는 "24사" 가운데 하나다. 제목 그대로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219년(907-1125) 역사를 서술했으며, 본기 30권, 지 32권, 표 8권, 열전 45권, 국어해 1권으로 총 116권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원문 포함 B5 판형으로 총 2천 페이지이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삼국과 고려 관련 지명과 사항을 다수 수록하고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는 모양이지만, 애초에 편찬 기간이 짧기 때문에 내용의 흠결이 많아서 사료 가치에 대한 의문도 종종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심지어 번역 과정에서도 일부 사학자가 반대 의견을 제시해 난처했었다는 후일담이 역자후기에 나와 있었다.


지금도 <요사>를 이용한 연구가 줄줄이 나오는 상황에서, 완벽하지 못한 사료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 역자의 논리인데, 우리에게는 가장 요긴할 법한 "이국외기" 중 "고려" 편만 해도 <고려사> 등의 사료와 맞지 않는 내용이 상당수라서 일일이 역주로 바로잡고 있으니 골치가 아프기는 해 보인다.


나귀님은 구입 직후 "본기" 중에서 태조와 태종(실제로 풍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항목을 읽어보았고, "열전" 중에서 뒷부분의 문학, 능리, 탁행, 열녀, 방기, 영관/환관, 간신, 역신, 이국외기 항목을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거란어 어휘를 설명한 "국어해" 항목까지 읽어보았는데, 무미건조한 사실 나열 위주라 별 재미는 없었다.


역사통 선배의 말에 따르면 "24사" 중에서는 처음 네 가지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정도만 읽을 만하고 나머지는 그냥 그렇다더니만, <요사>의 경우만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다만 호기심 많은 나귀님 입장에서는 그저 이름만 알고 있었던 역사서가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4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30년 전 봉천동 헌책방 삼우서점에서 파란 천으로 장정한 축쇄영인본을 구경했을 때였다. <사기> 완역본조차 나오기 전이라 "열전"만 겨우 읽었을 때였으니, 그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더 많아 보이는 역사서의 육중한 외관 앞에서 정말이지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박영문고로 나온 세 권짜리 <십팔사략>을 우연히 구해서 읽어보니, 중국 정사 "24사" 가운데 <사기>부터 <신오대사>까지 "18사"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기에 다시 한 번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십팔사략>은 중국보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에서 더 인기였다는데, "24사" 자체가 귀한 변방에서 일종의 대용품이었던 듯하다.


가끔은 낯선 헌책방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니 똑같은 장정의 "24사" 우리말 번역본이 있기에 반색하며 집어드는 (그러나 어째서인지 항상 책을 펼쳐보기 직전에 깨어 버리는!) 꿈을 꾼 적도 있었으니,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새 "24사" 가운데 3분의 1쯤은 번역서가 나와 있다.


<사기>는 까치(1994-1995)에서 전7권(완역은 아니라고 한다)으로 간행된 것을 시작으로, 김원중이 민음사(2015)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고, 신동준이 위즈덤하우스(2015)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으며, 다른 몇몇 출판사에서도 완역을 목표로 삼아 부분 번역서를 내놓았다고 알고 있다. "열전" 등의 부분 번역서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한서>는 진기환이 명문당(2016-2021)에서 전15권으로 완역하고, 이한우가 21세기북스(2020)에서 전10권으로 완역했다. <후한서>는 역시나 진기환이 "본기"와 "열전"만 명문당(2018-2019)에서 전10권으로 번역했고, 어째서인지 "본기"만 번역한 것도 나와 있다. <한서>와 <후한서> 모두 "열전"만 선역한 것들은 예전부터 있었다.


<삼국지>는 김원중이 신원문화사(1994)에서 전7권으로 완역하고, 나중에 민음사(2007)에서 전4권으로 재간행했다가, 지금은 휴머니스트(2018)에서 전4권으로 재간행했다. 역시나 진기환이 명문당(2019)에서 전6권으로 완역했으며, <연의>의 인기 때문인지 그 외에도 전자책이나 주문 제작으로 간행된 번역본도 다수 있는 모양이다.


<수서>는 지만지(2020-2023)에서 전13권으로 완간했지만, 원체 작은 판형에 값비싼 시리즈라서 분량은 6천 페이지에 가깝고 가격은 50만 원에 가깝다. <요사>는 단국대학교출판부(2012)에서 전3권으로 완역했고, <금사>도 단국대학교출판부(2016)에서 전4권으로 완역했다. 결국 24사 가운데 7종이 전체, 또는 일부 번역된 셈이다.


비록 일부 번역서에 대해서는 오역 비판도 적지 않은 듯하지만, 어쨌거나 나귀님 같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감지덕지일 수밖에 없다. 물론 <요사>의 경우에도 실제로 읽어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흥미진진하거나 유익하지는 않다는 점이 살짝 의외이기는 했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은 중국 정사들도 읽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24사"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십팔사략>이며 <자치통감> 같은 번역서를 통해서 중국사의 대강을 파악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지 오래이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많으니 씁쓸한 일이다. 물론 그 사이에 현직 대통령 탄핵 심판은 세 번, 전직 대통령 구속은 네 번, 전직 대통령 자살도 한 번이란 사실만큼 씁쓸하기야 할까마는.


<국역 요사>에서 굳이 단점을 지적하자면 각주 색인은 있지만 본문 색인이 없다는 점이다. 마침 "국어해"에서 뱀의 말을 알아듣는(파셀텅!) "신속고"라는 인물이 언급되었기에 관련 본문을 찾아보려 했지만 색인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편집 구조상 전체 색인 작성이 어려워서라고 설명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대학 출판부에서 내놓은 학술서에 걸맞게(?)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역자후기에서까지 "요나를 연구"한다는 오타가 나왔으니,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민망하지 않겠나. 죄인이 감옥에 "갖혀" 있었다는 오타도 나온 것을 보면, 단지 교정만이 아니라 번역자의 우리말 실력 자체부터 문제인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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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출판사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으니, 몇 년 전부터 또 하나 짜증났던 이야기를 해 보자면, 최근 들어 신생 소형 출판사가 늘어나면서 나귀님 눈에는 영 생소한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는데, 그중에서도 몇 군데는 이름이 어쩐지 서로 엇비슷해 보여 헛갈리더라는 거다.


특히나 고약한 것은 "00의 00"라는 형식의 출판사 이름인데, 그리 흔치 않을 듯하지만 의외로 여러 개이고, 표지 디자인이나 출판 성향까지도 엇비슷해 보이다 보니, 나귀님 입장에서는 더 혼동하기 쉬워 보인다. 바로 "사월의책", "오월의봄", "봄날의책", "남해의봄날"이라는 출판사이다.


우선 "사월의책"은 철학과 사회과학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이반 일리치 전집"과 "악셀 호네트 선집"이다. 최근에 나귀님이 구입한 리처드 로티의 책도 여기서 나왔다. 물론 가장 유명한 책이라면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의 회고록이지만.




"오월의봄"도 철학과 사회과학 위주로 간행하다가 지금은 전자보다 후자에 더 열심인 듯한데, 하나같이 시의적인 내용이니 의외로 수명이 짧을 수 있어 보인다.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일레인 스캐리와 사라 아메드는 여전히 나오지만, 나귀님이 좋아하는 토니 주트 책이 절판이라니 아쉽다.




"봄날의책"은 문학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요즘 들어서는 해외 여성 작가에 집중하는 모양이다. 마니, 아랍, 북극, 침묵 등 초기에 나온 깔끔한 표지의 기행 에세이 시리즈가 계속되기를 바랐던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후의 행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출판사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남해의봄날"은 문학, 그중에서도 에세이 위주로 간행하는 모양인데, 특이하게도 경남 통영에 있는 지방 출판사라고 한다. 아쉽게도 나귀님 취향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듯 보여서 지금껏 구입한 책도 하나 없고, 아마 앞으로도 구입할 만한 책은 딱히 없을 듯하다. 그냥 헛갈리기만 할 뿐.




물론 앞서의 글에서 밝혔듯 閣, 館, 堂, 院, 社로 끝나는 옛날 출판사 이름도 항상 서로 구분하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역시나 앞서의 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름부터 진부한 데다가 출판 성향이나 표지 디자인 등에서 뚜렷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쯤 되면 나귀님은 쌍팔년도에도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을 헛갈렸을 만한 사람이 아니냐는 의문도 일각에서 제기될 법한데,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종종 헛갈리곤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과지성" 특유의 책등 "빨간 띠"가 출판사의 정체성을 보완하는 중요한 장치였던 거다.


똑똑한 작가인 노라 에프런도 역시나 "00의 00"라는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 제목을 (다시 확인해 보니 <운명의 역전>이다!) 기억 못해 헤맨 적이 있었다고 썼었으니, 이건 단순히 지능이나 노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애초의 제목 짓기 과정에서 창의성의 문제도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물론 출판사만 탓할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어제 우연히 네이버 연예 뉴스에서 최신 드라마 인기 순위를 확인해 보니 <독수리 5형제를 부탁해>와 <모텔 캘리포니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창의성 부족은 비단 출판계뿐만이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만연한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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