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바깥양반과 산책하다가 옆동네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과 마주쳤는데, 푸러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하얀 놈이 갑자기 나를 보고 미친 듯이 짖어대는 거다. 내가 먼저 위협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지랄발광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황당했고, 그걸 보고 제지하기는커녕 멀거니 서 있는 개주인의 행동 역시 황당했었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한동안 그 기억을 곰곰이 떠올려보게 된 까닭은 '그 개가 도대체 뭘 보고 그랬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내 뒤에 다른 뭔가가 없었으니 분명 나를 보고 짖은 것일 터인데,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 개의 눈에는 똑똑히 보인 걸까?


어쩌면 이런 의문이 든 까닭은 그보다 얼마 전에 읽은 J. D. 베레스포드의 단편 "인간 혐오"의 내용 때문일 수도 있다. 화자는 우연히 어느 외딴 섬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 남자는 사람의 본성을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 때문에 인간 혐오를 느낀 끝에 사회를 떠나 혼자의 삶을 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남자는 누군가를 어깨 너머로 돌아보면 상대의 본성을 단숨에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게 파악한 주위 사람들의 인성이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뿐이라서 자연히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한 화자가 자기 인성도 한 번 감정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양하던 남자도 화자가 배를 타고 떠나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기로 약속한다.


예정된 시간이 되어 화자가 섬을 떠나는 배에 올라타기 직전, 육지에 남아 있던 남자가 약속대로 멀리서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데... 곧이어 그의 얼굴에 지독한 혐오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바보처럼 혐오와 질색의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예전에 어느 천치 꼬마가 토하기 직전에 지었던 표정에서 이와 비슷한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화자는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배에 올라타 그곳을 떠났으며, '그는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줄곧 떨치지 못했지만 차마 다시 가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도대체 남자는 화자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점잖은 외모 속에 과연 어떤 역겨운 악덕이며 단점이 숨어 있었던 걸까?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의 격언이야말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임을 자각했다고 주장했는데, 베레스포드의 단편을 읽고 나면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을 넘어서서 자칫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이 될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단편 속 화자는 마치 누명이라도 쓴 듯한 투로 그 신비한 성격 판별법의 진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실제로 그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본인 외에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화자는 자신의 평소 됨됨이며 마음가짐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뭔가 찔려서 애써 변명을 내놓는 것은 아닐까?


최근에는 MBTI인지 TSMC인지 하는 성격 유형 판별법이 유행한다지만, 자기 성격이 어떤지를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미 아는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서, 또는 다른 누군가의 더 권위 있는 목소리로 확인하고 싶어서 알아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타로나 사주처럼 '재미'로 가장한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성을 가감 없이 직면하게 된다면, 십중팔구 "인간 혐오"의 화자처럼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까. "늑대 눈썹"인지 "호랑이 눈썹"인지 하는 유사한 민담도 있다. 제목에 나온 마법 아이템을 이용해 사람을 쳐다보면 외양 너머 실체가 드러나는데, 주인공이 길에 나가 검증해 보니 진짜 사람은 없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뿐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본인이건 타인이건 간에 사람의 성격을 미리부터 정확히 판단하는 재능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 수 있겠다. "인간 혐오"와 "늑대 눈썹"의 주인공처럼, 또는 "젊은 굿맨 브라운"처럼 주위 사람들의 실체에 실망한 나머지 불신과 혐오에 빠져 우울하게 살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사회를 떠나 고립을 택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령 당혹감을 느꼈더라도 더 이상은 굳이 캐묻지 않기로 작정했던 "인간 혐오"의 화자처럼, 마음 한편으로는 찜찜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나도 완벽하지 않지만 상대방도 완벽하지 않으니, 그냥 모른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MBTI니 TSMC니 하는 성격 유형을 새로운 세대의 신주단지처럼 툭하면 들먹이는 행동이 무의미해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검사는 이렇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저런 쪽이더라'는 식의 변명이 종종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맹신과 부정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셈이니, 이것이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닐지.


결국 '나는 누구일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은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젊어서는 모를 수도 있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모른다고 행세하는 것은 기만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나이 들며 겸손해진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한계를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며, 굳이 바란 적도 없었던 그런 앎은 하루가 다르게 갱신되므로...




[*] 위에 언급한 "인간 불신"은 <세계 괴기 소설 걸작선>(전3권, 유인경 옮김, 자유문학사, 2004)에 수록된 것으로 읽었다. 기존의 유사한 단편집과 중복된 작품도 더러 있지만, 여기에만 수록된 것들도 있으니 공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1권

유령 저택 (불워 리턴)

에드먼드 옴 경 (헨리 제임스)

포인터 씨의 일기 (M. R. 제임스)

원숭이 손 (W. W. 제이콥스)

위대한 목신 (아서 매컨)

유충 (E. F. 벤슨)

비서의 기이한 이야기 (알제논 블랙우드)

염천 (W. F. 하비)

녹차 (조지프 셰리던 르 파누)


2권

생각하는 식물 (존 콜리어)

돌아온 소피 메이슨 (E. M. 델라필드)

배가 지나가지 않는 섬 (L. E. 스미스)

울부짖는 해골 (F. M. 크로포드)

스레드니 바쉬탈 (사키)

늑대 인간 (프레드릭 매리엇)

주택 임대 (헨리 커트너)

인간 불신 (J. D. 베레스포드)

난쟁이의 저주 (E. L. 화이트)

먼 훗날 (에디스 와튼)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피츠제임스 오브라이언)


3권

스페이드의 여왕 (알렉산드르 푸슈킨)

요물 (암브로스 비어스)

클라리몽드 (테오필 고티에)

신호원 (찰스 디킨스)

빌 부인의 망령 (다니엘 디포)

라파치니의 딸 (너새니얼 호손)

폐가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성찬제 (아나톨 프랑스)

환상의 인력거 (러디어드 키플링)

이층 침대 (프란시스 마리온 크로포드)

라자루스 (레오니드 니콜라이비치 안드레프)

유령 (기드 모파상)

유령의 이사 (프랜시스 리처드 스톡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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