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제주도 노인네가 보낸 한라봉인지 천혜향인지, 하여튼 왕귤 한 박스를 바깥양반이 받아 왔다기에 큰길까지 나가서 카트에 싣고 달달대며 걸어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소리를 지른다. 뒤를 돌아보니 웬 할아버지 한 분이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가리키며 우리를 쳐다보고, 그제야 바깥양반이 놀라서 달려가 주워 오면서 노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과일 상자를 실은 김에 바깥양반이 들고 있던 에코백 가운데 하나도 실어서 끌고 가던 중이었는데, 카트가 흔들리다 보니 옷가지를 넣어 둔 비닐 봉지 가운데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우리가 모르고 그냥 가니까, 마침 뒤에 따라오던 노인이 그걸 보고 알려주려고 소리를 지른 모양이다. 젊은이라면 주워서 따라왔겠지만, 그게 어려우니 소리를 지른 게 아닐까.


비닐봉지를 에코백에 도로 넣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게 입구를 여미고, 카트를 정리해서 다시 끌고 가다 보니, 방금 전의 그 노인이 저만치 앞에서 휘청휘청 걸어간다. 좁은 길이다 보니 쌩하니 앞질러 가기도 민망해서 한동안 천천히 따라가는데, 등산복에 운동화 차림이나 어디 운동이라도 다녀오시는 모양이지만, 연세가 많다 보니 걸음도 가볍진 않아 보인다.


문득 왕귤이나 몇 개 드릴까 싶어 바깥양반에게 물어보니 선뜻 그러자고 한다. 두 개 꺼내서 바깥양반에게 건네주었더니, 어느 정도 멀어진 노인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아, 마침 길이 넓어진 곳에서 과일을 건네드린다. 노인도 처음에는 안 받겠다며 손사래친다. 고마워서 드리는 거랬더니만 그럼 하나만 받겠다는 걸 실랑이 끝에 다 드리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물건을 덕분에 찾게 되었으니 작게나마 고마움의 표시를 하려는 것인데 뭘 그렇게 한사코 거절하시나 싶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귀님도 예전에 한 번은 근처에서 어느 초딩이 하는 비슷한 행동을 한사코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바깥양반과 함께 세탁소에 가려고 또 다른 골목을 지나가는데 어린애들 여러 명이 모여 놀고 있었다.


그중 제일 큰 여자아이를 여럿이 에워싸고 뭘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보고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큰애가 선뜻 다가와서 뭔가를 내밀며 도와달라고 한다. 가만 보니 애들 먹는 사탕인지 비타민인지를 담은 플라스틱 통인데, 너무 꽉 닫혔는지 아니면 아이들이 함부로 못 열게 하는 무슨 장치가 되어 있었는지 열지 못해서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바깥양반이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손쉽게 열어 건네주자 아이들이 환호하는데, 맹랑한 꼬마가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것'이라며 별사탕처럼 보이는 알갱이 두 개를 꺼내 바깥양반에게 건넨다. 처음에는 황당해 하면서 괜찮다고 했지만, '도와주셨으니까 보답을 해야 한다'며 의외로 의젓한 여자아이의 태도가 재미있었는지 결국 바깥양반도 받아 먹었다.


곧이어 꼬맹이가 사탕을 손바닥에 얹어서 나한테도 다가오기에, '이 나이에 뭔 애들 사탕까지 빼앗아 먹겠나' 싶어서 손사래치고 뒤돌아 걸어오는데, 꼭 받아야 한다며 졸졸 따라오기까지 하니 어쩔 수 없다 싶어서 결국 두 알 받아먹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원체 작고 밍밍했던 사탕 맛은 금세 잊어버렸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재미있는 사건으로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후에도 종종 세탁소를 오가면서 그 꼬마를 만났던 장소에 도착하면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게 된 것도 그래서이고, 그게 벌써 십수 년 전이니 지금은 그 맹랑한 녀석도 어엿한 아가씨가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버진'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느새 그 지역도 재개발 구역으로 묶여서 골목은 막히고 주택은 헐려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니 뭔가 아쉽다.


사실 그냥 고맙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에 굳이 왕귤이라는 선물까지 동원한 까닭도 역시나 재미 때문이었다. 뭐랄까, 가끔은 이런 일도 있어야 재미있지 싶은 생각이라고나 할까. 별 것 아닌 사탕 두 개가 우리 부부에게는 잊지 못할 좋은 추억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역시나 별 것 아닌 왕귤 두 개가 저 노인에게도 비슷한 추억이 되었으면 싶어서.


물론 그렇다고 심성이 곱거나 순진무구한 나귀님까지는 아니다 보니, 딱 여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은근 걱정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좋은 일을 했으니, 혹시 셜리 잭슨의 단편 소설에서처럼 ("평범한 날에 땅콩을 들고"라는 작품인데 <제비뽑기>에는 없는 듯하다) 내일은 또 나쁜 일을 해서 상쇄 작용을 일으켜야 하나 싶은 의문이 생긴 까닭이다.


그 작품에서는 어느 화창한 날에 산책을 나간 신사가 처음 본 사람에게도 연이어 배려와 선행을 베풀고, 심지어 단지 잘 어울릴 듯하다는 이유로 생판 초면인 남녀를 중매하고 데이트 비용까지 건네준다. 이렇게 훈훈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을 맞이하는 부인이 오늘 하루 자기가 범한 악행들을 열거하더니, 내일은 다시 당신 차례라고 상기시킨다.


셜리 잭슨의 작품 속 부부가 하루씩 역할을 바꿔 가면서 소소한 선행과 악행을 거듭하는 것과 유사하게, 김용의 무협 소설에는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악한 아내와 그렇게 다친 사람을 도로 살려내는 의사 남편도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중팔구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만든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귀님이 사소한 선행으로 좋아진 기분을 직접 악행으로 상쇄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 집에 다 왔을 즈음 옆집 아가씨가 쓰레기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와 우리집 쪽에 갖다 놓더니, 이쪽을 흘끗 쳐다보고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훈훈해진 마음이 불과 십 분만에 싸늘히 식어버렸으니, 세상의 선과 악은 자동으로 균형을 맞추나 싶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층간 소음 때문에 윗집과 갈등이라지만, 단독주택에 살면 쓰레기 문제로 옆집과 갈등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집 앞에 놓으면 되는데 굳이 남의 집 앞에 쓰레기 봉지를 갖다 놓는 것부터 시작해서, 담배꽁초와 음식물 쓰레기는 물론이고 각종 폐기물까지도 무단 투기하는 경우가 빈번하니, 정말 헉핀의 말마따나 인간이 싫어지게 된다.


다음날 내다 보니 '폐기물 쓰레기는 전용 봉지에 담아서 내놓지 않으면 수거 불가'라는 환경미화원의 경고문이 비닐봉지에 적혀 있었다. 그래도 이웃끼리 얼굴 붉히는 일은 없어야지 하는 생각에 (물론 이미 몇 번 싸워 보았지만 실효가 없었던 것도 증명되었으므로) 꾹꾹 참고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오랜만에 또 찾아가서 따져야 하려나 싶어서 심란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비닐봉지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결국 수거되었는지, 아니면 배출자가 도로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옆집 아가씨가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쓰레기를 도로 가져가서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다시 배출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만 탄핵 심판의 각종 궤변에 지친 나귀님도 인간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우리나라에 번역된 셜리 잭슨의 작품에 관해서는 10년 전쯤에 한 번 정리한 바 있다. 그중 "제비뽑기"와 "소금기둥"은 새로 간행된 단편집 <제비뽑기>에 수록되었지만, 다음 몇 가지 작품은 아직 새로운 번역이 나오지 않은 듯해서 참고 삼아 적어본다.


A.  <현대미국문학전집>(전6권, 시사영어사, 1971) IV권 수록 작품:


(1) "버스"(The Bus)

(2) "어느 날 땅콩을 가지고"(One Ordinary Day, With Peanuts, 1955)

(3) "생일 파아티"(Birthday Party, 1963)

(4) "아름다운 집"(The Lovely House)


B. <에드가 상 수상 작품집 II>(정태원 편역, 명지사, 1993 2쇄) 수록 작품:


(5) "악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Evil,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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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가 재간행된 모양이다. 여전히 최승자가 번역자로 나와 있기는 한데, 오랜 투병 이력을 감안해 보면 이번에 추가된 공역자가 예전 번역문을 대조하고 수정하는 정도의 손질만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예이츠의 말과 아즈텍 신 설명을 마치 한 문단인 것마냥 오기했던 서두의 인용문 두 가지를 깔끔하게 구분한 것이 그 한 가지 예로 보이고.


원제는 "자살의 연구"가 아니라 "잔인한 신"인데, 방금 언급한 예이츠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서두에는 "우리들 이후의 잔인한 신"으로 나왔는데, 본문에 인용된 인용문 전체의 맥락상 "우리 다음에는 잔인한 신이 나올 것이다" 쯤이 적절해 보인다. 일어판에서는 이를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라고 번역해서, 훗날 하기오 모토가 만화 제목으로 차용한 바 있다.


저자가 지인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서 저술했다는 설명이 서문에 나와 있는데, 자살 그 자체보다는 20세기 예술이며 예술가와의 관계라는 측면을 주로 고찰하는 내용이니, 어쩌면 번역서 제목에 혹해서 집어들었다가 의외로 실망한 사람도 없지 않을 법하다. 하기오 모토의 만화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나귀님이 예전에 길게 설명한 글을 올렸었다.


이 책의 원제를 제공한 예이츠의 발언은 알프레드 자리의 부조리극 <위뷔 왕>을 보고 나서의 충격을 토로한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일반적인 풍자와 파격을 넘어서서 광기와 무의미로까지 치닫는 연극의 내용에다, 이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관객의 반응을 지켜보며, 과연 이 다음에는 뭐가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여러 모로 착잡한 심정을 표현한 듯 보인다.


<위뷔 왕>은 번역본이 2종(동문선과 연극과인간/지만지)이나 있지만, 지난번에 읽은 기억으로는 어느 것도 번역과 주석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천박하고 막무가내에 잔인무도한 성격인 위뷔 부부가 용병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서 왕국을 장악하더니, 머지않아 외국 군대와 전쟁을 벌여 패배하자 최대한 많은 재물을 챙겨 도주한다는 줄거리다. 


지난번에는 아무리 봐도 영 모르겠더니, 지금 보니 재임 내내 갖가지 논란으로 갈등만 빚다가 비상 계엄으로 자폭해서 탄핵 심판에 회부된 현직 대통령 부부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나저나 희곡의 결말과는 달리 부디 죗값을 치르길 바랐는데, 날짜 계산 착오로 갑자기 석방이라니, 이 무슨 부조리극인가. 어쩐지 연극보다 더 황당하고 잔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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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화를 남긴 과학자라 하면 지금은 아마 리처드 파인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보다는 살짝 연상인 소련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 역시 신기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흔히 '가모브'(Gamow)로 표기하는 이름조차 미국식 '가모', 러시아식 '가모프', 우크라이나식 '하모우'가 모두 가능하다니, 벌써부터 범상치 않아 보인다.


그의 대표 업적은 빅뱅 이론의 입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알파베타감마' 논문을 공저한 것인데, 충분히 진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자명을 가지고 '아재 개그'를 의도한 까닭에 제자의 경력을 망치고 성과도 저평가되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김씨, 박씨, 이씨가 공저한 논문에 굳이 나씨를 집어넣어 '김나박이' 논문을 만든 격이다!)


가모브라면 '톰킨스 씨'라는 등장인물의 모험을 통해 상대성 이론을 설명한 과학 교양서의 저자로도 유명한데,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저서가 1980년대부터 전파과학사 등에서 꾸준히 간행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재미있는 일화는 <조지 가모브>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자서전에 여럿 들어 있는데, 그중에는 교회 오폭을 가까스로 모면했던 아찔한 내용도 있다.


미국 망명 전에 가모브는 소련의 어느 포병학교에서 물리학 담당 교관으로 재직했는데, 하루는 사정이 있어 출근하지 못한 동료를 대신해서 포격 훈련에 참여하게 되었다. 소련 정부의 종교 불신 정책을 반영하듯 판지를 잘라서 교회 모양으로 만든 표적을 대포로 명중시키는 훈련이었는데, 여러 표적의 좌표를 정확히 계산해서 전달하는 것이 가모브의 역할이었다.


마침 표적 중에는 교회의 모습을 매우 세세하게 묘사한 것도 하나 있어서 가모브도 내심 신기하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진짜' 교회였다! 이 사실은 그가 계산한 좌표값에 따라 대포를 발사하기 직전에야 비로소 밝혀졌는데, 원래 여섯 개뿐이었던 표적의 좌표값이 일곱 개나 된다는 점을 마침 훈련에 참가한 다른 감독관이 수상쩍게 여긴 덕분이었다.


이 일화를 떠올리게 된 까닭은 당연히 어제 포천에서 있었던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서 벌어진 전투기의 오폭 사건 때문이다. 사고 직후 나온 공군의 해명에 따르면 조종사가 표적의 좌표값을 입력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 원인이라 했을 뿐만 아니라,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마을의 피해 건물 가운데 한 채가 공교롭게도 교회(성당)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재래식 무기와 아날로그 장비로 하던 훈련에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참사를 갖가지 현대식 무기와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군대에서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폭탄을 이용한 훈련이라서 위험한 일이니만큼 이중삼중의 안전 장치가 작동되어야 마땅했을 터인데, 어째서 하나도 먹혀들지 않았던 걸까.


보도에 따르면 세 차례에 걸쳐 좌표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지만 실제로는 준수되지 않았다니 어째서인지 궁금하다. 최근 비상 계엄 사태를 통해 낱낱이 드러났듯이 군대 자체에 기강 해이가 만연한 까닭인지, 아니면 이미 여러 번 언론에 보도되었을 정도로 열악해졌다는 직업 군인 처우 같은 고질적이고도 개선이 불가능한 문제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면 비상 계엄에서도 안전 장치가 작동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형식뿐인 국무회의도 문제지만, 하다못해 대통령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만큼의 용기와 상식을 가진 고위직이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고. 마침 우크라이나 전쟁 탓인지 핵 무장론이 슬슬 흘러나오던 상황에서 벌어진 오폭 사고야말로 우리의 한계와 무능을 재차삼차 부각시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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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검색하다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간 지난 주에 우연히 국어학자 강신항 교수의 타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어학보다 문학에 관심 많은 나귀님이다 보니 고인의 저서는 사실상 갖고 있지 않아야 맞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너덧 권쯤 갖고 있다. 다만 학술서는 옛날 역학(譯學)에 대한 것뿐이고, 나머지 몇 권은 에세이와 일기일 뿐이다.


지난번에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이야기를 하면서 강신항의 가족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그 부인 정양완 교수가 바로 그 책을 최초로 국역했었기 때문이다. 부부 모두가 학자이고 자녀 중에도 학자가 나왔으며, 특히 정양완의 부친이 위당 정인보이니 바야흐로 대학자의 가문이라 할 법한데, 아들인 수학자 강석진의 성추문으로 먹칠을 당하고 말았다.


"강신항, 정양완의 가정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숲마을에서 배밭골까지>(2000)라는 문집의 서문을 보니, 무려 1973년부터 부부 공동 문집을 간행하기 시작해서 무려 다섯 권을 간행했다고 나온다. 2000년에 나온 책에서는 부부의 글뿐만 아니라 아예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가 쓴 글까지 한데 모아서 가족 문집을 만들어 놓았다.(강석진의 글도 있다!)


예전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이었는데, 저자나 그 가족에 대한 내용보다는 에세이 속에 언급된 여러 인물들에 대한 회고가 흥미로워 보여 구입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스승인 이희승, 이숭녕, 남광우, 이병기, 정병욱 등 국어국문학계의 거물들에 대한 일화뿐만 아니라, <역사 앞에서>의 저자인 김성칠에 대한 회고와 추모의 글도 수록되어서 흥미로웠다.


김성칠의 아들 김기협이 쓴 <아흔 개의 봄>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김성칠의 부인인 이남덕이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이에도 남편의 옛 제자가 문병을 오자 한눈에 알아보더라는 흥미로운 일화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강신항이, 네가 어쩐 일이냐!"라며 이름까지 들먹인 사모님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고 묘사되었던 그 제자가 바로 강신항이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김성칠은 육이오 중에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피살되었는데, 전쟁과는 무관히 어느 정신이상자의 범행에 당한 것이라 하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 앞에서>는 김성칠이 광복 직후부터 사망 직전까지 작성한 수년간의 일기를 부인 이남덕과 아들 김기협이 정리해 간행한 것인데, 제자 강신항도 발문 가운데 하나를 작성했던 것으로 나온다.


흥미로운 점은 강신항도 육이오 즈음 작성한 일기를 <어느 국어학도의 젊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학생 신분이었던 저자도 징집 대상이었지만, 마침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던 스승 김성칠의 배려로 연구 보조원이 되어 후방에서 근무했다 전한다. 물론 일기를 보면 매일같이 장교들의 폭언과 멸시 속에 꽤나 힘들게 지냈다지만.


날짜 순서가 아니라 일단 소년 시절, 학창 시절, 대학 시절, 군대 시절, 연애(?) 시절 등 큰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나서 다시 날짜 순서로 배열했기 때문에 순서가 오락가락한 감은 있고, 20대 초의 청년 시절이기 때문에 견문이나 정보가 폭넓지는 못하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저 어두운 시기의 한국 사회의 한 부분을 조명한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강신항보다 5년 연하인 유종호도 육이오 당시 미군 부대에서 사환으로 일했던 경험을 <그 겨울 그리고 가을>이라는 회고록에서 서술한 바 있었다. 나귀님은 어린 시절 받은 반공 교육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는 육이오 관련 서적을 의도적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극한 상황 속에서 벌어졌던 놀라운 이야기가 많아서 신기했다.


예를 들어 지금 세대는 영화 <기생충>의 '한 지붕 세 가족'(?) 설정을 기발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포탄이 날아다니고 시체가 널렸던 시절의 현실은 상상을 거뜬히 능가한다. 나영균의 회고에 따르면 육이오 당시에 갑자기 인민군이 집을 몰수하는 바람에, 천장 위에 숨어 살던 남편이 내려오지 못한 채 일주일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버텨야 했다니까. 


그러고 보니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6.25 일지>라는 책도 있었으니, 다시 꺼내서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그 저자 박찬웅의 부친이 국문학자라서 <훈민정음>을 소장하다 최남선에게 넘겼다는 기록이 있던데, 마침 강신항도 <훈민정음> 연구로 유명하니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인 셈이다. 그나저나 그 책을 도대체 어디 두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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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초에 무함마드 깐수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석방 이후로는 정수일이라는 본명을 사용한 모양이지만, 과거의 아랍인 행세를 텔레비전에서 익히 봤던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깐수'일 뿐이다. 분단의 희생자니, 아까운 지식인이니 하는 호의적 평가가 대세라는 것이야 알고 있지만, 뭐랄까, '잘도 속였구나' 생각하면 괘씸한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추앙되는 깐수의 학술에 대해서도 비판적 검토의 여지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나귀님이 그의 연구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거 고서점 호산방 대표 박대헌이 제기한 논문 표절 의혹 때문이었다. 한국이 언급된 서양 고서를 오랫동안 수집하고 연구했던 자신의 글을 단골 손님 깐수가 표절해서 논문을 발표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에 <월간 조선>에서 이 내용을 기사화하면서 깐수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더니, 순순히 실수를 인정하고 사죄하기에 일종의 해프닝으로 조용히 마무리되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간첩 활동이 밝혀지자 해당 기자가 과거의 표절 소동을 떠올리며 '어쩐지 수상했다'며 후속 기사를 썼고, 출소 직후 깐수가 박대헌을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로 기억하는데, 어째서인지 없는 것이 없다는 인터넷에서도 관련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으니 기묘한 일이다. 물론 논문 표절 1건을 가지고 깐수의 학술 성과 모두를 부정해야 마땅하다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활동에 번번이 따라붙는 독보적이고, 선구적이며, 전무후무하다는 찬사에 잠시 제동을 걸기엔 충분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과거 중국의 2인자였던 주은래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던 어학의 천재라며 치켜세우지만, 그렇게 대단한 인재를 기껏해야 간첩으로밖에는 써먹지 못했던 북한도 한심하고, 본인의 기질이며 능력과는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명령을 따랐던 깐수 양반도 한심할 수밖에 없다. 염소 노려보기를 비롯해 황당한 냉전 시대 첩보 작전들에 버금가는 코미디가 아닌가!


백 번 양보해서 학술로야 칭찬할 수 있더라도, 과연 후세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생각해 보면 살짝 민망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100년 뒤의 후손이라면 십중팔구 어이없다는 듯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지 않을까? '도대체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눈이 나빴던 거야? 아무리 봐도 외모가 한국 사람인데, 어째서 아랍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거지?' 


어쩌면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중국 고사로 답변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가만 보니 이웃이 훔쳐간 것 같았다. 이웃의 행동을 살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딱 도둑놈 같았다. 그런데 잃어버린 줄 알았던 도끼는 알고 보니 주인이 다른 곳에 놓아 두었을 뿐이었다. 그제야 다시 살펴보니 이웃의 행동은 전혀 도둑놈 같지 않았다.


결국 한국 사람 정수일을 아랍 사람 무함마드 깐수라고 사실상 전국민이 착각한 까닭은 '믿음'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보였던 것이며, 이후로는 달리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편견이나 선입견이 발동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일단 대학 교수라는 쉽지 않은 지위까지 꿰어찬 후에는 외모나 억양 같은 몇 가지 단서로 의심하기가 오히려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무함마드 깐수를 텔레비전에서 직접 봤던 나귀님 같은 사람의 입장일 뿐이니, 처음부터 단지 정수일로만 알던 젊은 세대에게나, 또는 더 미래의 세대에게는 또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다. 100년 뒤에 가서는 십중팔구 전청조 같은 유사 사칭 사건과 함께 옛날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즉 그냥 웃음거리로만 소비되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이 실제 간첩 사건을 각색한 희곡 <M. 나비>이다. 북경 주재 프랑스 외교관이 중국 여자와 사귀게 되어 아이까지 낳았고, 급기야 여자의 재촉으로 외교 서류를 빼돌리며 간첩질까지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사실 '남자'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프랑스 남자는 빈번히 성관계를 가졌는데도 정작 상대방이 '남자'임을 몰랐다고 전한다!


이런 착각이 가능했던 것은 문제의 중국 '여자'가 경극에서 여자 배역[旦]을 담당하는 남자 배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 만났을 때에는 프랑스 남자도 상대를 '남자'로 여겼지만, 그 '남자'가 자기는 사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남장 여자'라고 고백하며 평소에 숙달된 여자 연기까지 곁들이자, 프랑스 남자도 상대방을 '여자'라고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극작가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에서 동양 여자를 농락한 서양 남자와도 유사한 사고방식이 저 프랑스 외교관에게도 있었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거꾸로 서양 남자가 동양 여자에게 농락당한 셈이라고 바라본 듯하다. 그래서 <M. 나비>는 간첩 실화와 푸치니 오페라를 극중에 중첩시켜 "신사"(Monsieur)와 "부인"(Madame)이라는 "M."의 중의성을 드러낸다.


진부한 표현을 쓰자면, 프랑스 남자는 '오리엔탈리즘' 때문에 중국 남자를 여자로 착각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서양인은 사실 양성애자였다니, 과연 그가 어디까지 알았고 어디부터 몰랐는지는 두고두고 이야깃감이 될 만하다. 짐작컨대 희곡과 영화가 망각된 후에도 그 이야기가 회자된다면, 깐수나 전청조처럼 그저 쓴웃음만 자아내서가 아닐까...




[*] <M. 나비>는 동인출판사에서 나온 영한대역본으로 읽었는데, 황당한 오역이 많아서 차라리 절판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간단히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흙바닥(dirt floor)"을 "더러운 마룻바닥"으로, "그 말 취소할게요"(I take it back)를 "그 말을 되돌려드리죠"로, "외교신서사(courier)"를 "우편배달부"로, "바이에른"(Bavaria)을 "원시족"으로 오역하는 식이다. 심지어 2009년의 3쇄본이 여전히 이 지경이다! 차라리 예전 포도원에서 나온 박준용 번역본을 헌책방에서라도 구해 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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