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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느낀 것은 지독한 씁쓸함뿐이었다. 남성이 여성에 대한 책을 쓰면 이런 결론밖에 나올 수 없는 걸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리 여자들이 페미니즘이니 여성 인권이니 해도 이 작가와 같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라면 별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읽는 도중에는 몇 번이나 분노가 치밀었는데 책을 전부 읽고 난 후에는 단지 허탈감만이 남았다. 우리 나라의 누구나가 인정하는 이문열이라는 소설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당히 이런 소설을 내놓는 게 당황스러웠고, 그래도 베스트셀러라고 팔리는 우리 사회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 소설은 조선시대 장씨 부인의 일대기를 일인칭으로 서술하면서 여자로 태어나 가져야할 마땅한 자세를 훈계하고 있다. (그 훈계의 내용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이어서, 읽으면서 참 이문열이라는 사람이 안타까워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문열이란 이름을 믿고 이 소설을 사봤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졌다. 내용이 워낙에 졸렬하여 그럴리는 없을거라 생각은 하지만, 만에 하나.. 읽으면서 끄덕거릴 사람이 있을까봐...)
'선택'은 총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장마다 처음은 현대 여성에게 장씨 부인이 주는 훈계의 말 (즉, 이문열이 이 시대 여성에게 바라는 점..)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 부분은 장씨 부인의 삶을 회고 형식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조금은 특별한 재능을 지녔던 한 여인이 출가 후 남편을 현명하게 내조하고 자식들을 바르게 교육시키며 살아간다는, 평범한 일대기가 교훈적 어조로 씌여져 있다.
장씨 부인은 이러한 삶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글 전반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시와 글씨에 특출 났던 그녀는 글에 있어서의 성취를 포기하고 현모양처로의 길을 택해 혼례를 올린 후, 시집 간 가문의 한 구성원으로써 헌신할 것을 선택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선택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현대 여성들 역시 이러한 선택을 해야 함을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장씨 부인이 한 것은 과연 '선택'이 맞는 것일까? 선택이란 것은 일단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지가 더해져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회적으로 진출할 길이 막힌 여자로 태어난 그녀는 과연 그녀 자신의 의지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일까? 여자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었던 길을 선택이란 이름으로 포장해버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고, 그렇기에 장씨 부인의 '고심'했다던 선택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설득력을 잃은 훈계는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지루함만 줄뿐이다.
또한 장씨 부인의 입을 통해 나타나는, 현대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동조하기 힘든 비판은 작가의 감정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사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다같이 져야 하는 짐이라면, 끝내 피할 수 없는 짐이라면 조용히 지고 가는 것도 아름답다.' '여성 해방과 성적인 방종을 혼동하는 논리에 박수를 보내는 남성은 아첨으로밖에 여상의 호감을 살 길이 없는 못난이나 그런 여성들이 많아야만 한몫을 볼 수 잇는 바람둥이 뿐이다.'
'자연에 따르는 것이 선이라는 일반적인 논리로 피해가도,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걸로 미학적인 치장을 해도, 간음은 간음이다. 그보다는 전시대 남성들의 뻔뻔스런 반칙이 오히려 더 정직해 보인다.'
'가사 부담에 대한 너희들의 과격한 요구도 가끔씩은 못마땅하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택을 빙자한 강요이다. 작가가 원하는 여성상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이 책에서 장씨 부인에게 본받아야 할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러한 교훈적인 점들은 작가의 경솔하고 균형 잃은 발언에 빛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문열의 소설 '선택'은 나에게 있어 뒷맛이 씁쓸한 지루한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