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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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의 영원회귀

 

사랑의 형태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의 수만큼 다양하다. 사랑의 과정 역시 무수한 감정들의 교차로 이루어진다. 우연인가 싶다가도 필연이구나 싶고 확신했다가도 후회의 감정이 무한반복된다. 그러면서 사랑은 깊어가기도 하고 끝나기도 한다. 토마시와 테레사의 사랑도 그러하다. 토마시는 사랑을 믿지 않지만 테레사를 본 순간 책임감을 느낀다. 바구니에 넣어져 온 아기 같은 테레사에게 묶여 버린다. 꼭 그래야 하는가 의문을 지니며 선택을 망설이지만 결국은 테레자 옆에 머문다. 방황을 하면서도 자유로우면서도.

니체의 영혼회귀에 관한 문장들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삶의 순간들이 무한이 반복된다면이라는가정과 삶은 단 한번뿐이어서 무의미하다는 단정적 서술로는 부족하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삶이 한 번뿐인 가벼움에 대한 허무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삶의 무거움을 긍정하기기도 한다.  자신의 삶의 순간이 다시 반복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도록 강한 의지로써 받아들이라는 것 아닌가. 역사적 순간의 반복에 개인이 어쩔 도리없이 휩쓸리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삶을 사랑하고 즐기고 오직 자신만의 주체적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니체의 사상은 극에서 극을 오가며 삶을 변주한다.

소설의 시작이 영원회귀를 아무런 의미 없음이라는 허무주의적인 태도로 서술한 듯하여 잠시 작가를 오해하기도 하였다. 가장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인 히틀러도 시간이 가면 잊혀지고 사라진다.오히려 화해의 손짓을 보내기도 한다. 시간은 어쩔 수 없음으로 냉소적 허용으로 망각되고 흩어진다. 그래도 괜찮은가. 일제의 광기어린 제국주의에 짓밟힌 식민의 역사, 이념의 갈등으로 인한 전쟁,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겪은 정치적 독재 하에서 무수하게 생명을 잃고 고통 받았던 개인이 있다. 허무하게 잊혀지기도 하고 끊임없이 역사의 수면위로 떠올라 무한 반복되어 후세로 이어지고 새롭게 해석되기도 한다.

냉소와 영원성, 가벼움과 무거움 ,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테레사를 쫒아 스위스에서 체코로 돌아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에 빠진 토마시의 무거운 선택.. 그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받아 들였다. 선택의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토마시라면 테레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바구니에 담겨져 온 아기였으니 자신만이 건져 올려야 했을 테니까. 새롭게 어려움이 오더라고 의연한 기쁨으로 반복하게 될 토마시의 선택.. 그것이 무거움이라면, 영원회귀의 긍정성을 보여준 것이다.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 속에서 자신만의 몸짓, 스타일, 그 무거움과 가벼운 것의 모순 속에서도 신비로움을 잃지 않는 것.
테레자는 우연히 태어났다. 가장 중요한 생명인 테레자는 그녀의 엄마가 장점이 서로 다른 아홉 명의 남자 중에서 우연히 하나를 선택해서 태어났고 계획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잉태되었다. 육체의 탄생은 육체를 빌어야 한다. 철저하게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세계에서 영혼이 튀어오르는 경험은 토마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만남의 배경음악으로 올려 퍼진다. 가벼운 우연들이 죽음을 같이할 운명을 뒷받침한다. 우연이 의미를 지니면 필연이 된다.

테레자는 영혼의 사랑을 추구하지만 사랑의 행위는 육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실제적인 사랑은 육체에 있다. 꾸르륵 소리나는 몸을 그대로 받아준 토마시가 다른 육체를 탐하는 것에 이를 드르륵 갈고,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육체의 고통을 토마시에게 보여준다. 토마시가 그녀가 있는 프라하로 돌아왔을 때,  토마시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느낀다. 영혼은 육체와 삐긋대기도 하고 일치하기도 한다. 가벼워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한다.

 

2. 작가의 등장이 독특하다

 

네 명의 남녀가 주인공인데 소설의 시작은 작가의 사유로 시작된다. 영원회귀 속 무거움과 가벼움. 영혼과 육체 사이를 직접 나레이션하며 인물의 가장 내밀한 성생활부터 사회적인 참여까지를 전지적이고도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들에게 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 '나'로 등장하지만 인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독자는 작가의 애매한 등장으로 잠시 소설의 흐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장치가 그의 소설을 철학적으로 무겁게 하며 네 명의 등장인물들의 변주되는 삶을 일정한 질서의 틀로 끌어들인다. 

p 10 얼마 전 나는 기막힌 감정의 불꽃에 사로잡혔다. ~~나는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p14 나는 수년 전부터 토마시를 생각했다.

p 74 나는 가끔 그녀의 생김새가 어머니와 닮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삶도 어머니 삶의 연장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나'는 토마시와 테레자를 탄생시킨 작가로서의 '나'가 맞는지 진정한 의도가 뭔지 분명하지는 않다.


3.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토마시는 테레사와 함께 죽고 싶었다. 그건 그녀가 그에게 오는 처음 순간 알았다. 영혼으로부터 분리된 육체의 사랑을 찾아다니던 그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가벼움의 상징이었지만 테레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 기꺼이 끌어 안으며 자신을 버리면서 무거움의 상징으로 바뀐다. 또한 소련의 침공이라는 사회적 격변은 개인의 삶을 휘청이게 만들고 어떤 선택과 어떤 사회적 책임을 짊어지겠는가 라고 묻는다. 그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질문과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를 오가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적인 사랑의 화신으로 주체적 지식인으로 삶을 형성한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테레사와 함께 죽는다. 주어진 임무란 없고 자유로움과 홀가분함으로 행복하다. 그가 테레사와 함께 들었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여운으로 남는다. 삶의 한없는 가벼움을 벗어나 한 여인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 들이고 사회적 책임을 무겁게 짊어짐으로써 그의 삶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땅으로 내려 앉았다. 그래야만 하는가와 그래야만 한다 사이에서 그가 얻은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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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7
허먼 멜빌 지음, 김훈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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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관심을 주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를 필경사로 채용한 나-글의 서술자이다. 나는 꽤 성공한 변호사이고 조금 특이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들이더라도 그 장단점을 모두 알고 포용할 만한 교양도 인성도 충분하다.


그의 첫인상은 꽤 괜찮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돌 만큼 말끔하고, 딱한 느낌이 들 만큼 예의 바르고, 누구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을 만큼 쓸쓸해 뵈는' 그가 바로 바틀비였다. 그는 일도 꽤 잘했고 무엇보다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달라졌다.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그는 사회 조직의 일원이고 일한 대가로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에서 스스로를 소멸하겠다는 말과 일치한다. 용감하거나 뻔뻔하다.


여기서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소환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로 시작되는 신화 속 주인공 시지프스인 우리 인간은 삶의 무의미성, 삶의 부조리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자살인가 그래도 희망인가. 과거 바틀비가 한 일은 아마도 생의 무의미성을 깨닫는 과정이었을 듯하다. 


이런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를 삶의 그물망 안으로 끌어 들이고자 노력한다. 자신과 인연 맺은 사람을 쉽게 내치지 못한 채,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그를 내버려 둔다. 금적적인 도움을 주고자 애를 쓰기도 한다. 인정(人情)을 베풀고 그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않는다. 가족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 사회의 힘을, 공권력과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법적 판결에 따라 감옥으로 가게 된 바틀비를 위해 은화를 남기기도 한다. 다른 무엇을 더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도 힘 없는 개인은 생의 의미를 잃고 또는 생계 곤란으로 또는 그 어떤 이유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자연사하기도 한다. 결국 바틀비는 죽음에 다다른다. 그건 그가 선택한 자살 수도 있고, 사회적 타살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던 그를 누가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쓸쓸지만 날카로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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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깨칠 뻔하였다
김영민 지음 / 늘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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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의 이국적인 아득한 세계로 걸었다. 그가 천착했던 깊이만큼 길은 복잡했고 나는 마치 미로에 갇혀 버린 듯했다. 한 세상을 날아오르는 도약 없이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었으나 몸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며 끄을어 보니 미로는 흐물거려 사라지고 아득한 곳이 펼쳐지는 듯했다. 이 아득한 곳을 여섯 번 돌면, 이 글을 여섯 번 펼쳐 읽으면 차마, 깨칠 뻔하였다.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차마'는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감히'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주로 부정문과 의문문에서 쓰인다. 그가 말하길 '부사'는 주어의 복심(腹心) 이라는데 차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그의 복심은 무엇이었을까. 천년(千年)을 격(隔)하였지만 문득 알 것 같은, 어쩌면---단 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금세('금새'라고 표기된 부분이 거슬렸지만)말이다.


'천 권의 책을 쓸 수 있으되 쓰지 않기로 했다'라는 서문은 그의 다른 책 <공부론> 서문을 아포리즘화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알되 묵히고 당기되 쏘지 않으며 의도와 실천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간다는 그의 자세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상상한다. 그리고 몸을 변화시킨다. 행지(行知) - 수행을 통해 진정한 앎에 도달한다. 또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사로운 인정(人情)에 얽매이지 않음으로 더 큰 신뢰를 구축하고 세상의 모든 선생들로부터 배우며 알면서 모른 체할 수 있는 깜냥을 키운다. 그를 '철학자'라는 세 글자로만 소개해 놓았기에 잠깐 정보의 불친절함을 투덜대기도 하였으나 글을 접하고 나니 그것으로 충분했음을 깨닫는다. 


닷푼의 영혼이지만 무거운 책임감으로 삶을 짊어질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살았다고 할 수 있고, 장도(長途)를 기약하며 높이 오른 먼 길에서 타인을 신뢰하는 태도로 일관할 수 있어야 가치가 있으며, 사람 속에서 절망하지만 끝내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고, 끝내 몇몇의 사람을 남기고서야 글은 마무리 된다. 글을 통해 얻게 되는 단독자적 경험, 상달(上達) 속에 허용된 무심의 순간에 잠깐 정지하였다면 충일하다.


그의 시적인 문장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여 삶을 비추고, 깨달음을 주는 산문은 삶을 더욱 공고하게 하며 그의 탁월한 시선은 글 읽는 맛을 살린다. 적확한 단어의 선택에 눈이 동그래지고 신선한 문장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의 글 운용은 질투가 날 정도로 견고하다. 그가 소개한 신상병의 아득한 눈빛을 마주한 느낌이다. 독자 파란여우님의 '한국의 독자는 김영민 선생 책을 읽은 독자와 읽지 않은 독자로 갈린다'라는 소개 문장을 보니 이제 나는 그의 책을 읽은 독자가 되는가 싶어 내심 뿌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웠던 이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2018년 여름날 세상과 이별한 그 이름 노. 회. 찬. - 당신만의 염치(廉恥)로 지금도 안녕하시길 나 역시 바란다.


아, 그의 아득한 문장 속으로 걸어가 깨칠 뻔한다면, 그 누구라도, 당신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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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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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

글의 흐름에 따른 두뇌의 작용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관을 만들어 삶에 대한 자세를, 세계에 대한 인식을 형성한다. 그리고 생의 어느 하루를 또한 생의 전체를 아우르게 하는 힘으로 인간에게 강력한 영향을 준다.  이렇듯  책 읽는 행위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너무 막연하여 구체적인 답을 못 찾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읽기는 , 특히 소설 읽기는 때때로 무의미한 춤처럼 체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과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즈음 김영하의 '읽다'라는 글을 통해 독서가로서의 자부심을 얻는다. 자신안에 있지만 스스로도 몰랐던 오만과의 조우, 우주와의 만남, 나의 존재를 겹겹으로 풍요롭게 하는 책과의 맛있는 만남.

어떤 책은 특별한 사람과의 만남처럼 뚜렷한 자취로 다가와 족적을 깊게 남기고 사라진다. 고전에서 차용한 문구를 바탕으로 책 읽기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 김영하의 글은 읽을 만하다. 아름다운 소설의 문구들이 책 속의 책을 읽고 싶게 만들기도 하고 마이웨이가 분명한 김영하 답게 우리를 비슷한 듯 새로운 길, 다양하고 풍부한 장치들을 통해 글의 결말로 이끈다.

그의 글은 익숙한 듯 새롭고 어지러운 듯 분명하다. 읽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가을 바람 따라 독서의 욕구를 팽팽하게 불러 일으키는 <읽다>에 별점 5개를 준다.

 

"소설은 두 번째의 삶이다." - 오르한 파묵

 

소설가에게 소설 읽기란 일상적이지만 분명하게 특별한 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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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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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감옥에서 생활하셨다는데, 감옥 바깥에서 생활하는 우리보다 세상을 훤하게 꿰뚫어 보신다. 그러고 보면 우리 역시 자기가 만든 감옥,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 저마다 갇혀 편견과 콤플렉스를 키우며 세상을 밝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수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자이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요조처럼 타인의 눈을 기준으로 그 눈에 들고자 자신을 희화하고 비위 맞추고자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가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살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 자유화, 개인화, 상품화, 차별화 등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철창인 셈인데, 그것이 삶의 이유와 목적인양 수직상승을 꿈꾸고 비교하고 좌절하며 이웃의 누군가를 증오하며 그저그렇게 매일을 반복적으로 살고 있다. 때로는 이게 아닐 텐데라며 비판의 날을 갈아 보기도 하지만 개인의 무기력함은 나뭇잎 하나도 푸르게 하지 못한다. 단지 내면으로 파고드는 외로움만 커지고 어느 곳 하나 기댈 곳 없음에 스스로의 강퍅함만으로 버틴다.

 

이때, 선생님의 한 마디, 신문지만한 햇빛 조각만으로 나는 태어난 것에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비현실적인 말씀인 듯하다가, 햇빛 조각의 밝음과 따뜻함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기에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리며 그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과 필요성.. 개념을 이론으로가 아니라 구체화된 사람의 얼굴로 대할 수 있다면, 연대와 관계 맺기가 실질적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내가 빛나야 하고 남의 사정보다는 나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를 이해하고 배려해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할 뿐 연대가 참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안다. 개별자로서의 존재보다 연대로 향해감이 현대인의 고독감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관계 속에서 존재가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책은 도끼>라 했던가. 공부를 통한 성찰과 깨달음이 머리를 거쳐 가슴에 이어 두 발로 종결된다. 실천이다. 다른 말로 돌아보고 돌봐주기라 말하고 싶다. 이젠 타인으로부터의 기대를 거두고 자립하여 주변을 돌보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글로 대하니 글이 참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조화가 잘 이루어진 안정적인 면을 닮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음은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갇힌 생각에서 자유로운 생각으로 물길을 바꿀 수 있고 길을 가꿀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의 움직임.. 창조적 표현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에 놓인 버섯 이야기는 머리를 꽝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이 버섯에게 독버섯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기준, 식탁의 기준이지 버섯의 기준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생명 그 자체로 자연의 한 부분으로 충분히 가치를 지닌다. 우리들의 관계론에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저마다의 존재를 어떻게 긍정하느냐 하는 화두를 던져준다. 좋은 말씀을 전해주신 선생님께 끝없는 존경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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