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구판절판


그러니 이제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때의 그와 그때의 나를 이제 똑같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똑같이 말입니다. J, 실은 그를 용서하는 일보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감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도 저를 그 기억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하는 이유겠지요.-.쪽

한 사람을 사랑하는 작은 사랑 없이 큰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합니다. 위선이 되기 쉽지요. 작은 사랑만 보고 큰 사랑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이기적이 되고 맙니다. 저는 그래서 감남주 시인의 시를 믿었고 그를 존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쪽

그래도 당신은 내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쪽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 꼭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쪽

잠도 오지 않고 배도 고파 냉장고를 뒤적이는데 찬장 속에 먹다 만 소주 반 병이 보였습니다. 남아 있는 소주를 작은 잔에 따랐지요. 무언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외로움에 대한 공포였을 것이고, 쓸쓸함이 그 끝으로 내려가 스스로 끝장을 내는 소리 같기도 했지요.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의 절정. 저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잘했어, 참 잘했어.
그렇게 밤을 보낸 후, 저는 다시는 그런 감정과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순간이 또 있었겠지만 뭐랄까, 그때 그 소주 반 병으로 강력한 예방주사를 맞았다고나 할까요? 그 후로는 혼자여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쓸쓸함과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참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J, 되돌아보면 진정한 외로움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거리를 기웃거리는 외로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해지려고 애쓰다 보면 언제나 외롭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럴 때 그 외로움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당하면 외로움이고 선택하면 고독이라고. 우리는 한참 웃었습니다만 외로우니까 글을 쓰고, 외로우니까 좋은 책을 뒤적입니다. 외로우니까 그리워하고 외로우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어떤 시인의 말대로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J, 그래서 저는 늘 사람인 모양입니다.-.쪽

신이 저를 사랑하시고 제가 진실에 가까이 근접하기를 원하셨다면 고만고만한 행복에 제가 머무르도록 허락하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불완전만큼 더 큰 동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쪽

제가 처음 읽고 매혹당한 소설 '열정'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쪽

그분의 경험에 의하면 식물이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적당히 결핍되어 있는 환경에서라고 합니다. 너무 결핍되면 말라버리지만 적당히 결핍되면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잘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베고니아 화분을) 거기다 가져놓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는 물을 주지 않는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집에 돌아와 겨우 말라죽지 않을 만큼만 물을 주었습니다. 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열흘쯤 그런 날들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느 한숨을 쉬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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