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해빙 (40만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
이서윤.홍주연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40만 부가 아니라 40부만 팔렸으면 하는 책  :











내 그럴 줄 알았다 !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밀란 쿤데라, 농담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조각 솜씨가 뛰어난 피그말리온 왕이 상아로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한 후,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상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더니 훗날에 소원이 이루어져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자기 계발서는 대부분 이 심리학 용어를 무한대로 변주한다. 쉽게 말해서 : 소원을 말해봐 ~                   


피그말리온 효과와 비슷하지만 동시에 반대되는 개념이 오이디푸스 효과'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자신의 기대와 예측에 부합하는 결과라면 오이디푸스 효과는 자신의 결의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기대와 예측에 부합하는 결과'다. 전자가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경우라면 후자는 너의 저주가 이루어진 경우다. 이 두 개념을 통틀어 " 자기 충족적 예언 " 이라고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은 커서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 말하곤 했는데 결국 감독이 되었으니 자기 충족적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고,  김어준은 평소에 각하는 감옥에 갈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는데 


그것이 실현되었으니 이 또한 자기 충족적 예언의 실현인 셈이다. 피그말리온과 오이디푸스는 모두 왕족이니 흙수저 출신에게는 예언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ㅡ 오, 놉 ! 그것은 착각이다. 자기 충족적 예언을 쉬운 언어로 설명하자면 " 내 그럴 줄 알았다 " 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까불다가 접시를 깨거나 뛰놀다가 넘어졌을 때 부모가 아이에게 흔하게 하는 말이 바로 " 내 그럴 줄 알았다 ! " 이다. 부모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까불다가 접시를 깨거나 뛰놀다가 넘어질 것이란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놀라운 예지력. 


그런데 그 부모는 정말로 그 아이가 그럴 줄 알았을까 ? 그럴 리가 없다. 그 부모는 그 아이가 그럴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심리는 바로 사후확증편향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난 후에 사전에 그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으려는 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사후 정보를 사전 정보라고 우길 때, 우리는 버릇처럼 < 내 그럴 줄 알았다 > 라거나 <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 라는 원망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측한 결과는 사후 정보를 사전 정보'였다고 우긴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인간의 예측력은 신통치 않다는 점이다. 


미래에 대한 인간의 예측력이 낮은 이유는 미래라는 공간이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지배하는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가 스페인 독감보다 더 지독한 코로나라는 블랙 스완이 출현할 줄 알았으랴.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자기 계발서의 공약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소원이란 기본적으로 미래의 불확실성과 우연성에 기대는 희망일 뿐이다. 설령,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인과 관계도 아니고 상관관계도 아니다. 인과 관계도 아니고 상관관계도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관계도 아닌 것이다. " 어머,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이, 부끄러워요." 


자기 계발서에서 훌륭한 모범이라고 소개한 사례들은 대부분 << 내 그럴 줄 알았어 ㅡ 심리 >> 를 이용한 것이다. 그럴 줄 몰랐으면서 그럴 줄 알았다고 아는 척을 하는 순간, 독자들은 대책 없이 홀린다. 40만 부나 팔았다는 << 더해빙 >> 의 대책없는 낭만적 낙관주의를 볼 때마다 밀란 쿤데라가 << 농담 >> 에서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쓴 문장이 생각난다. 교주 서윤과 신도 주연의 만담 복음서처럼 보이는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기 계발서가 아니라 종교학 서적이 아닌가 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배금주의를 종교적 숭배의 영역으로 격상시키는, 이 끔찍한 혼종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 어머 !  할렐루야다, 얘 " 


이런 책은 40만 부가 아니라 40부만 팔렸으면 하는 책이다. 처음부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생각은 없었으나 몇 장 읽다가 책을 덮었다. 책을 덮고 나서 혼잣말을 했다. " 내 그럴 줄 알았어 ~ " 이런 책을 쓰는 저자를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묻고 싶다. " 정말...... 그럴 줄 알았어요 ?  솔직하게 말해봐요. 그럴 줄 몰랐죠 ? 그런데 왜 아는 척을 하고 xx이세요, 네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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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점 은   곧   단 점 이 다   :











함부로 조언하지 말 것










나관중의 역사소설 << 삼국지연의 >> 는 피카레스크(:양아치들이 등장하는 소설 장르) 소설이자 하이스트(:떼강도 장르 영화) 장르'다. 말이 좋아 영웅호걸이지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그들은 은행 금고 대신 나라를 강탈하려는 인물군상이다. 그래서 나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존경하는 인간이 한 명도 없다. 영화 < 도둑들 > 에서 애니콜 전지현의 대사를 빌리자면  :  내가 보기엔 모두 다 어마어마한 쌍놈이거든.             


가끔, 술자리에서 이 소설을 들먹이며 삼국지를 읽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던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상처 치료엔 조까라마이싱이 특효 ! 됐고 ~    한중일 세 나라는 각각 좋아하는 인물이 다르다. 한국인은 인덕( :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는 복 )이 넘치는 유비를 좋아하지만 중국은 의리가 넘치는 관우를 최고의 영웅이라 생각하고 일본은 열혈남아 조자룡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한국인은 유비가 삼국지의 주인공이라 생각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유비를 그닥 뛰어난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이 보기에 유비는 우유부단하고 지략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인덕이 많은 경우. 승패만 놓고 보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전투에서 패가 가장 많은 인물이 바로 유비'다. 운이 좋다는 늬앙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은 유비의 인덕을 장점으로 보지만 중국인과 일본인은 그것을 단순한 요행따위로 생각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 누구에게는 장점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단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누구의 평가가 더 훌륭한가 _  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변함없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보기엔 모두 다 어마어마한 쌍놈이거든 !        


삼국지(연의) 거들먹거리며 옛날이야기하는 것을 꼰대의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글 말머리를 삼국지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장점은 곧 단점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전쟁에서 칼싸움하던 시절, 키가 큰 병사와 키 작은 병사가 싸우면 누가 더 유리할까 ?  당연히 키가 큰 병사가 유리하다. 팔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칼 길이가 길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칼이 아닌 화살 공격에서는 장점이었던 큰 키가 단점으로 작용한다. 


덩치가 크면 그만큼 화살에 맞아 죽을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화살로 참새를 맞힐 확률보다는 곰을 명중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역사학자는 그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하는 사례는 토끼와 거북이에게도 적용된다. 토끼의 장점은 빠른 발이지만 토끼가 거북이와 달리기 경주에서 진 이유는 자신의 장점을 지나치게 과신했다는 데 있다. 토끼의 낮잠은 자기 재능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토끼에게 빠른 발은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자, 이제부터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  자기 계발서의 목표는 분명하다. 타인의 단점을 지적해서 잘못을 부각시키고 타인의 장점은 발굴해서 내 것으로 학습하면 자기계발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장단점은 상황에 따라서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좋은 예가 코미디언 심형래의 흥망'이다. 신지식인 1호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시작한 심형래의 성공 요인(장점)은 "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인 추진력 " 이었다. 그는 티븨에 나와서 "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 ! " 라고 말했는데 그는 결국 이 말이 부메랑이 되어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의 장점을 성공 요인으로 뽑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그 사람의 단점이 성공 요소로 작동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의 훌륭한 인성 때문이 아니라 수성(獸性) 때문이라는 점을 이제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어버이 부대 빼고는 말이다).  이처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반드시 성공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점이 반드시 실패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래학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미래에 사라질 직종 0순위를 뽑으라면 아마도 미래학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과 비대칭성은 더욱 예측할 수 없는 형태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블랙스완, 나심 탈레브 ).  어떤 미래학자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자신 있게 진단하며 온택트,  언택트를 언급하며 미래 설계의 빅텐트를 치는 멘트를 날리지만 내가 그에게 진짜로 묻고 싶었던 것은 멀지 않은 과거에 그는 왜 코로나19 라는 블랙스완의 출현은 예측하지 못했는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쌍놈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은 자기 계발서를 열심히 읽는 사람이다.  차라리 자기 계발서 대신 자위 계발서를 읽고 황홀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  자기 계발서의 팔 할은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조언으로 채워진다.  좋게 말하면 조언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지적이며(더 나쁘게 표현하자면 지적질이지만)  중립적 태도로 보자면 충고'다.  그것이 충고이든, 지적이든, 조언이든, 위로이든 간에 당신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데 500원을 걸겠다.  


그들은 자신의 책을 구매할 의사가 있는 구매자를 등쳐먹기 위해 갈라진 혓바닥으로 조언, 위로,  설득,  독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독사일 뿐이다.  다음은 나심 탈레브가 2016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졸업식 때 낭독한 축사'다.  정독을 권한다.  두꺼운 자기 계발서를 사서 읽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 서서 그의 축사를 공짜로 읽는 것이 당신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확언 아닌 확인하는 바이다. 오케이, 오늘은 여기까지 ■




















졸업생 여러분, 이 졸업식은 내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대학 졸업식입니다. 나는 내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성공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그저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성공의 정의는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저녁 거울을 쳐다보며, 열여덟 살이나 스무 살 즈음의, 아직 세상의 때가 묻기 전의 자신이 지금의 나를 보면 실망할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당신의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명성이나 부, 사회적 위치나 훈장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그 젊은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면, 당신은 성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다른 모든 성공의 정의는 인위적입니다. 부서지기 쉬운(fragile) 인조물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성공이란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심지어 레바논에서도 전쟁에서 죽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맞게 그 의미를 바꾼다면, 성공이란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공동체의 범위를 좁게 잡든 넓게 잡든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모든 행동이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집단은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하나 할 때마다 동료를 위한 행동 역시 하나 하라는 규칙(uomo d’onore)을 가지고 있습니다. 덕성이란 용기 없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남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십시오. 그 대상이 꼭 어떤 사람일 필요도 없습니다. 베이루트 메디나티(2016년 시작된 레바논의 사회운동 – 옮긴이)나 지역사회를 위한 것도 좋습니다. 사소할수록, 구체적일수록 더 좋습니다.

약점이 있는 삶을 성공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기자를 무서워하는 억만장자, 사돈이 돈을 더 벌어서 괴로워하는 부자, 인터넷에 올라온 비판을 두려워하는 노벨상 수상자를 알고 있습니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일수록 추락을 두려워합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이 외부에서 주어진 성공으로 인해 더 불안해졌고, 더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최악은 이력서 네 페이지를 모두 자신이 전에 어떤 직위였는지로 채우고 관직을 떠난 다음에도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일 겁니다. 마치 어느 날 집에 가보니 집안의 모든 가구를 누군가 훔쳐 갔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자존감은 그 반대입니다. 스토아학파의 원칙이 이러했습니다. 마침 이 학파의 시작은 페니키아였습니다. (나심 탈레브는 레바논 출신으로 고대 페니키아는 오늘날 레바논 지역에 있습니다. – 옮긴이) 스토아학파가 어떤 이들인지 묻는다면, 나는 약간 태도가 건방진 불교 신자, 곧 레바논 출신의 불교 신자를 생각해보라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아미운 지역에서 자신의 부족 일에는 다른 모든 일을 제쳐놓고 나서는 자존감 강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없이 잠들었고 아침을 행복하게 맞았습니다. 소련 붕괴 시기에 한 달에 200달러를 받고 겨우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이해할 작업을 하면서도 상을 받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자 자신감의 부족이라 생각한 러시아의 수학자도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부유한 이들 중에도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에서 유명인 행세를 하지 않으며, 검소하게 살고, 고급 양주가 아닌 값싼 술을 마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를 뿐입니다.

이제 내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어떤 심오한 철학적 숙고 끝에 나왔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는 사실 다 어느 정도 치장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이 가진 도박적 본능에서 나온 겁니다. 대주교를 연기하는 충동적인 도박사를 상상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지만, 나는 트레이딩과 리스크 테이킹에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현대가 아닌 중세 유럽 혹은 지중해풍의 분위기에서 자라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부모님은 밥 에드 드리스의 앙투완 도서관과 다른 큰 도서관의 회원이었고, 나는 날 때부터 책과 가까웠습니다. 부모님은 그들이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을 샀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레바논의 학식 있는 많은 분, 특히 역사학자들을 많이 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회 사제들과 저녁을 자주 했고, 그들의 박학다식함 때문에 나는 그들을 내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나는 교육이란 스승과 함께 식사하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학식을 지능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수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 작가나 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레바논의 대학 입시에 매달리다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자주 가지 않았고, 14살 때부터 책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후 나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에는 내가 집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학위를 위한 학교와 배움을 위한 독서를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동안 방황했고,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위대한 레바논인 소설의 8페이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 소설은 1년에 1페이지씩 만들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와튼 경영대학원에서 확률론을 배우게 되었고 여기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고고한 철학적 과학적 욕망이 아니라, 주식시장에서 도박을 걸 때 나오는 스릴과 호르몬의 효과에 의한 것입니다. 한 친구는 내게 파생상품의 세계를 알려 주었고, 나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분야는 복잡한 수학과 트레이딩이 모두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분야였고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학적으로도 극히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탐욕과 두려움은 인생의 선생님입니다. 나는 지능은 평균에 미치지 못하지만, 마약을 구하기 위해 온갖 기발한 수를 생각해내는 중독자와 비슷했습니다. 수익의 가능성이 보이기만 하면, 갑자기 내 안의 두 번째 뇌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습니다. 불이 나면 시합 때보다도 더 빨리 뛰어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위기가 사라지면 나는 다시 멍청이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트레이더로서 우리가 가진 문제에 수학을 적용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가진 이론을 어디에 적용할지 찾는 학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수학을 실제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공식으로 알 때보다 훨씬 더 깊은 이해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계량경제 분야에서 12년을 보낸 다음 딴 박사학위는 석사나 학사 학위보다 훨씬 쉽게 딸 수 있었습니다.

나는 경제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거의 항상 잘못된 수학을 자신들의 문제에 적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생각은 이후 블랙 스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통계적 도구는 그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끔찍하게 잘못된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드물지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꼬리 현상”을 과소평가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발견은 1987년 주가 폭락 때 내가 20대에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게 해줬습니다.

나는 우리가 확률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그리고 불확실성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확률은 과학과 철학의 도구이며, 신학, 철학, 심리학, 과학 그리고 현실의 위기관리와 같은 문제에까지 쓰입니다. 우연히도, 확률 개념은 8세기 레반트 지역에서 암호를 푸는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나는 여러 학문들 사이를 산책하며, 길가의 사람들을 귀찮게 하면서 자신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심한 장난을 치며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의학 논문을 꺼내 과학자들에게 “p가치(p-value)”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소스라칠 겁니다.

2008년 경제 위기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 변곡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나는 내가 명성을 싫어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유명인, 캐비어, 샴페인, 이름이 긴 음식들, 값비싼 와인, 특히 와인 비평가들이 싫었습니다. 나는 값싼 술과 오징어 요리를 포함한 안주를 좋아합니다. 부자들은 그들을 등쳐먹으려 만들어진 시스템이 정해준 취향을 자신이 가진 척하고 싶어 합니다. 지루한 부자들과 미슐랭 3스타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날, 나는 내 취향이 어느 쪽인지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나는 닉스 피자에 들러 $6.95 하는 피자 한 조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 아직 미슐랭 식당을 가지 않으며 복잡한 이름의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나는 자신이 유명인을 많이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알레르기를 느낍니다. 나는 그렇게 1년 정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 아미운과 뉴욕 근처의 내 서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기술적인 작업을 연구하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이력서를 볼 때마다 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에는 내가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과거에 했던 일만 쓰여 있습니다.

나는 오늘 그냥 내 인생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모든 조언은 다 틀린 것으로 드러났고 나는 그 조언을 따르지 않아서 기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집중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한 번도 집중한 적이 없습니다. 미루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블랙스완을 쓰기까지 나는 20년을 기다렸고, 300만 부를 팔았습니다. 책에 가상의 인물을 넣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책이 지루하지 않게 네로 툴립과 팻 토니를 넣었습니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을 비난하면 안 된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내가 그들을 비난할수록 그들은 내게 더 잘해주었고 내 논평을 요청했습니다. 허리가 아플 때는 역기를 들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역기를 든 뒤로 허리가 한 번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내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나는 더 고집을 피우고 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책임질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면, 그 조언이 맞지 않았을 때 어떤 책임을 질지도 말해야 합니다. 이건 일종의 황금률의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지키고 있는 비법 몇 가지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 신문을 읽지 마세요. 어떤 형태로도 뉴스를 따라다니지 마세요. 그보다는 작년 신문을 읽으세요. 이는 뉴스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으로부터 뉴스를 봐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무언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큰 소리로 이를 말하십시오. 당장은 손해를 좀 보겠지만, 이를 통해 당신은 더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사람들은 당신을 신뢰하게 될 겁니다. 내가 무명의 저자이던 시절, 나는 블룸버그 라디오의 인터뷰 중 인터뷰어가 멍청한 이야기를 하기에 그냥 그 자리에서 나와버렸습니다. 3년 뒤, 블룸버그는 내 이야기를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모든 경제학자는 나를 싫어합니다. (물론 여기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경제학자들을 제외하고 말이죠.) 나는 두 번이나 비방을 당했지만, 또 한니발과 랄프 네이더 이후 가장 용감한 레바논인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몬산토와 같은 사악한 기업을 비판했고, 그 때문에도 비방을 당했습니다.

– 회사 대표보다 경비원을 더 존중하세요.

– 지루한 일은 하지 마세요. 세금을 아끼고, 장모님을 방문하세요. 당신의 느낌은 가장 좋은 헛소리 감지기입니다. 이를 통해 당신의 삶을 결정하세요.

내 책에는 많은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축사를 끝내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근력 없는 근육, 신뢰 없는 우정, 책임 없는 의견, 미학적 관점 없는 변신, 가치를 축적하지 못하는 시간, 영양소 없는 음식, 정의 없는 권력, 엄밀함 없는 사실들, 학식 없는 학위, 강인함 없는 군대, 문명 없는 발전, 깊이 없는 복잡함, 내용 없는 유창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용 없는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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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 전 삼국지를 읽지 않고 기냥 영화나 시리즈 만화만 봤어요.
사촌들 친지들이 어떻게 삼국지를 안읽었냐고 비웃었고(진짜로!)
졸업하고 어딘가에서 면접을 봤는데 ‘삼국지‘를 읽었냐고 물어서
‘아니요‘라고 했는데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고 쳐다본 경험이 ㅎㅎㅎ

아무튼 곰곰발님 포스팅 공감하며 읽었네요.
곰곰발님 서재에 트리 한그루 놓고 가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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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

곰곰생각하는발 2020-12-25 12:56   좋아요 1 | URL
왜 한국인이 중국의 정사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삼국지를 찬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삼국지 3번 정독한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말라는 소리하잖아요.
ㅋㅋㅋㅋㅋ

이런 책 안 읽어도 됩니다. 그 시간에 다른 책 읽는 게 도움이 될 듯요..ㅎㅎ

수다맨 2020-12-25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국지(연의)를 오래전에 여러 번 읽어서인지 더는 이입도, 공감도 가지 않더군요. 사실 삼국지 같은 서사에서 간과되는 것은 (의리 있는 왕이나 용맹한 장수나 명민한 책사 같은 이들을 강조하다 보니까) 그 당시 인민들이 겪었던 온갖 고난과 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벌과 토호들이 저마다 ‘땅부자‘, ‘오야붕‘이 되겠다고 전쟁을 벌였으니 민중 학살과 여성 강간, 농지 황폐화 같은 사건들은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서도 ˝삼국지˝를 흠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에 가보라고, 책에 나오는 군주/장수/문사/책략가 같은 이들은 극소수이지만 화살 맞고 절명하거나 겁탈당하는 사람들은 무수할 것이라고.

곰곰생각하는발 2020-12-25 12:56   좋아요 1 | URL
글세말입니다.
건달들의 땅따먹기 놀이인데 너무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듯.

가넷 2021-01-04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삼국지평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지만, 그냥 무협소설인데요... 깡패들 이야기...

지금에야 좀 덜한 것 같긴 하지만, 예전에 삼국연의를 안 읽었다고 하면 실망이랍니다. 너 같이 책을 좋아하는 애가 그걸 안 읽어서 ....

평생 안 읽어도 무방한 건데 뭐가 그리 호들갑인지 모르겠어요.

곰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항상 올리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1-01-11 15:10   좋아요 0 | URL
가넷 님도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 번   생 은   망 했 어  :







담배란 문장의 마침표와 같은 것











"  마지막 장면이 좋아서 영화 전체가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 차이밍량 감독의 << 애정만세, 1994 >> 가 그렇다. 한 여자가 길을 걷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운다.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소리 내어, 운다. 운다, 운다, 또 운다. 얼마나 울었을까 ?  여자는 눈물을 닦고 담배를 피워. 담배란 문장의 마침표와 같아서 이제는 어떤 결심에 다다랐다는 마음의 마침표. 이제 자리를 훌훌 털고 그 자리를 떠나리라. 굳은 결심으로 씩씩하게 걸으리라. 하지만 여자는 벤치를 떠나지 않고 다시 운다. 운다, 운다. 더 크게 운다, 운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 이 장면이 왜 그렇게 좋았을까 ?  사람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독한 고독을 읽었지만 내게는 희망으로 다가왔어. 시작은 엉망이어도 좋아.  과정은 형편없어도 좋아. 마지막 장면만 좋다면 모든 것은 용서가 되니까. 그런 마음. 내 인생의 시작은 엉망이었고 그 과정도 형편없었으니 이제는 화려한 피날레를 희망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지. 인생은 영화와 달라서 라스트 씬만 훌륭하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지. 너무 소란한 장례식장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성공의 증거라면 내 인생은 실패야.  인정한다. 이번 생은 망했어, 여기까지야. 물에 빠진 핸드폰 같다고나 할까. 새로 살 돈이 없어서 수리를 맡겼더니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수리비가 청구된 견적서를 보는 느낌.  새로 살 수도, 그렇다고 고칠 수도 없는. 시발. 뭐랄까...... 그래, 이번 생은 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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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김기덕









김기덕 사태가 발생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김기덕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침묵이 길어지면 공범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짧은 불평을 쏟아내긴 했으나 그것이 나의 죄책감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그동안 가해자의 서사에 열광했다는 사실에 매우 부끄러웠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틀렸다 _ 라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겁한 변명. 곱씹고, 곱씹고, 곱씹은 끝에 내가 다다른 곳은 " 내 안의 김기덕 " 이라는 종착역이었다. 김기덕 영화에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의 공통점은 성녀이자 창녀'라는 양면성'이다. 그런데 낮에는 성녀이자 밤에는 창녀가 되는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섹스 판타지를 절정에 다다르게 만드는 상상 속 역할 놀이 상대역'에 불과했다. 포르노에서 중요한 것은 벌거벗은 몸이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의 종류이다. 


새빨간 가터벨트를 입은 여성을 벗기는 것보다 자극적인 것은 검은 수녀복을(입은 여성) 벗기는 것이다. 우리는 김기덕 영화가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다룬다고 믿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한낱 포르노적 상상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만든 범죄적 역할 놀이'에 놀아난 것이다. 시발, 인정 !  어떤 대상에 대한 숭배는 종종 그 대상에 대한 경멸과 착취를 숨기기 위해 문화적으로 과잉 대표되는 성격을 띤다. 좋은 예가 바로 < 모성애 > 다. 한국 사회만큼 모성애를 강조하고 숭배하는 문화도 없다. 티븨 속에는 엄마라는 단어만 나와도 출연자는 모두 다 울 준비를 하고 있다. " 에브리바디, 크라잉 !!! "


그런데 모성애를 숭배하는 문화의 뒷배를 들여다보면 남성 문화가 여성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모성애에서 우리가 직시해야 되는 것은 엄마의 모성이 아니라 그 엄마의 노동 환경과 그에 따른 노동 강도'다. 사실, 모성애는 육아 노동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모성애가 매우 높은 강도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 분야를 모성애라는 인간 본성 프레임으로 전환하여 그 색을 완벽하게 탈색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육아 노동과 모성애는 같은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 된다. 


이 문화적 강요 속에서 엄마는 모성애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혹은 더 고된 육아 노동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 과부하로 인해 번아웃된, 완벽한 육아 노동에 실패하게 되면 엄마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자본주의는 엄마가 죄책감에 빠질수록 그 죄책감을 응원하고 위로하며 칭찬한다. 불안의 한 종류인 죄책감은 소비를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동 과부하로 지친 엄마의 어깨를 토탁이며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_ 라고 따스한 위로의 말을 전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너의 잘못이야 _ 라는 지적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한국 남성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이 얼마나 뻔뻔한 수작인가. 이 수작의 결정타는 땡추 혜민이다. 노동 과부하에 걸린 워킹맘에게 아침에 1시간 일찍 일어나서 아이와 놀라는 주문은 그가 얼마나 여성의 노동 환경에 무지한 인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집밥과 손맛을 찬양하는 문화도 마찬가지다. 그 찬양의 뒷면은 부엌 노동의 강요일 뿐이다. 한국 남성은 어머니의 손맛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손을 볼 생각은 없다. 다음 사진은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손맛의 본질이다. 


이 사진을 보고도 여전이 입에 침이 고인다면 당신은 파블로프의 개다. 



이처럼 찬양은 착취의 다른 이름으로 작동한다. 성녀가 남성의 섹스 판타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모성애와 손맛 예찬이 여성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듯이 말이다. 우리,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말자. 모성애의 본질은 노동이고 사랑의 본질도 결국은 노동이다. 사랑은 노동을 나누는 행위이다. 그리고 속지 말자. 남자는 여성에게 언제나 잠재적 가해자'라는 사실을. 아니 가해자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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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12-14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독서 모임 멤버 대부분은 영화를 좋아해요. 이분들은 정말 ‘시네필’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독립영화제가 열린 곳에 무조건 갑니다. ‘김기덕 사태’가 생겼을 때 예전에 김 감독의 영화를 보고 좋아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다면서 감독(의 영화)을 비판했어요. 다른 사람은 이런 반응을 ‘뒤늦은 성찰’이라고 비웃겠지만, 오히려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요. 아, 저는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르고요, 김 감독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적이 없어요. 제목만 들어봤어요. 영화든 책이든 그것들의 장점을 너무 좋아하면 단점을 보지 못하게 돼요. 불편하더라도 단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5 11:26   좋아요 0 | URL
김기덕 영화 자체는 매우 훌륭하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전 김기덕 영화 개봉하면 꼭 영화관에서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여성들이 그런 끔직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아이고 시발... ㅎㅎㅎ

han22598 2020-12-15 0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이 시원하네요. 모성애가 육아노동의 한 종류라는것....집밥 신화프레임안에서 갇혀 여성의 노동을 직시하지 못하는것. 이를 간파하지 못하면 가해자가 정확히 누군지도 모른체 (사실 알고 싶어하지 않을지도)...자신을 스스로 해하거나 또는 물귀신 작전으로 다른 여성들도 함께 우리 모두 피해자가 되는 것을 행복(?)해 합시다.로 포기해버리게 되는것.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5 11:25   좋아요 1 | URL
이 글을 쓴 계기가 어느 여성의 인터뷰에서 워킹맘이어서 아이 모유수유가 짧았다. 그런 고백을 하면서 아이를 향해 ˝ 엄마가 미안해 ˝ 라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모유 수유를 하지 않으면 모성애가 없다 ??! 이 죄책감에 빠진 워킹맘은 아이에게 미안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 사주더군요. ㅎㅎㅎ 전 이것이 자본의 속성이라 생각됩니다. 소비자의 불안이 곧 과잉 구매로 이어지거든요. 모성애를 강조해서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그 죄의식이 소비 촉진으로 이어지도록...

han22598 2020-12-16 08:03   좋아요 2 | URL
여성성의 신화를 마케팅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여성주권 획득이 마치 상품을 선택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지고 있다고 기업들이 이야기 하고 있죠. 완전 속아넘어고 있는 소비자들..특히 여성소비자들. ㅠ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3:01   좋아요 2 | URL
한국 영화에서 단골로 말하는 대사 ˝ 엄마가 미안해, 많이 미안해 ! ˝ 하면서 질질 짜는 장면... 참, 웃기죠. 뭐가 그렇게 미안하냐. 왜 학원 못 보내주고, 모유수유 못하고, 맞벌이 생활 하면 아이에게 미안해 하는 것일까 ? 이것은 아이에게 사과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자꾸 모성애란 이름으로 죄의식을 심어준다 말이죠..

han22598 2020-12-18 05:5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학원 못다니고, 모유 못 먹었은게. 엄마 잘못이라고 생각안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 걸까요? 모성애의 허상에 질질 끌려다니지 말아야지.

푸른괭이 2020-12-16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못했지만) 저도 김기덕 영화,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여주들보다 남주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불쌍한 남주들을 구원(?)하고 보듬는 역할까지 여주들이 해야 하니까, 두 겹 세 겹의 여성 착취(?)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점에서는 도스-키 소설이랑 무척 비슷합니다, 역설적이죠. 창녀(막달라 마리아)로 학대당하고 성녀(성모마리아)로 학대당하고. 굉장히 기독교적이면서도 또 한편은 되게 불교적인 데도 있고(<봄여름~~~>, 아무튼 끝까지 보기도 힘든 영화인 데다가 보고 나면 머릿속, 마음속이 너무 복잡해지는 영화였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스틸컷이나 트레일러만 보고서도 (너무 감화되어 ㅠㅠ) 감히 다 볼 엄두를 못 냈는데, 표현 수위를 좀 많이, 대폭 낮추었다면(가령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처럼) 참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ㅠㅠ

모성애와 여성 노동 착취, 코로나에 더 공감됩니다 ㅠㅠ 진짜 애 엄마 아니고서는 이해 못 할 고통이, 아이에게 삼시세끼를 차려 먹이는 것이거든요 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2:57   좋아요 0 | URL
괭이 님 댓글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는데 영화 < 악마를 보았다 > 에서 제일 유명한 장면이 간호사 강간당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얼마나 포르노적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악마보았다 검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연관검색어 0순위. 최민식이 간호사 강간하려는 순간 국정원 이병헌이 나타나 최민식 아킬레스를 끊습니다. 그리고는 이벙헌이 강간당할 위기에서 벗어나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간호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지시합니다. ˝ 이 사람 응급 치료를 해주세요. ˝ 만약에 이 영화를 여성 감독이 만들었다면 강간당할 뻔한 여성에게 강간하는 남자의 수술을 도와달라고 하는 설정이 가능할까요 ? 이건 그 여성에게는 말도 안되는 폭력이죠.

기억의집 2020-12-16 1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 사람 영화 너무 싫어해서.. 파란대문인가 뭔가 보고 충격 받아서.. 안 보고 왜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구요. 사이러스님 말대로 뒤늦은 성찰은 의미 있는거죠.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가... 그렇군요. 저런 대사 쓰면서 작가는 얼마나 기세 등등 했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6 17:11   좋아요 1 | URL
악마를 보았다를 쓴 각본가가 박훈정입니다.
영화 < VIP > 만든 감독이죠. 이 영화 정말 쓰레기죠. 최악의 영화 중 한 편으로 뽑히는...

scott 2020-12-1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영화중에 딱 한편 꼽으라고 하면 봄-여름 -가을 -겨울

곰곰생각하는발 2020-12-22 16:20   좋아요 1 | URL
전 김기덕의 섬이었습니다. 참.. 이 감정 묘하게요.. 이 쓰레기 새끼...
 
























30평 아파트, 오백충 리스펙1), 2000CC 자동차, 통장 잔고 1억








한 독일 심리학자는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 갇힌 포로의 자살을 연구하다가 주목할 만한 특이점을 발견했다. A그룹은 산더미처럼 쌓인 무거운 돌을 한 지점으로 나르고 나서 다 옮기고 나면 다시 원위치로 돌을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반면, B그룹은 독일군의 군복을 세탁하고 손질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 심리학자는 이 두 그룹의 자살률을 조사했는데 A그룹은 다른 작업군에 비해 자살률이 높았고 B그룹은 자살률이 매우 낮았다. 심리학자는 A 그룹 포로의 심리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 의미 없이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포로들은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는 삶에 대한 목표와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반면에 B그룹은 단순한 일이기는 하나 일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A그룹의 포로들은 자신들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시시포스의 노동 형벌은 조롱이자 무시이며 존재 부정을 뜻하는 형벌이었다 !  결국, 그들은 인생의 목적을 잃고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라고 믿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자살하는 유대인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이 끝나고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유대인의 자살률은 매우 높았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강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의 자살률이 낮았던 이유에 대해 " 수용자들은 죽는다는 것보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그 죽음의 과정에 관심을 뒀다.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었고 그들은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다름아닌 삶이었다.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 라고 말했지만 그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수용소에서 존중받지 못했던 불안들이 그의 생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기아와 빈곤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생존 불안보다는 사회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하는 존중 불안이 영혼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스 로슬링은 << 펙트풀니스 >> 에서 빈곤 문제를 단순히 소득의 문제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경제 불평등이다.  과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다. 돈은 생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지만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프랑스의 19대 대통령인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중산층에 대한 정의이다. 


1.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을 것

2.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할 것

3. 악기를 하나 정도 연주할 수 있을 것

4.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5. 공분에 의연히 참여할 것

6.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다음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이다. <미국의 중산층의 기준>


1. 자신의 주장이 떳떳할 것

2.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3.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4.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을 것


그렇다면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일까 ? NH투자증권에서 중산층의 기준을 조사한 대한민국 중산층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중산층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 소유할 것

2. 월급이 500만 원 이상일 것

3. 자동차는 2000cc급 이상 중형차를 보유할 것

4.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을 보유하고 있을 것

5. 해외여행을 1년에 1회 이상 다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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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12-13 1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화의 진전 기준으로 따지자면 한국은 (미국/프랑스에 비하면) 후발 주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때문인지 금권이나, 물욕을 숭상하는 문화가 미/프보다도 더더욱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자본주의라는 구조 자체가 이윤의 증식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체제이긴 한데 한국 같은 경우는 ‘우리 모두는 돈에 미친 속물이며 속물이 아닌 자가 도리어 비정상이다‘라는 식의 풍조가 만연한 듯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12-14 10:53   좋아요 2 | URL
국가마다 근대화 기간이 다르지만 대한민국이야말로 근대화 기간이 짧습니다.
근대화의 핵심은 에티켓인데 한국 근대화는 에티켓을 배울 시간이 없었죠.
그 후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