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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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직장인 두명을 조명한 적이 있다. 약간 각색을 더한다면 내용은 이러하다. 한 사람은 회사에서 항상 웃는 얼굴이다. 팀원들이 무슨 부탁을 해도 항상 매사에 적극적이며 일이 주어지면 주도적으로 한다. 회식 때도 노래방에서 기똥차게 뽑아낼 수 있는 몇 곡의 노래가 있는데 이는 아마 혼자 연습을 많이 한 것 같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주식부터 예술까지 상당히 많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조금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담배피는 10분 내외에 그와의 대화는 은근 감칠맛이 난다.

 

다른 한 직원은 그와는 다르다. 아침에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출근을 해서는 상사가 지시하는 일 하나하나를 왜 자기가 그 일을 해야하는지를 따진다. 팀원들의 부탁을 다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별 이유없이 자기 시간을 타인에게 내주는 걸 꺼려한다. 퇴근 후에 갑작스런 회식이 잡히면 그는 선약이 있다고 자리를 피한다. 사람들은 그를 개인주의적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하는데 아마 그는 취미생활로 일주일에 한두번씩 악기 레슨을 받는 것 같다.

 

이 두사람의 스트레스 지수를 검사했다. 결과가 어땠을까. 매사에 긍정의 힘이 넘쳐나고 적극적인 직원은 심각한 우울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판명났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았고 자살 위험성도 적지 않았다. 반대로 매일 얼굴을 찌푸리며 까칠하기 그지없는 다른 직원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내의 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병철의 '피로 사회'는 이런 현대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문제를 신선하게 접근한다. 과거 모더니즘 시대는 규율과 법칙, 원리, 강제를 통한 관리체제가 개인을 구속하고 일하게 만들고 압박을 주었다면 현대는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바로 긍정의 힘, "예스 유 캔"의 마법이 그것이다. 진위를 따지던 시대, 서구사회의 문화가 진리이던 시기를 지나 문화적 다양성, 서로의 기호가 진리를 상대화하는 시대의 사회 구성원들은 타인, 타문화, 타업무와 같은 기타 자극에 대해 보다 유연한 접근을 요구받는다. 일단 다 긍정하고, 모두를 정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흡수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고로 어떤 조직에서의 이질성과 타자성은 축소되고 대기업에서 그렇게 부르짖는 소통과 협력, 그리고 무한한 자기 긍정과 자신의 능력의 과잉을 고양할 것을 요청받는다. 긍정의 힘이나 자기개발, 다양한 분야를 어우르는 통섭적 접근, TRIZ, 어학, 시간관리, 멀티테스킹, 하다못해 두통이나 심한 피로가 몰려와도 약물(포도당 링겔, 피로회복제, 두통약)을 먹어가며 자신을 혹사시킨다. 이렇게해서 자기과잉을 성취하는 자가 글로벌 시대에 진정한 승자이자 마지막에 웃는 자이다.

 

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기 긍정의 최면에 빠져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병리현상을 경험한다. 면역, 자기방어의 벽을 허물고 무방비상태로 쏟아지는 정보, 대인관계, 처리할 일들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한병철의 진단대로 현대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 즉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결국 긍정의 시대, 시장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한 개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학대하며 자책하며 썩어져간다.

 

이러한 과잉 input 속에서 한 개인은 깊은 사색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창의력을 권장받지만 그것은 한 영역 안의 정보를 다른 영역에 카피하거나 적용하는 영역을 넘나드는 모방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방만한 일들을 처리하지만 산만하고 불안하며 그 마음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따져보고 걸을 시간이 없는 탓에 등떠밀려 앞으로 전진한다. 결국한참 잘 달려가는 능력자는 어찌보면 쉽게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격이다.

 

저자가 결론이나 대안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도는 명확하다. 긍정의 힘을 기반으로한 성과사회는 결코 규율사회보다 진보한 패러다임이 아니다. 종국에는 개인 스스로를 (내적 암시를 통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만드는 악순환을 조장할 뿐이다. 인간은 멀티태스킹이나 치밀한 시간관리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병리적 고통 속에 빠질 뿐이다. 따라서 충분한 사색과 여유, 적당한 내적 면역체계의 복구, 나아가 '탈진의 피로'가 아닌 '무위의 피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나또한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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