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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결투 - 일본 현대문학 대표작가 에센스 소설
다자이 오사무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한 권의 책, 5편의 소설을 읽고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 한권에 한해 다자이 소설이 갖는 묘미를 말한다면 '이야기'가 아니라 '실험적인 형식'과 치밀한 심리묘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1부 중단편 소설 4편, 2부 장편 소설 <쓰가루>, 그리고 3부 다자이 문학을 찾아서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들은 1935년부터 1944년에 쓴 작품들이다.

가장 앞 쪽에 실린 <여자의 결투>부터 그 실험적인 형식이 눈에 들어 온다. 19세기 독일작가 헤르베르트 오일렌베르크 원작을 일본 소설가 모리 오가이가 번역한 <여자의 결투>를 다자이가 개작한 것이 이 소설이다. 다자이는 원작자의 심리묘사가 뛰어나다고 설명하면서 한 소설가의 아내와 그와 내연관계에 있는 여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결투, 그리고 이를 몰래 지켜보는 소설가를 묘사하면서 자신의 창작방법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형식으로 소설을 진행시키고 있다.

다자이 자신의 동반자살 실패 경험이 작품화된 <광대의 절규> 역시 그 형식이 독특하다. 동반자살에 실패한 요조, 그가 머물고 있는 요양원에서 그를 돌보는 간호원 마노, 요조를 찾아온 친구 히다, 그리고 요조의 사촌 고스게 등의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로 '나'(작가)가 중간중간 등장하여 소설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고 거기에 이런저런 창작에 관한 첨언들을 늘어 놓는다.

이 소설은 도입부에서 "영화를 한 편 만들기로 하자.",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등장인물은 누구누구가 좋겠다.", "좀더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필요해." 등의 대사가 까만 화면 위로 흘러나오는 장 뤽 고다르의 1972년 영화 <만사형통>을 떠오르게 한다. 이 영화는 "이 영화는 이야기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라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보다 '실험적인 형식'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에 실린 일련의 소설들은 <만사형통>과 닮은 꼴인 셈이다.

<걸식학생>은 뛰어난 심리묘사로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소설이다. 여기에도 작가가 등장하는데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학생으로부터 훈계나 듣는 한심한 인물이다. 어린 학생의 훈계에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섬약한' 서른 두살의 작가. 바로 그가 다자이였던 것.

장편 <쓰가루> 역시 실험적인데,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인 허구가 이 소설에는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러 역사서와 풍물지의 인용이나 자신의 소설을 인용하는 점도 다른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점이다. 한 편의 기행문을 읽듯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쓰가루>에는 본가를 찾은 다자이가 비오는 오후 정원을 걷다가 개구리가 퐁당하고 연못으로 뛰어든 소리를 듣고 바쇼의 하이쿠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연못가에 서 있는데 퐁당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개구리가 물에 뛰어들며 낸 소리였다. 별볼 일 없지만 선명한 소리다! 그 순간 나는 바쇼의 하이쿠 중에서 옛 연못에 관한 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작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연 사람들이 그 작품의 어느 구석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라고 말하고, 자신은 유명 작품에는 뛰어난 작품성이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면서 교육이 나쁜 탓이라고 지적한다.

"바쇼의 이 하이쿠에 관해 우리는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아 왔는가? 한적함이 느껴지는 어느날 오후, 어두컴컴한 연못에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든다. 그 여운이 조용히 퍼져나간다. 새 한마리가 울 때, 산이 더욱 조용해진다는 식으로 우리는 교육을 받아온 것이다. (......) 지금까지 이런 해석이 행해졌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여운이고 뭐고 없다. 단지 퐁당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였다. 빈약한 소리! 바쇼는 바로 이런 소리를 듣고서 자신의 몸 속에 파고드는 무엇인가를 느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문학에, 특히 시에 대한 국어교육은 단연 분석에 있었다. 한시간 내내 해부해 놓은 시에는 향기가 없었다. 교과서에서 접하는 시가 내가 아는 시의 거의 전부였던 그 시절 해부당한 시들은 나에게 '시'가 아니었다.

다자이가 떠올렸던 바쇼의 하이쿠를 옮겨 본다.

"적막한 옛 못 개구리 뛰어드네 물소리 첨벙"

일본어 기능을 사용할 수 없어 원문을 옮길 수가 없어 안타깝다.

3부 다자이 문학을 찾아서에 실린 소설가 한수산의 '내 취재노트 속의 다자이 오사무'에서는 다자이에 대한 한수산의 애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세계와 작가와 고향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사양관'이라는 여관으로 변했다는 다자이의 생가에 대해 들려주는 한수산의 이야기에서 세월이 가져오는 쓸쓸함이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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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몇 달 전에 주로 소설을 읽고 온라인으로 그 감상을 서로 나누는 어느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하 <키스...>)과 철학 에세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그 모임에서 선정한 그 달의 도서였다. 제목에서부터 궁금증을 유발하는 신선함이 느껴지는 책들이었다.

주문한 책을 받아 들었을 때의 첫 느낌 역시 제목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신선함이었다. 두 책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데, 표지 디자인과 판형이 기존의 다른 소설책이나 에세이집과는 상당히 달랐다. 책장 넘기기가 용이한 제책 방식에 간지용 색실 부착까지 일단 '외모'는 상당히 맘에 들었다. 첫 만남에서 이 책은 말하자면 좀더 만나보고 싶은 '상대'로서 충분한 평점을 얻은 셈이다.

각설하고, <키스...>는 상당히 낯선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전기(傳記)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 그렇고, 주인공이 실제 인물인 점 또한 그랬다. 이 소설은 주인공 이사벨에 관한 이야기 중간중간 전기작가들의 주인공에 대한 태도나 글쓰기, 혹은 그들의 글을 인요한 부분은 전기작가들이 참고해도 좋을 만큼 실용서의 분위기도 갖고 있다. 게다가 설문, 도표, 사진 등은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요소들이라 소설이라가보다는 한 남자가 연애를 하면서 쓴 일기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읽는 동안 종종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은밀학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사벨은 전기의 주인공으로서, 소설의 주인공으로서도 너무 평범해 보인다. 오히려 그 점이 나에게 어떤 공감을 주었던 것 같다. 부모형제와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어린시절, 직장생활, 생활태도 등 이사벨의 면면들이 나와 무척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동생이나 엄마에게 애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염증을 느끼는 점, '그러면 좀 어때' 하다가도 짜증나는 상황이 닥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는 태도, 소설 속 주인공(히스클리프)에 대한 짝사랑 등 우리들이 자라면서 혹은 성인이 된 후에도 흔히 보이는 태도와 생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30대 여성이 이사벨인 것이다. 이런 이사벨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사벨에게 전폭적인 공감을 느낀 반면 화자인 그는 남성이기 때문에 이사벨의 태도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발생하는 것 같다. 따라서 남성 독자의 느낌은 또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이사벨이라는 한 여성에 대한 보고서인 동시에 만남에서 이별(이별하게 될 것으로 봤다)에 이른 남녀간의 연애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스...>는 작은 에피소드들로부터 어떻게 여성의 특징을 읽어 낼 수 있으며, 어떻게 남녀의 차이를 읽어 낼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매우 신선한 소설이었다. 또한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로부터 한편의 소설 혹은 '인문학적 보고서'를 만들어 내는 저자의 능력 또한 특별하게 다가왔다. 외모가 전부일 수는 없지만 이번 경우 '수려한' 용모만큼 내실 있는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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