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있다. 모신문의 신간 소개 코너에 실린 <인숙만필> 리뷰를 읽은 게 2003년이고, 그 즈음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법무부장관 제의가 들어왔을 때 한 친구에게 어찌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는 모 여성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 친구가 시인 황인숙이고, <인숙만필>의 저자라는 사실도 그 즈음 알게 된 사실. 당시 주변의 누군가가 추천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했던 것이 벌써 3년이나 지났다니, 정말 쏜살같은 세월이다. 

자주 들르는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또 그렇게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 즈음 소개된 신간들이 헌책방에서 하나 둘 보이는 걸 보면 신간이 헌책방으로 흘러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2-3년쯤 되는 모양이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때였지만, 나에게는 문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진 해로 기억된다. 대학 이후 처음으로 문학강연을 듣기도 하고, 책을 소개하는 라디오 방송도 꽤 열심히 들었던 것 같다. 그 때 들었던 문학강연의 진행자였던 문학평론가가 당시 여러 작가들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녹취해 <한국문학의 사생활>이라는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 때 기억 중 하나가 이 책을 읽는 동안 줄곧 떠올랐다. 진행자가 바로 얼마 전에 산문집을 펴낸 소설가에게 농담삼아 판매부수를 물어 모두 웃었는데, 소설보다 잘 안 팔린다는 소설가의 대답이 이어져 또 한번 웃었었다. 당시에 그 소설가의 소설에 푹 빠져있던 나는 그의 산문까지 두루 읽었었는데,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 외에 별다른 느낌을 갖지는 못했다. 있었다면 그저 막연히 작품과 연결되는 무언가 있는 것도 같다는 짐작뿐. 농담의 끝은 잘 안 팔려도 자주 쓰고, 산문집도 자주 내라는 진행자의 주문으로 끝났다. 

그 때나 지금이나 소설가나 시인이 쓴 산문집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니다. 산문을 그저 신변잡기적인 글쓰기로 보는 시각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숙만필>을 읽으면서 산문에 대한 나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신변잡기적인 글 속에 숨겨져 있는 보석처럼 빛나는 소중한 그 무엇을 발견한 것이다. 그제서야 소설가에게 산문쓰기를 주문했던 문학평론가의 속뜻을 알 듯했다.

<인숙만필>을 통해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을 느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 속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던 그 따뜻함을 이 책에도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사물이나 사람들 그리고 동식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나 관찰이 이게 바로 시인의 시선이고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을 일깨웠다. 그리고 한층 저자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의 친구가 된 것 같은 착각. 함께 교보문고와 세종문화회관을 가고, 남산의 야외식물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녀가 즐겨 듣는 음악을 듣고, 그녀가 권해주는 책을 읽은 느낌. 남산 아랫 동네를 내가 사는 동네처럼 훤히 알 것 같고 거기 그렇게 사는 친구가 있어 따뜻해지는 느낌. 

글을 통해, 특히 산문을 통해 친근하게 느껴진 작가가 있다. 그를 극장에서 스친 적이 있는데 얼마나 친근하게 느꼈으면 "어머! OOO씨, 영화보러 왔어요?" 할뻔 했다. 산문은 이렇게 저자와 독자를 끈끈하게 이어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인숙만필>은 산문과 작품과의 연관관계를 느끼고 작가의 사상적 흔적들이 산문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을 나에게 선물해주었다. 쏜살같은 세월을 보낸 뒤 만나게 된 짧지만 소중했던 순간으로 <인숙만필>은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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