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은 있다 -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민들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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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것’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똑같은 것일까요? 우치다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배우는 것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알쏭달쏭하다. 대답을 유보한 채, 저자는 대화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정한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삼자인 것입니다. 대화할 때 제삼자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대화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말할 생각도 없던 이야기들이 끝없이 분출되는 듯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처음부터 형태를 갖춘 ‘내 생각’ 같은 미묘한 맛을 풍기는 말이 그 순간에는 넘쳐 나옵니다. 그런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58-59쪽).”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대화’라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먼저 있고,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말이 왔다갔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68쪽).”


“대화는 아주 평범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잘 생각해보면 두 가지 지점에서 희한한 사건입니다. 한 가지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한 그 말을 통해서 안다는 것.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말을 하도록 이끄는 것은 듣는 이의 욕망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89-90쪽).”


이어서 그는 소통을 언급한다. 교환되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잘 모를 때 오히려 소통은 활발해진다고.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되면 소통을 계속할 의욕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의 진정한 목적은 메시지의 정확한 전달이 아니라 메시지를 주고받는 그 자체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인류는 소통을 계속하기 위해 ‘의사소통이 간단하게 이뤄지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숨겨’ 왔으며, ‘소통은 늘 오해의 여지가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소통에서의 오해와 관련하여 그는 자크 라캉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은 불확실하고 애매한 위치에 멈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정정(訂正)의 길을 열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막히고 걸리고 주저하고 고쳐 말’하는 것처럼,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머뭇거림’과 ‘막힘’이 그대로 표현된 문장은 좋은 문장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문(問, 門)이 열린’ 문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말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장을 전진시키는 힘은 말이 생각을 채워주지 못하는 데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문장’. ‘버둥거리고’ 있는 만큼 ‘오해의 폭’이 확실히 확보된 문장의 예로 그는 다자이 오사무를 든다. ‘이해’와 ‘오해’가 닿을 듯 말 듯 빠듯하게 접근하면서 절대 100퍼센트 이해는 되지 않게 쓴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은 수수께끼와 같다.


‘한 권의 책에 심을 수 있는 수수께끼는 논리적으로 무한’하기에, ‘논리적으로 보자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는 무한대인 셈’이다. 인간의 창조 행위 역시 대화의 구조와 닮았다. ‘자신이 왜 작품을 만드는지,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 점이 새로운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따위의 것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인간은 결코 그 무엇도 창조하지 않았을’ 거라고.


저자에 따르면, 사제관계 역시 작품과 예술가, 대화와 닮은 구조다. “한 스승에게 여러 제자가 있지만 모두들 그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합니다. 바로 그 실패가 제자의 의무입니다. 실패 덕분에 스승과의 대화를(스승의 사후에도) 계속하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며 ‘수수께끼’에 관해 끊임없이 논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씩 정체성과 주체성이 기초 지어지는 것입니다(131쪽).” ‘실패하는 방식의 독창성’에 의해 다른 어떤 제자로도 대체될 수 없는 둘도 없는 사제 관계로 계보를 잇게 된다는 것.


『스승은 있다』는 제목과 달리 제자, 즉 배움에 관한 책으로 읽혔다. 소통, 소통.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소통을 문제 삼지만 정확한 정보의 전달은 오히려 소통을 단절시킨다는 것. 이해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오해의 폭을 확보함으로써 소통을 지속시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소통의 본래 목적이라는 것. 새삼스러웠다. 소통에 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내가 끊임없이 글쓰기에 홀리는 이유 역시 소통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해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오해로 인해 촉발되고 지속되는 대화, 즉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확장된 나로서의 당신, 즉 타자를 알아가게 되는 것인지도. 이렇게 대화를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배움의 과정 아닐까? 그러니 타츠루 선생이 앞서 던진 질문의 답은 자명해 보인다. 역시 ‘스승은 훌륭하다’(원제).


타츠루 선생님, 제 대답이 맞나요? 대답 대신 알쏭달쏭, 모호한 눈빛으로 바라볼 듯. 하여 대화는 지속되리라. 그러고 보면 독서 역시 길고 긴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오해의 커뮤니케이션’! 대화가 이어지는 한, 배움 역시 계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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