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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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간은,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어떤 하루는,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게 한다.

-p.194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발이 푹푹 빠졌다. 머뭇거리고 망설였다. 돌아서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섰다가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알 수 없는 끌림과 돌아섬으로 한 달 가까이 이 책과 있었다. 가붓한 책을 두 손에 안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멀리서 가늘게 파도소리가 울렸다.

'이 소설을 정미경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유고작이다'

 작가의 죽음은 늘 실감 나지 않는다. 책이 있기 때문에, 책이 살아있기 때문에, 거기에 그도 있다.

누군가의 말은 그녀가 살아 건네는 말처럼, 분명 그러했다.

 

시간의 앞뒤와 공간이 뒤엉킨,

섬 사이의 섬.

 

  마음의 병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우는 '미친 애의 엄마'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엄마에게 쫓겨 이 섬으로 왔다. 이곳은 엄마의 유년이 담긴 곳이고 그때의 동무였던 정모 아저씨가 도망치듯 돌아와 숨어든 곳이기도 하다. 더운 여름 서커스 천막 속에 홀로 남겨졌던 어린 판도도 계절 없이 '독하게 추운 날들'을 지나 이삐 할미 손으로 이곳에 들었다. 섬사람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귀와 입을 닫기로 했던 그때의 아이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내지 못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섬에 든 사람들. 그들은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고 빠르게 달리던 시간에서 위태롭게 쏟아졌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는 하늘과 바다와 바람의 풍경 속에 상처를 씻고 눈물을 흘리며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앞사람의 걸음에 제 발을 포개며, 무어라 채근하지 않고 다만 가파른 숨소리를 염려하며. 서로를 눈으로 더듬어 보살폈다. 휴대폰의 온기가 있던 손엔 따뜻한 말들이 고였다. 텅 비어 있던 이우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기억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며 스스로 차오르고 있음을 느겼다.

  난감하고 버릇없어 보이던 이우의 상처와 단단하게 도서관을 지어가던 정모 아저씨의 아픔 들은 서로의 마음에 기댈수록 섬 공기 속에 흐리게 번져갔다. 아무것도 아닌 듯이, 판도가 바라보던 섬과 섬 사이의 붉은 덩어리처럼, 아.름.답.게.

  이우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구절 앞에서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머릿속이 환해지기 시작한' 판도. 이우를 찾아온 엄마의 존재에 질투를 느끼기도 하는 그의 모습은 반가운 균열이었다. '책으로만 읽었을 뿐인' 많은 일들이 판도의 인생에도 일어나려 하고 있었으니까.

 

해가 질 시간이다. 이렇게 물구나무를 서서 크고 붉은 덩어리가 섬과 섬 사이로 흘러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배꼽 깊숙한 곳이 따끈해졌다. -p.26

     

 빛나는 소금과 바다 냄새들 틈에서, 나도 잠시 마음을 말렸다. 

 섬처럼 떠있던 문장들은 다시 읽을수록 선명해져 곳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나갔다.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통증과 슬픔들은 읽지 않아도 느껴지고 만져졌다. 나 또한 그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것일까. '터무니없는 죽음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되는' 시간을 '밀물과 썰물을 받아들이듯' 살아내고 있다는.

어쩌면 미완의, 잠시 발이 묶인 이 호흡에서 무너져내려 멀리 허공을 바라보고 희미한 문장을 더듬어보는 일이 이 소설의 완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소금 창고는 바람이 지나는 길에 있다. 바람을 맞으며 정모는 바닷가 마지막 소금 창고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둔덕이 사라지면서 몽돌밭이 바다까지 이어진다. 거의 매일 이곳으로 오지만 풍경은 매번 달라진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내가 걸어오지 않았던 또 다른 풍경이 보인다. 애잔하게 나부끼는 삘기, 하늘, 바다, 섬과 섬, 섬 뒤의 섬. 정모에게 이것들은 풍경도 색채도 아닌 시간이다. 언젠가 이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때도 바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자글자글 몽돌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 역시.

정모는 눈을 감고 바람이 실어 온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저 아이는 떠날 것이고 소금 창고 도서관도 문을 열겠지. 그 다음엔. 그 다음은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될 것이다.

-p.58

 

 고통 속에서도 잔잔히 퍼지는 삶의 단호함을,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만히 있어주는 자연의 고요함을, 작가는 아름답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리웠던 따뜻함이 못내 슬펐다. '이 소설을 쓸 무렵부터 그녀의 몸이 급격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으나 그녀의 문장은 꼿꼿이 서서 저무는 삶을 지나며 들려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아픔도 행복도 결국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멀리서 보면 비슷하게 빛나는 별이거나 노래라는 걸.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툭 끊어지듯 찾아오는 죽음도 그 틈에서 꿋꿋이 이어지는 삶도. 한줄기 바람으로 뒤섞이는 가벼운 것이라는 걸. 그러니 애써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에게 말해주는 듯 했다.     

 

 그녀가 남겨준 아름다운 문장 속에 그렇게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당신의 아주 먼 섬'이 있다.

귀와 입을 닫고 가만히 담겨 있을 만한, 그곳에 들러 숨을 고르면 좋겠다.

  

 산책하듯

 이 책을 거닐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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