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자다워야 한다는 것, 여성스럽다는 것.

딸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 된다는 것.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어 당연하게 요구되는 희생.

이건 다 무얼 위한 말들인가.

여자니까 조신해야 하고,

여자니까 의견을 세우기보단 수용하는 쪽이 되어야 하고,

여자니까 나의 일은 누군가의 만족을 위해 미뤄둘 줄 알아야한다는

원래 그런 거야, 라는 그 생각들.

그 모든 것들을

넌 잘 배우고 잘 자란 괜찮은 여자야, 라는 인정을 받기위해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이해하고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숨이 막혔다.

 

"남자들한테 싫다고 한 적 있어?"

"응"

"그러면 뭐라고 해?"

유리는 또 웃었다. "안 믿어."

"여러 번 말하면 되잖아. 화를 내."

"냈어." 우리는 수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들은 내가 화낸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싫은 척하는 거라고 생각해." -p.230

 

폭력과 강압으로 피해를 입고도 내가 술을 마셔서, 짧은 치마를 입어서, 그들에게 여지를 주어서, 나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일은 아닐까, 나는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까, 로 이어지던 진아와 수진, 유리의 생각이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가슴이 메였다. 그들의 상처와 고통 이후 일어난 일은 더욱 참혹했다. '그랬어? 그럴 수도 있지. 그러게 왜 따라갔어.' 로 시작해 결국 누구의 이해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자신을 짓누른 가해자 앞에 홀로 남아 내 탓으로 돌아서게 되는, 이 사회가 만들어가는 터무니 없는 결론을, 목격하고도 어찌할 수 없는 나를,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실수였다고? 그래. 얼마든지 양보해서 실수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야.

왜 내게 실수했어? 너는 내 몸에 실수를 하고 맘 편히 사라졌는데, 왜 내 몸은 그저 실수로 끝나지 않지? 왜 내 몸이 아픈 거지? 왜 네 실수 때문에 내 몸이 찢겨 나가고 뒤틀려야 하지. 수진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프고, 소문날까봐 두려워하고, 누구에게 말도 못 하면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실수라고? 하지만 너는 현규 같은 남자에게는 실수하지 않겠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번역가에게도, 저 교수들에게도, 너는 얌전하고 착한 남학생처럼 앉아 있겠지.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하니. 창고를 떠올리나? 네가 실수해도 상관없는, 네가 원하는 대로 실수해도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그 창고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니?

그 창고가 나야?       

 -p.238

 

옛날 이야기다, 로 담담히 맺는 듯 하지만 수진의 기억은 그 때의 통증과 분노가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어떤 무엇이, 누가, 여자는 그렇게 해도 된다는 존재로 여기게 만든 것일까. 침묵이, 방조가, 외면이 '신경 쓰지 마. 네가 신경 쓸 것 없어.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 p.202, 강화길 「호수-다른 사람」, 『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중) 라고 여기고 피하려 한 마음이 그들을 더없는 나락으로 밀어버렸다.

 

이건 욕구를 참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욕구를 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데서 발생하는 문제다. -p.259

 

결국 가해자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다른 손을 잡고, 복수를 위해 수진도 여자도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선택하며 '다시 강간당하느니 차라리 강간하는 인간이 되고 말겠다'로 이어지는 분노는, 그 삶은, 결국 엄마 닮아 팔자가 그렇다는 말로, 걔가 그렇지 뭐라는 말로, 그럴 줄 알았다는 말로 사람들 입에 메아리가 되어 번져갔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기억되는 여성 범죄들. 가해자의 극악무도함은 사라지고 피해자의 피해사실과 어떻게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가를 소비하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또 다른 얼굴의 가해자가 아닌가.

 

너무나 많은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입을 우린 가진 적이 있었던가.

       

나는

내 생각대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주입되어온 생각들로 생각하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단지 나로 살고 싶을 뿐인데,

누군가를 향한 강요된 희생도 양보도 없이

나 자체로 나의 삶을 살아가고 싶을 뿐인데.

순간   

이 말을 꺼낸 나를 건방지게 볼까봐 고민하며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기 위해

부드럽게 거절하기 위해 노력하려하는 나는

여자로 태어났을 뿐인

나는,

 

무엇이 다른 존재인가.

무엇이 다른 존재여서 갖고 노는 물건처럼 여기려 하는가.

 

소설의 마지막은 마무리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책을 읽고 있는 '너'에게 던진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마지막 장.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 순간, 대답할 사람은 바로 너니까. 그렇다. 이제는 네 차례다.'

잘못 끼워진 단추 주변을 머뭇거리던 손이 포개지기 시작했다. 찢기고 다칠 것을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당한 피해를 전하기 시작한 사람들.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녀들에게 스며들어 분노하고 앓았던 그 시간들을,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이야기가 부디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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