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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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등에다 꾹꾹 밑그림을 그렸다. 모래알처럼 흩날렸던 시간의 자리가 하나, 둘 생겨났다. 바다처럼, 고요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자리가 다시 요동치며 내게 피와 살이 될 고통이 되길 바랐다. 살아가다 당신을 다시 만나면 묻고 싶다. 당신의 바다는 안녕했나요? 모르는 척, 쓸쓸한 척, 지친 기색으로. 그러면 당신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고요함으로 입술을 열어줄까. 84일의 불운 끝에 찾아 왔던 행운을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나 아름다운.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눈물이 핑 돌고 마는 책.

아름다운 사람이 살고 있는 책. 『노인과 바다』

 

문장은 아늑하고 매끈하다.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았을 법한, 선한 老어부가 그렇게 등장한다. ‘노인의 모든 것은 늙거나 낡아 있었다.’ 아무도 그의 배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에게 낚시를 배운 한 소년과 가난만이 노인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85일 째의 배를 밀고 바다로 다시 나아갔다. 노인의 여유와 담담함이 시간이 거저 지나가지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노인은 끊임없는 기다림으로 청새치를 바늘에 낚았다. 실체를 볼 수 없는 거센 힘과 무게가 노인을 쥐락펴락했다. 사흘이나, 노인은 청새치를 배 밑에 달고 망망대해를 떠다녔다. 허기와 두려움도 밀어두고 청새치를 배 위로 낚아 올리기 위해 사투했다.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워 이기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그런 중에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현상들과 기적, 용기, 시간을, 자신을 인정하며 겸손했다.

 

 

그러다가 노인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육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상관없어, 노인은 생각했다. 언제든지 아바나의 불빛을 바라보고 돌아갈 수 있으니까. 해가 지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남았으니까 아마 그때까진 녀석이 위로 떠오를 거야. 설령 그때까지 떠오르지 않더라도 달이 뜰 땐 떠오를 거야. 나는 아직 손에 쥐도 나지 않고 기운도 팔팔해. 낚싯바늘이 주둥이에 걸려 있는 쪽은 저놈이야. 하지만 이렇게 배를 끌고 가다니 정말 대단한 놈이야. 바늘이 달린 철삿줄까지 삼킨 채 주둥이를 꽉 다물고 있는 게 틀림없어. 놈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내가 어떤 놈을 상대하고 있는지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좋으련만. -p.48

 

"저 물고기 녀석도 내 친구지." 노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놈은 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굉장한 물고기야. 하지만 난 놈을 죽여야 해. 별들을 죽이려고 애써야 하는 게 아니니 참 다행이야."

만약 사람이 매일 달을 죽이려고 애써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노인은 생각했다. 달은 도망쳐버리고 말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만약 사람이 매일 태양을 죽이려고 애써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노인은 생각했다. -p.78

 

오래가기에는 너무나 좋은 일이었어,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모든 게 다 꿈이라면, 내가 저 물고기를 낚은 일이 전혀 없던 일이고 그저 혼자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는 거라면 좋을텐데. -p.107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노인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난 그건 죄악이라고 믿어. 죄악 같은 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자, 그는 생각했다. 죄 말고도 지금은 문젯거리가 충분하니까. 게다가 나는 죄가 뭔지도 아는 게 없잖아. -p.109

 

 

책 귀퉁이를 접고 또 접었다. 노인이 하는 혼잣말이 나를 흔들었다. 시간이 멈추고 눈이 감겼다. 코끝을 붙잡고 조금, 울었다.

그를 따라 바다를 나섰을 때, 나도 조금은 그의 흉내를 내며 낚시를 시작했다. 어서 빨리, 무엇 하나 걸려들길 기다리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노인의 혼잣말을 무심히 구경했다. 뭐가 이리 여유로울까, 속도 좋다, 고 속으로 웃으며. 그러다 금세 지루해졌다. 아무것도 낚이지 않는 낚싯대도 싱거웠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출발할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더 빛나는 눈으로 물고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한결같았다. 물고기를 낚았을 때도, 사투 끝에 청새치를 배에 묶었을 때도, 상어들에게 물고기를 모두 내어주었을 때도. 그는 한결같이 닥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만을 묵묵히 했다.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살아냈다.

그 바다가 우리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무엇하나 의지할 곳 없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양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 건, 노인의 혼잣말들이 내 마음에 온전히 닿아 포개어졌기 때문이었다. 망망대해의 삶에 찌를 던지고 무엇 하나 걸려들길 기다리며 버둥대고 있던 나. 잡은 것의 기쁨도 채 누리지 못하고 다른 것을 찾던 나. 그러다 놓쳐버린 행운에 후회하고 불행해져 모든 것을 자포자기했던 나. 한쪽 눈을 감고, 거센 힘에 온전히 나를 맡긴 채 끌려가던 나. 내가 노인이라면, 나는 결코 그 물고기를 붙잡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노인의 긍정과 상황을 관조하는 여유는 위로였고, 안도였다.

늘 행운에만 목말랐다. 사람들은 웃고 즐겁게 사는 생이 내게 만은 각박하게 느껴졌을 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런 내가 노인을 보며 느꼈다. 내 손으로 행운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보았더라도 아마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느라 온전한 행복은 누리지 못했으리란 것을. 행복도 행운도 불행도 잠시일 뿐, 무엇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시간이 가듯 감정도 가고 새 희망도 온다. 슬픔이 오고 가고, 새 눈물도 차오른다. 그래야만 어떤 것이든 삶 앞에 공평하다는 듯이.

 

불행과 환희가 교차한 시간과

그보다 조금 더 길 뿐일 한 생애를, 그의 배 위에서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노인이 바다에서 돌아와 오두막에 지친 몸을 뉘었을 때, 그 모습을 본 소년이 노인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 한 뒤 그의 두 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을 때, 나도 엉엉 울고 싶었다. 아이처럼. 무언가 끝이 났다는 안도와 그것을 홀로 견뎌낸 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괴로웠다. 외면했던 무언가와 눈이 마주치고, 감정은 격해졌다. 사람은 왜 이렇게 나약함으로 끝나야 하는지. 늙고 연약한 모습으로 끝에 다다라야 하는지…… 그러나 문장 위로 흘러넘치던 노인의 치열함과 열정을 더 끌어안았다. 눈물을 멈추고 난 뒤엔 불행을 박차고 나올 힘이 생긴다.

팔십사 일의 허탕 끝에 찾아온 희망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질되는 불투명하고 슬픈 삶. 하지만 그 슬픔 속에서만이 행운을, 희망을, 행복을 만날 수 있다는 진실. 어쩔 수 없이 그 삶 위에 나를 밀고 나가야 한다면, 이 한 권의 책을 뱃머리에 두고 싶다. 노인의 치열한 싸움과 절망을 받아들이는 담담함을, 끝까지 희망을 놓치지 않는 끈기를, 그의 상처투성이의 손을 결코 잊지 않으며 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대와 공간을 넘어 나의 삶으로 온 이 책. 지금 내 이웃처럼 살아 숨쉬는 노인의 몇 날. 아니 그의 생애. 또 어느 해에, 어느 곳에서 이 책을 만날까.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감정을 얻을 수 있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깊어지는,기뻐지는 사람의 삶……

 

책을 덮고 표지를 더듬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들은 다시 내 안에 출렁거린다. 그 바다에 나를 묻는다. 너는 노인처럼 늙어갈 수 있는가. …… 이제는 다만 이렇게 대답하려 한다. 내 낡은 배가 어디로 가든 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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