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한쪽 눈을 뜨다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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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었다. 순간순간 움찔하고 가슴이 뻐근한 부분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녀석들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지나온 길목이었으므로, 눈물이 찔끔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상처가 아물면 무른 살이 단단해지듯, 어느 날 뜬금없이 녀석들을 덮치고 괴롭히려 들 미래에 대한 예방주사쯤으로 생각하자, 아이들의 혼란과 시행착오를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예방주사를 맞는 당사자는 몹시도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 사이에서 주사 바늘을 들고 있는 상대를 저주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당하게 멋지게 맞는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하느님을 외치며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을 연약하고, 말랑말랑한 아이들. 찰흙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아이들.
 

영섭, 태준, 정진, 태석.

그 아이들을 통해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나를, 만났다.
그 아이들을 통해 시간을 앞으로 돌려 미래 내 아들의 모습을, 만났다.

 

*

이 책의 시작은 이렇다.


나는 황라사마귀가 되고 싶다.
나는 황라사마귀다.

뜬금없이 황라사마귀라니. 세상에 별별별 멋지고 재미있는 것들을 놔두고 풀밭에선 보이지도 않는 황라사마귀가 되고 싶다니. 그런데 녀석의 이야기가 사뭇 상세하고 진지해서 나 또한 금세 녀석이 있는 초원 어귀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운동장만큼 넓은 초록색 잎 위에서 춤을 추로 노래‘하는 황라사마귀. 곁으로 하나 둘 초원의 동물들이 모여들지만 아무도 녀석을 찾을 순 없다. ‘나뭇잎과 똑같은 빛깔을 한 황라사마귀니까’.
책을 읽다보면 금방 알게 된다. 영섭에게 황라사마귀란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를, 하이에나와 악어의 등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맹꽁이로 변하거나 카멜레온으로 변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를 말이다.

  『괴물, 한쪽 눈을 뜨다』 에는 중학교 2학년 남학생 교실의 모습이 약육강식의 세계인 ‘사바나’에 비유하여 그려지고 있다. 서로 다른 모습의 동물들이 모여 서로 으르렁거리고 살아남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교실 안 남자아이들에 투영되어 귀로만 익숙한 교내 현실을 독자로하여금 보다 실감나게, 그러나 너무 진지하지 않게 다가서도록 한다. 어수룩한 영섭을 놀려먹으며 매일 반을 시끄럽게 만드는 문제아 태준정진. 상위권 성적을 지키며 조용하게 제 자리를 지키다 어리바리하게 반장 자리를 꿰차고 만 태준. 그들 사이를 조율하느라 등골이 휘는 어수룩한 시인 담임선생님. 어쩐지 이름만 낯설 뿐 어딘지 낯설고 익숙한 캐릭터들이었다. 그래! 15년 전, 나의 교실에도 그들은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중학교 시절을 되짚으면 늘 어색하고 불편했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집 앞 초등학교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등교하기 시작했을 때. 몸집보다 큰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정류장에 삼삼오오 모여 이미 만원이 버스 안을 비집고 들어서던 때. 그 때의 나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계 사이에서 곡예 중이었다. 한 발짝 잘못 떼면 어린이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이었지만 입고 있는 교복은, 학년과 반과 번호는, 무겁기만 한 교과서들과 칠판 옆 게시판에 붙어 펄럭대는 내 성적은, 나를 청소년이라 우겼다.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간이 흡사 타임머신처럼 금방이라도 고등학생으로, 성인으로 휘리릭 끌어다 나를 던져놓을 듯 불길했고 두렵기 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들을 간직하고 있기엔 너무나 연약했고 작았다. 찰흙덩이처럼, 누군가가 나를 만지는 그대로 모양이 남아 흉터가 되거나 무늬가 되었다. 남녀공학이었지만 합반은 아니었던 학교생활 속에서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한다느니, 학년 킹카 누구는 벌써 여자와 잤다느니 하는 알 수 없는 말들이 떠도는 동안, 다이어트 약을 먹으며 살을 뺀다는 친구의 다리가 나날이 가늘어지는 동안, 내가 이유 없이 싫다고 대놓고 말한 뒷자리 아이의 강요에 못 이겨 시험시간이면 목숨을 걸고 건넨 쪽지가 쓰레기로 사라지는 동안, 나는 키도 자라지 않았고 얼굴이 예뻐지지도 않았다. 교복은 여전히 컸다. 그러면서도 내 뒤에 등수 아이의 성적이 나를 치고 올라왔을 땐 툭, 하고 못된 말을 뱉기도 했다. 가슴 안에서 누군가 계속 그 말을 해야 나중에 그 아이를 이길 수 있다고 외쳐댔다. 활짝 웃는 얼굴이 예뻤던 그 친구에게,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 말을 뱉었던 것인지. 그 뒤로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두고두고 미안했던 생각이 들었다  남학생들은 저마다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얼굴과 교복이 잘 매치되지 않았지만 표정이 없고, 우울해 보이고, 욕이 툭툭 튀어나오는 입술이 달린 얼굴만은 비등비등했다. 남자반이 늘어선 복도를 지날 때면 맡아지던 이상야릇한 냄새들. 초등학교 때 분명 한 반을 지냈음에도 남녀 반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놓은 그 때는 눈이 마주치면 괜히 어색해 고개를 획 돌려버리게 되었다. 무언가 이상한 징조가 느껴졌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다른 모양으로 변화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혹은 잘못된 일이라고 일러주지 않았다. 
 

노는 패거리의 만만한 상대였던 영섭을 보며 내 학창시절 속 ‘영섭’을 떠올렸다. 세 명의 ‘영섭’. 그녀들은 늘 자신보다 큰 안경을 쓰고 있었고 몸집이 컸고 누가 어떤 말을 건네든, 어떤 부탁을 하든 활짝 웃는 얼굴로 답하곤 했다. 노트 필기 글씨는 삐뚤빼뚤이었고 시험이면 꼴등을 도맡아 주었다. 짓궂은 아이들이 놀리는 말에도 진지하게 답하면서 제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선사했지만 되돌려 받는 건 또 다른, 새로운 부탁일 뿐이었다. 늘 혼자서 화장실을 가고 늘 혼자서 밥을 먹었다. 가끔 또 다른 ‘영섭’이 찾아와 우리 반 ‘영섭’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혹시나, 여전히, 외롭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초등학교를 떠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어린이란 꼬리표를 떼고 청소년이란 수식을 달 때, 그것은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 듯 간단한 의식이 아니었다. 곧 내 연약한 표피를 뚫고 뿔이라도 돋아날 것 같은 심정. 그런데 그것이 나를 보호해주기 보단 나조차도 헤칠 듯 겁이 나는 순간의 닥침.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불안감. 어느 것 하나 주어진 힌트도 없이 스스로 부딪혀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막막함. 그 감정들의 혼재 속에서 아이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괴물'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것조차도 선택적인 것은 아니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는 듯, '괴물'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며 그 주인의 불안을 잠재우고 내가 곁에 있는 아이보다 강하다는 착각을 입증해 주었다.

주먹을 내두르고, 주먹에 맞고, 발길질하고, 발에 차이던 장면이 떠올랐다. 낯설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졌다. 싸우는 사람은 내가 분명한데 나 같지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조종한 건가? 내 안에 괴물이 하나 들어 있나? 

- p.87 , 태준 셋-눈을 뜨다 부분  

태준은 다른 아이들에겐 성적도 좋고 조용한 아이로, 학급반장을 맡고있다.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야동을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또한 떳떳하지 못하다. 야동을 끊지 못하는 자신을 변태처럼 여기면서, 치밀어 오르는 욕구들을 불결하게 느끼면서 자신의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컴퓨터로 다가서고 마는 아이. 내가 태준의 어머니 입장이라면 당황하고 놀라 할 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엔 녀석이 끊임없이 야동생각을 하는 모습이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 태준이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면서 나는 잠시 먹먹한 마음이 되었다. 혼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그 아이를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녀석이 자신의 태도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다른 아이들이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성적을 유지하려하고 어떨 땐 상대에게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는 모습에서 태준 스스로가 자신의 기준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태준도 연약한 영섭에게 폭력성을 느끼긴 마찮가지였다. 또한 중2 마지막 겨울방학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초등학생의 MP3를 빼앗아보면서 자신 안에도 있는 괴물을 발견하며 조금은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길 줄 알게 된 영섭. 어느 날엔 정진과 태석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기도 하는 녀석. 끝까지 그 아이가 당하는 꼴만을 보았다면 나는 그 아이에게 일어난 일들을 쉽게 넘겨두지 못했을 것이다. 과잉보호를 받고 있는 정진. 부모의 체벌을 견뎌야하는 태석. 녀석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면은, 집에서 무시당하는 자신을 또래 아이들에게까지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차선책이었을 것이다. 그들 또한 부모의 손길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 빚어진 스스로를 다듬고 만들어가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서 학교에서 문제아가 되고 연약한 아이를 괴롭히며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는 삶으로 빠져들게 되었으리란 생각. 아마도 그 아이들까지도 따뜻한 한마디의 말과 격려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언젠가 나의 아이와 내 사이에 다가오기도 할 일. 나는 어떤 말들로 나의 아이를 붙잡아주어야 할까. 사실 마지막에 태준의 어머니가 "난 우리 아들 믿어.", "듬직한데. 우리 착하고 성실한 아들." 이라고 말할 때는 나 또한 뿌듯하게 태준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믿어주는 것, 잘못과 실망된 마음을 미뤄두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작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 그것만큼 멋진 부모가 되는 일이 있을까. 


끈적끈적한 막으로 감싸 있는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철퍼덕 복도 바닥에 떨어졌다. 갈고리처럼 밑으로 굽은 손톱 네 개가 툭 불거져 나와 막을 찢고 사이를 벌리더니 살진 두꺼비 같은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중략)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상한 짐승이 내 눈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네가 그 놈이니?


-p.218, 태준 여섯-고슴도치 부분  


나는 중학교 시절  어떤 외피를 찾아 입고자 했을까. 키가 크고 눈망울이 동그랗던, 사복을 입으면 날씬하고 긴 다리를 감싼 청바지가 너무나 멋지게 보이던, 화이트 데이엔 인형이 담긴 거대한 사탕 바구니를 책상 위에 턱하고 올려놓은 채 자랑스러운 웃음을 날리던 그 친구들처럼 되고 싶었다!
키가 훌쩍 크고 눈매가 매섭게 살아난 아이들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어른이지만 그 아이들과 대화를 이어나가다보면 느껴지는 그 나이 때의 천진난만함이 금세 드러나고, 앞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 핀 먼 훗날의 시간까지 짚어보게 된다. 그 아이의 얼굴에 너무 일찍 아이라인이 그려지고 파우더가 칠해져도 변하지 않는 것, 바로 그 가능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아이의 얼굴만을 보고 그 가능성은 보아주지 못했는지. 그리고 어른들이 무심코 던지고 돌아서는 싸늘한 시선 앞에서 얼마나 불안함을 느끼며 자신을 가리기 위해, 더 삐딱해지기 위해 진한 화장을 해야 했는지. 거리를 걷다가 마주치는 아이들의 교복 매무새를 시선으로 따라가며 나는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저 아이들이 또래와 웃고 떠드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그것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곁에 있는 어른들의 몫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은 살아가며 몇 번이나 더 스스로의 가면을 바꾸어 자신의 모습을 찾아 갈 것이다. 그것은 적잖이 괴기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어색한 것일 수도 있고, 볼품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스스로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 사이에서 어른들이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이가 되돌아올 수 없는 일을 선택할 때뿐이라는 생각이다. 부모인 내가 아이의 삶을 일일이 챙겨줄 수 없듯이 아이는 스스로의 앞길을 선택해 나아가며 넘어지고 다치면서 길을 수정해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시행착오가 줄어들고, 자신을 바르게 지킬 줄 알게 되고, 스스로가 꿈꾸는 삶을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하며 뿌듯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그 곁에서 아이가 너무 오래 넘어져 있지 않게, 포기하지 않게 돌아보면 위로받을 수 있는 엄마이고 싶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은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였고 내 아이의 이야기였고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태준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을 빌었던 모습, 영섭이 선생님이 쥐어 준 무기(각서)를 들고 정진에게 경고하던 모습, 자신의 안에서 깨어난 괴물과 마주한 사내아이의 모습, 그런 아이들을 요리조리 몰아가는 선생님의 달콤살벌한 말씀들. 아이들은 알까. 지금 그들이 놓인 시간이 흔들리는 수면처럼 불안할지라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림과 싸우며 자신을 지탱해가는 그들의 모습은 작은 꽃망울처럼 앙증맞고 귀하다는 사실을. 연약한 자신을 너무 불행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들안에서 치열하게 상처받고 멋진 흉터도 만들어가며, 기억하고 싶은 추억들도 하나 둘 마음속에 세기며 자신을 아름답게 가꿔나가길, 가만히 바라본다. 거리에서 골목에서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지나가는 아이들의 곁을 내 작은 아들의 손을 쥔 채로 지나갈 때면 책 속에서 만난 네 녀석의 얼굴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봄꽃처럼 아른거린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더욱 남자다운 모습으로 변하게 될 태준과 영섭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가 번진다. 이런 걸 희망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들이 뿜어내고 있는 먼 미래에 대한 예고편이 나를 설레게 한다. 내 한 쪽 손에 쥐어진, 거대하고 신비한 내 아들의 시간도. 그 곁에 함께 걷고 있음이 마냥 감사하다. 때때의 시절이 주는 방황의 특권과 무수한 절망의 고리를 힘차게 뛰어 넘어 모두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오늘의 웃음을 눈물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봄날,

 

언젠가 내 아이가 방황 끝에 괴물로 변하더라도, 꼭 해주고야 말, 한 마디를 꾹꾹 가슴에 세긴다. 

정말 절대 까먹어서는 안될 한 마디.  

 너니까, 너라서 괜찮아,  
 

그리고 꼭, 믿지 않아도, 해주고 싶은 말.   


너희의 모습은 정말, 정말, 정~말 아름답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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