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저히 끊어버리고 돌아설 수 없는 것들, 끊어내고 싶지만 끊어낼 수 없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존재의 탯줄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 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p.47
  


거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자, 아득히 흐리고 빈 공간이 펼쳐졌다. 자동차가 단 한 번 우회전함으로써 그렇게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막막한 세상이 전개될 수 있었다. 내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네거리에서 서울 쪽의 익숙한 일상을 향하여 좌회전할 때, 그때 내 앞에 전개되는 공간 또한 저렇게 아득할 수밖에 없겠지만, 익숙한 아득함은 익숙해서 아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좌회전과 우회전은 별 차이 없을 터이지만, 나는 한 번의 우회전으로 낯선 아득함을 향하고 있었다. -p.55
 

 

아버지의 자식이 아버지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자식에게 보이는 고통을 면해주고, 자식의 시선에서 아버지를 풀어주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효도일 것이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순수하게 논리적일 수만은 없었다. 그것이 그렇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나를 보여서,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자식에게 보이는 고통을 아버지와 자식이 함께 받아들이는 쪽도 또한 효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효도라고 말하고 나니까 쑥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이 효도도 불효도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마음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이었다. -p.253 


 


죽음과 젊음이 공존하는 나무들이 인간보다 한수 위인 듯 느껴진다. 그들이 담담히 끌어가는 시간 앞에 숙연함을 느꼈다. 그 곳으로 도망치듯 쏟아져 들어온 조연주. 불법갈취와 비리상납으로 수감중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싶은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그녀는 수목원 생활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천천히 다가서는 법을 배워나간다.
내가 비루해졌을 때 느껴지는 절망은 나를 재정비하고 새로 다지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과해 그 감정으로부터 멀리 도망쳤을 때에야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절박한 시간 안에 담겨있을 때 드는 생각들은 비로소 내 안에 남아있는 '진짜' 나의 이야기 일 것이다. 그녀가 아버지를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가족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각자의 공간에 있을 때가 편했고 안도감을 느꼈다. 서로에게 짐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게 효도가 되는 마음이 너무나 슬펐다. 나 또한 내 가족과 멀리있음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쪽이기에 아버지를 뵙기까지 겪는 그녀의 고민이 너무나 절절히 와닿았다.
내가 적은 두 번째 문장은 읽으면서 정말 모든 것들이 지워진 자리로 그녀가 들어가는 듯 했다.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하는 그녀의 시야에 들어 찬 어쩌면 비어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눈 덮인 설경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내내 마음이 시렸다. 꼭, 그 만큼의 마음으로 이 책에서 돌아나올 수 있길 바랐다. 그녀가 지금 바라본 세계에 대한 벅차오르는 마음과 꽉 들어찬 시야로 다시 돌아나올 수 있기를. 그녀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인연들과 나무, 꽃, 그것들이 이루는 거대한 숲의 이야기가 삶의 고통과 대조되어 애잔하게 펼쳐지는 책, <내 젊은 날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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