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을수록 무지함은 잔인하게 드러났고, 나를 괴롭혔다. 열일곱의 그가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무렵을, 그곳에서 5년을 보내고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할 길은 내게 없었다. 그를 가둔 수용소의 모습과 양배추 수프의 정체를, 날아가는 시멘트 가루의 불길함을, 안타까움을, 스스로를 구궐하게 하는 배고픔을 글로만 읽을 뿐. 그것마저도 금세 부끄러워졌다. 그가 견딘 시간을 그저 한 권의 책으로 읽어 내려간다는 게, 어쩌면 그의 삶의 전부였을 ‘뼈와가죽의시간’을 이렇게 가만히 앉아 읽는다는 게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렇게 조금씩, 이야기를 내 안에 담았다 덜어내길 반복했다. 한 달 가까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그 사이 우리에게 일어났던 전쟁도 떠올렸고, 세계를 뒤흔든 ‘2차 세계대전’과 다른 전쟁의 역사마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에 대해 처음으로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세대가 바뀌는 사이, 지금과는 먼 이야기가 된 전쟁의 비극은 점점 ‘없었던 일’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 한국전쟁이 60주년 되었다. 그러나 매체와 사람들은 월드컵 열기로 가득 차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때 우리의 영토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 곁엔 어떤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60년 전, 가족을 잃고 어디로도 닿지 않은 길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꿈을, 수많은 목숨들을 희생하고 얻어낸 ‘지금’을 너무 당연하게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우연히 보게 된 한국전쟁 60주년 특집 다큐, ‘소련으로 끌려간 국군 포로 - 그 이송설의 진실’ 편은 내가 이 책을 끝까지 보게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전쟁 당시 북한군에 억압된 한국군이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넘겨졌다는 내용이었다. 그 진실을 취재하는 기자를 따라 아직 러시아에 남겨져 있는 수용소의 모습을 보면서 ‘레오’가 있던 곳을 떠올렸다. 글로만 읽어 더듬던 풍경을, 차갑고 냉정한 그곳의 시간을 마주보고 있으니 절로 코가 시큰해졌다. 여러 곳에 나뉘어 있던 강제노동수용소는 폐허가 되거나 여전히 남아 교도소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철책이 삼중으로 되어있고, 총을 들고 보초를 서는 군인의 모습이 오래전 그 때를 선명하게 재연하고 있었다. 한국전쟁당시 북한에 잡혀 그곳에 넘겨진 우리 군이 있었다는 말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국군 포로로 소련에 넘겨진 그는 수용소에서 탄광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하루 종일 해야만 했다. 80세를 넘긴 노인된 그는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이제 두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그에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참혹한 과거는 늘 또렷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새벽 6시, 종이 울리면 어서 일어나 조반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건 배춧잎 몇 개 뜬 말간 물 한 그릇이었다고 한다. 견딜 수 없는 배고픔에 수용소 주변의 풀을 뜯어먹었고, 그 풀마저도 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으로 인해 깨끗이 동이 났다고 한다.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한국군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들을 인적 없는 곳으로 몰아 사살하고 한꺼번에 묻어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10년, 그는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또 한국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인적 없는 마을로 숨어 지내야 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응한 또 다른 분은 그 시절, 그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참혹한 일들을 제발 러시에 정부에 말해달라고 했다. 밝혀서 사과를 받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고 우리나라 정부는 선뜻 그때의 기록을 보여 달라는 입장마저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레오와 비슷한 나이에 전쟁으로 내몰린 그의 모습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가족에겐 소식 한 장 알릴길 없이 먼 타국으로 끌려간 삶들을 고스란히 당한 자의 몫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일까. 운명이 그랬다고, 운이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가족은 돌아오지 않는 그가 당연히 전쟁 중 사망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죽었고, 거리엔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았다. 최근 한 국회의원이 6·25 당시의 실제 상황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인터넷을 통해 짧게 보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한복 차림의 여인이 무수한 시신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가족을 찾고 있었다. 교회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버린 자리에 남은 새까맣게 탄 시신들. 억울하고 괴롭고 공포에 어린 표정들이 고스란히 읽혔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뜨거운 불길 안에서 그들의 고함이, 이름이, 육신이 타들어가는 동안……. 전쟁이라는 그 불길 같은 시간 안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배고픔을 느끼고, 삶의 극단에 치닫는 감정을 느낀다는 건 또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을까.

 

레오가 수용소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싼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현재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을 품고 있다. 열일곱의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를 공을 품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짐짓 비장해 보이기도 두려움에 떠는 듯도 하고, 모든 걸 자포자기 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러시아로 끌려가 오 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다. 인권이란 없었고, 모두가 일하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죽음을 선택할 수조차 없는 삶, 온갖 해충들이 난무하고 서로가 가진 빵을 탐하며 늘 ‘배고픈 천사’에 붙잡혀 죽음 앞까지 내몰리다 결국은 살고 마는 사람들. 소금과 설탕 한 줌이 절실한, 그로 인해 극도의 분노와 살의를 느끼는 사람들.
다른 곳에서 왔지만 같은 처지에 내몰린 그들은 그들만의 군락을 꾸린다. 그들만의 규칙과 방법을 가지고서 조금씩 수용소 생활 속에 스며간다. 사람이 가진 무서운 힘이란 게 이것 아닐까? 닥친 상황에 휘둘리다가도 끝내는 인정하고 적응해 간다는 것.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일과 감시, 배고픔 속에서 그들은 춤추고 숨어 사랑을 나눈다. 아이가 태어난다. 시멘트가 날아가 강제노역자들을 도둑으로 모는 사이로도 권태는 찾아오고, 고향에 대한 향수는 피어오른다. 죽은 자의 주머니를 뒤져 빵을 갖고 옷을 벗겨 입는다.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들만의 암묵적 동의. 서로는 ‘배고프다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각자의 처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지난 날 자신에게 새겨진 추억 같은 것, 되새김질하며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억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레오의 귓가를 맴돌며 그를 붙잡아준 할머니의 한마디 말처럼. 그리고 한곳에서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몇 마디의 대화, 잠시나마 형성되는 공감대 같은 것이 그들을 죽지 못하게 했다.
한 편, 한 편의 일기를 읽듯 문장들은 그때의 절박했던 심정과 상황을, 눈물도 쉽게 나지 않을 만큼 혹독하게 일상에 훈련되어 가던 사람들의 갈등과 혼란을, 처연하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자국어를 가지고 글을 쓸 수 없었던 뮐러의 마음과 스스로 기록할 수 없었던 동료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강제추방을 당한 자신의 이야기가 맞물려 이 소설은 탄생했다. 그들은 모욕적인 상황의 극한을 경험하기도 했고 기관의 박해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왔다. 동료의 용기가 없었다면, 또 그가 스스로 글을 썼다면 이토록 절제된 이야기로 더 많은 독자를 만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수용소에서 해제되어 집으로 돌아온 레오는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혼란을 겪었다. 자신을 죽은 것으로 여겨 대리형제를 대려다 놓은 집과 할아버지의 부재, 변한 것은 없는데 그에겐 입안에 모래가 서걱거리는 것처럼 역겹기만 했다. 이제 충분히 먹고 잠들 수 있지만 그에겐 여전히 ‘배고픈 천사’가 떠나지 않는다. 가족들과 나누는 말은 나가고 들어옴에 대한 인사뿐이고, 그마저도 할머니가 먼저 건넸다. 그는 끊임없이 ‘배고픈 천사’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닌다. 궁핍했던 겨울, 수용소의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레오는 끝내 노트를 사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외면하고 놓임 받고 싶었던 5년 전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넵툰수영장’으로 향하기도 한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고 있었지만 지난 5년의 시간동안 ‘약탈당한’ 자신의 시간을 ‘아무도 다시 만들어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전의 ‘피아노’일 뿐이었다. 이젠 소리가 나지 않는.
레오는 돌아와 보낸 육십 년의 시간 동안 ‘나의 귀향이 수용소의 행복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음을 안다.’고 말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먹는다’는 것의 행복을 배웠다고 말한다. ‘입의 행복’,

입의 행복은 혼자 있고 싶어하고 말이 없으며 몸속에서 자란다. 그러나 머리의 행복은 어울리기 좋아하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방황하는 행복이며 질질 끌리는 행복이다.

- 『숨그네』, ‘수용소의 행복에 대하여’ 부분

그리고 수용소에서 그를 간절하게 만들던 ‘행복’에 대한 그리움은 이 장의 마지막에 드러난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매일같이 다른 허기가 생겨나 채워지기를 기다리지만 나는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줄 수 없다. 나는 배고픔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자부심이 아니라 겸허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전쟁, 이라고 할 때 우리는 싸우는 자들만을 생각한다. 강한 자와 약한 자 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져 스스로의 삶을 갉아먹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비참함은 떠올리지 못한다. 차마 죽지도 못한 그들에겐 사라진 집과 삶의 터전을 잃은 현실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 먹먹함이란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것이리라. 가족의 끼니를 채울 수 없는 생활, 강한 자에게 착취당해야 하는 노동력, 남겨진 사람들조차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갔다. 전쟁 후 남게 되는 여파는 전쟁만큼 강한 것이다. 수용소로 강제 추방된 사람들 역시 그랬고, 소집 해제 후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 역시 그랬다. 외상후증후군처럼, 그곳의 시간은 시도 때도 없이 살아내려는 사람들을 흔들어 댔다. 그들은 스스로 삶을 놓았고 알코올에 의지했으며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폭력적이 되거나 반미치광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더욱 그들을 절망으로 내모는 건, 그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덮으려는 국가의 태도일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알아주어야할, 포용해야할 자국이 외면으로 돌아설 때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움에 격양된다. 흐르는 시간 사이로 과거가 스며들고 흐릿해지면서, 불운했던 사내는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서로가 쉬쉬하는 역사를 등에 숨기고 그가 보낸 삶이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위태로웠을 것이다. 레오는 그 시간을 ‘숨그네’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끔 수용소의 물건들이 무더기로 자신을 덮쳐 자신을 강제수용소로 돌려보내려 하는 환상에 휩싸인다. 헉헉거리며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만 그 시간은 또 다시 그를 덮쳐온다.


어찌 됐든 밤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검은 트렁크를 꾸린다. 나는 그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 의지라 할지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 ‘명아주’ 부분


‘검은 트렁크’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불운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시간에 넘겨받은 것일 뿐이고 지금 그것의 주인은 바로 ‘우리’여야 한다.
처음엔 가늠하기 어렵던 레오의 일들이 이제는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은 그 나라만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TV를 통해 본 한국군의 이야기로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어느 한 페이지 접힌 부분이 없다. 그냥 마음으로 따라가 그 페이지를 연다. 그곳엔 여전히 수용소를 벗어나지 못한 레오가 있고, 자국(自國)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제 노인이 된 한국인의 모습이 있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처음으로 느꼈다. 교과서를 통해 매일 언급되었던 역사는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데, 우연히 읽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내 치부를 밝혔고, 죄책감에 휩싸이게 했고,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먼 과거에 까지 ‘감정’을 갖게 했다. 그들이 보낸 시간을 잊는 것만큼, 그들에게 잔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수용소에 징집되었던 수감자로만 이름을 남긴 한국군의 일을 러시아 정부가 어서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애도해 주길 소망한다. 그들의 억울하고 고통스런 삶으로 이어진 오늘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가야 한다. 그것이 사라져 스스로의 삶을 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노고가 잊혀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과거가 사라질 때, 우리는 뿌리를 잃은 식물처럼 싱싱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게 길러질 것이다. 그렇게 늙어 다시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무의미한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새삼 헤르타 뮐러 작가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써 내려가야만 했던 소설들의 이유가 또렷이 느껴진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과 국가의 외면 속에서 스스로를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국가를 비방한다고 여긴 루마니아는 그녀를 끝까지 제압하려 했지만 세계는 그녀를 주시하고 그녀가 쓴 소설을 인정하며 그 뜻을 드높이 샀다. 그것은 그녀의 책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오명을 반복하지 않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뮐러의 글은 분명, 그녀의 나라를 살릴 것이다. 사라져가는 역사가 우리 앞에 놓일 때, 그 시간이 우리와 더불어 다음 세대에게로 끝없이 흘러들어갈 때 역사는 현재를 바꾸는 윤활제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책을 펼친다. 나와 더불어 가야할 역사를 위하여, 내가 다른 이에게 전해야 할 모든 말들을 위하여.    

이 책은 나를 '시작'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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