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 7년만에 하는 이사라 그 동안 집안 곳곳에 쳐 박아 놓았던 물건을 버릴 것 버리고 정리하느라 한동안 무척 바빴다.

포장 이사를 하기로 했으니 짐 꾸리는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이삿날이 가까워지니 다른 살림 걱정은 하나도 안 되고 내 재산목록 1호인 책에만 신경이 쓰인다. 짐 싸고 푸느라 어수선할 텐데 그 틈에 없어지면 어쩌지, 아저씨들이 막 다뤄서 책이 상하면 어쩌지 하는. 결국 책은 모두 내가 싸야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동네 슈퍼마켓에 부탁해서 사과 상자 열 댓개를 얻어와서 책을 꾸리기 시작했다.

결혼 생활 9년 동안 늘어난 건 아이 짐과 책과 먼지 밖에 없나보다. 결혼할 때 샀던 책장 두 개는 오래 전에 꽉 차서 언제부턴가 옷장 속에, 식탁 위에, 책상 위에, 그리고도 남는 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놓기 시작했다. 매일 보던 거라 그리 많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한데 다 모아보니 만만치가 않다. 사과 상자 열 개를 꽉꽉 채운 다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여전히 책장 두 개는 가득 차 있다. 지치기도 하고 슬슬 귀찮기도 해서 생각 끝에 일단 '귀중서'-만화책, 동화책, 사 놓고 아직 안 읽은 책들-는 잘 싸놨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옮겨주려니 하고 이사를 했다.

이사하는 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저씨들은 나머지 책들도 꼼꼼하게 잘 꾸려서 옮겨주셨고, 무거운 책 상자도 불평 하나 없이 날라주셨다. (책을 가득 채운 사과 상자 하나는 30킬로가 넘었다!) 대신 나보고 다음에 이사할 때는 책이 스무 상자라고 꼭 미리 얘기하란다.

이사 와서 딴 짐들 대충 정리가 끝나고 책장 두 개를 더 사서, 지난 식목일 날, 드디어 책 정리에 들어갔다. 어차피 다 내 책이기 때문에 식구들은 방에 들어오지 말라 하고 혼자 낑낑대고 있으니까 남편은 옆에서 대충 정리하라고 성화다. 하지만 난 예전에 겪어 봐서 안다. 처음에 제대로 정리를 안 해 놓으면 이 게으른 성격에 여차하면 이사 나갈 때나 다시 손을 대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걸. 그러니 나름대로 생각해서 정리를 하느라고 결국 밤늦게까지 그러고 있었다.

정리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서 방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을 쳐다보고 있으니 도서관에 들어온 듯 얼마나 뿌듯하고 좋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자니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오래 전에 사서 읽고 또 읽어 구질구질 손때가 묻은 책은 분명히 내 책이란 생각이 드는데, 요즘 몇 년 동안 정말 '사재기'만 해 놓고 겉장이 빳빳한 채로 나란히 줄 서 있는 책은 왜 그리 낯선지.

예전에 보면 가끔씩 거실에 유리문 달린 책장을 들여놓고, 금박으로 제목이 찍힌 전집을, 그것도 번호 맞춰서 주르륵 꽂아놓는 집이 꼭 있다. 그걸 보면서 책이 장식품이냐고 비웃곤 했는데, 아직 내 손이 닿지 않은 책이 훨씬 더 많이 들어찬 내 책장과 그 사람들 책장이랑 다른 게 뭐지?

책을 새로 사면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리는 게 너무 아쉬워서 끝의 몇 장을 남기고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읽어보고 하던 때가 있었다. 정말 표지랑 책등이 닳아지도록 읽어대던 때가 있었다. 한 달에 책 한두 권을 사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 용돈을 아쉬워하면서 빨리 돈 벌어서 맘대로 책을 사고 싶어하던 때도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아이에게 보여주려고 그림책을 샀다가 어느새 내가 먼저 어린이 책의 재미에 빠져들어서 다른 책들 제쳐놓고 그림책,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어린이 책 공부를 시작한 건데.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인데도,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때부터 책은 왠지 재미없고 부담스러워졌다. 이 책 저 책 늘어놓고 읽어야 한다고 조바심만 내면서 정작 한 권도 제대로 못 읽고 마는 날이 부지기수.

휴우… 그럼 지금의 나한테 책은 숙제일 뿐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서 늘어놓는 걸 즐기는 사치품? 이 좋은 봄날, 책과 다시 친구하고 싶은데. 

 

2001/04/13
어도연 회보 '회원글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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