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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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놈이 지각한 날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읽고

    

1.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 장자 <지락>

 

어렵지 않는 이야기이다. 바닷새에게 술, 궁중음악, , 돼지, 양이라니! 바닷새를 대접하는 방법은 바다로 떠나보내는 것뿐.

요즘 학교 현장에서는 인성 교육이 강조된다. 새삼스럽게! 그러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나 공감 능력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감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난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마음, 나와 다른 마음을 공감하기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타인의 존재 그 자체이다. 바닷새와 사자 만큼씩이나 다른 겉보기보다 훨씬 더 다른 존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섣부른 공감을 강조하다 보면 타인을 자신과 비슷한 존재라고 판단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기껏 공감해 주었는데 타인이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지난번보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 공감은 쉽게 미움으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공감하기 전에 진정으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세상의 평화는 시작된다. 특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낳은 내 자식조차도 나에게는 완전한 타인이라는 사실. 부부간을 말할 것도 없다. 평생을 두고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해봐야 할 대상이 가족이라는 타인들이라는 사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나에게 물고기이며, 바닷새이고, 사자이며, 외계인이라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에서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기 전에 인간과 원숭이의 다름을 만나야 한다.

 

2.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은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원숭이르 키우는 사람은 원숭이가 옳다고 한 것을 따랐을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으로써대립을 조화시키고, ‘자연스러운 가지런함(天鈞)’에 편안해 한다. 이를 일러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 장자 <재물론>

 

그렇다면 원숭이를 만나면 원숭이가 옳다고 한 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아이들이 옳다고 한 것을 따르면 되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은 수업시간에도 틈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늘 수업을 하기 싫어하고, 밤늦게까지 놀다가 자주 지각을 한다. 그들이 사는 방법을 그냥 두어야 하는 것일까?

 

3.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삶에는 우리들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많은 규칙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공동체에 내던져지게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략) 장자는 우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 자체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것을 유명한 성심(成心)’의 논의로 명료화했다. - 강신주

 

(노력을 안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늘 지각하는 우리반 아이들이 속해 있는 세상과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은 다르다. 학교라는 곳은 기성세대의 규칙을 아이들에게 훈련시키는 곳이다. 나는 교사이다. 교실에서 나는 물고기와 바닷새와 원숭이와 외계인을 만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와는 다른 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 것일까? 현재 시간 아침 950. 세 아이가 아직 학교에 오지 않았다. 학교는 출석부에 무단지각이라 표시함으로써 그 아이들을 벌준다. 아이들에게는 365 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내가 속한 세상에서는 무단이라고 말한다. 아이들 스스로 기성세대들의 세상으로 들어오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쉽게 상대주의에 빠진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나도 그르고, 너도 그르다. 모든 존재는 만물의 척도가 된다. 세상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거대한 바다인 줄 알았다가 셀 수도 없이 많은 하나하나의 물방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엄청난 고립감, 외로움을 느낀다. 우주 속에 홀로 떠 있는 기분이 든다.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현재 시간 1015. 2교시가 끝난다. 아이들은 아직도 오지 않는다. 아이들 하나하나가 속해 있는 세상과 내 세상은 각각 한 방울의 물방울이다. 각각 홀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각자의 물방울 안에서 각자의 삶을 살면 되는 걸까?

아이들이 2교시가 끝나고, 약간 피곤해 보이지만, 예쁜 얼굴로 나타난다. 두 아이는 어제 한 집에서 잤다. 밤늦게까지 재밌게 놀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17살 남자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나눌까? 나는 아이들의 세상을 상상하지만, 결코 완전히 상상해 낼 수 없으며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주말도 있는데, 왜 하필 수요일에 같이 늦게까지 놀았을까?

 

4.

모든 순간 우리에게 무한히 많은 지각들이 존재한다고 결론 내리도록 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물론 영혼에서의 변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무한히 많은 지각들에는 의식이나 반성이 수반되지 않는다. 이런 인상들이 너무 미세하고 많아서 혹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그 자체로서 구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라이프니츠 <신인간오성론>

 

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발견하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선학들은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망각하고, 타자로부터 나오는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라고 권유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유한자는 한계가 있고, 한계 너머에는 바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한자가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 뿐이다. 안이나 밖. 안을 향해서 움직일 때 타자는 사라지고, 남도 나와 같겠거니 쉽게 공감하고, 쉽게 이해하고, 쉽게 무관심해진다. 밖을 향할 때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타자가 나를 향해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날개 없이 그들을 향해 날아간다. 우리는 비로소 만나다. 이런 만남이 행복한 결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집안에서 학교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만남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타자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타자라는 존재가 나에게 만들어 낸 흔적들이 모이고 모여 드디어 나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지각한 아이들에게 지각했으니까 남은 시간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한다. 화는 내지 않지만, 욕은 해준다. 아이들은 선선한 얼굴로 잘못했다고, 수업 시간에 잘 하겠다고 대답한다. 점심시간엔 즐겁게 놀고, 서로에게 웃는 얼굴로 욕을 해대면서, 종이 울리자 교과서도 들지 않은 채 수업에 들어간다.

이 아이들과의 만남은 분명히 나에게 흔적을 남겼고, 나를 생각하게 한다. 아이들에게도 나와의 만남을 통해 어떤 흔적들이 남았을까? 그것이 그들의 삶에 작은 힘이 되었을까? 그들에게 잠깐 멈추어 생각할 시간을 주었을까?

 

5.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그러자 장자가 이야기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만 함께 쓸모있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법이네. 땅은 정말로 넓고 큰 것이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사람이 쓸모를 느끼는 것은 단지 자신의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라네. 그렇다면 발이 닿는 부분만을 남겨두고 그 주변을 황천, 저 깊은 곳까지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이 발이 닿고 있는 부분이 쓸모가 있겠는가?” - 장자 <외물>

 

나는 가끔 아이들이 황천, 저 깊은 곳까지 파낸 낭떠러지 위해 서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아이들은 이 과목은 이래서 하기 싫고, 저 과목은 저래서 필요 없다고 말한다. 취업에 별 쓸모도 없는 만화책은 참으로 열심히 읽지만, 정작 필요한 전공과목은 공부하지 않아 안타깝다. 동아리를 열심히 하지만, 자꾸 무단 지각을 해서 안타깝다. 나는 지금 디디고 서 있는 땅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위태롭게 살지 않으려면 더 넓은 땅이 필요하다고 아이들에게 잔소리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이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아이들은 물고기이며 바닷새이고 사자이며 원숭이이고 외계인이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에는 중력이 더 약할지도, 그래서 그 낭떠러지쯤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을지도, 아이들은 그 높은 곳에서 재미와 스릴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모른다.

 

201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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