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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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찾아 읽은 책보다는 우연히 만난 책이 더 흥미롭다. 서가 사이를 걷다가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대출해간 흔적이 없는 책에 내 시선이 머무르고, 제목을 읽고, 꺼내들고, 그리고 대출까지 했는데, 그 책이 깊은 감동은 주었을 때, 마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느낌이다.

최근에 내가 만난 새로운 세상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이다.

 

1. 미셸

소설의 앞부분에 매우 간략한 에필로그가 있는데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이 에필로그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이 시작되고도 한참 동안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헷갈렸으며, 절반 이상을 읽는 동안에도 이 소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끝까지 다 읽고, 다시 에필로그를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상할 수 없어서 흥미로웠다.

미셸이 남긴 논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리학, 양자역학, 분자생물학의 어휘들은 낯설고 생소했으며, 소설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소설 구성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미셸의 연구물로 인해 완결되기 때문에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미셸의 사색과 분자생물학에서의 연구 결과, 고독하고 고통스러웠던 인류는 스스로의 존재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종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미셸은 인간 유전자 중 그 어떤 돌연변이도 발생시키지 않는 유전자의 표준 형태를 찾아냈고, 아무리 복잡한 유전 암호도 표준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완전한 수준의 유전자 복제로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인간 사회에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인간의 유성 생식이 인간을 필멸의 존재로 만드는 것임을 발견한 미셸의 연구는 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류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의 차이가 없다고 해서 성적 쾌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식기 일부에만 분포했던 감각이 온몸에 분포함으로써 현생 인류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극한의 쾌락을 새로운 인류는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와우!) 또한 일란성 쌍둥이가 각자 고유한 삶을 살면서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며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결국 모든 인간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함으로써 현생 인류의 시기, 질투, 폭력의 역사는 종말을 맞게 된다.

 

2. 브뤼노

브뤼노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기숙사에 버려진다. 힘이 세지도 못했고, 뚱뚱하기까지 했던 브뤼노는 동급생이나 기숙사 선배들의 학대에 무방비였고, 이 때의 상처는 평생 브뤼노를 따라다닌다. 성적 욕구 불만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강박적으로 성에 집착하지만, 그런 브뤼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크리스티안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소설 속의 세상은 비정하고 혼란스러웠다. 브뤼노가 태어나 처음으로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던 크리스티안은 병으로 두 다리가 마미된 채 살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받고, 휠체어에 앉은 채 스스로 계단을 굴러 자살하고 만다. 브뤼노는 자신이 치료를 받아오던 정신병원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

몇 해 전 강남역 주변에서 성형외과들을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고층빌딩 전체에 수십 개의 성형외과 간판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정말 사람들이 성형외과에 많이 가긴 가는구나 하고 실감했었다.

늙어간다는 사실이 연륜, 경험, 지혜를 의미하지 않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인 것 같다. 늙어 간다는 것, 노인이 된다는 것, 아프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 아니라 실패, 낙오의 결과물로 치부되며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21세기의 삶에서 돈이 살 수 있는, 또한 사려고 하는 가장 가치 있는 대상은 젊음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자본을 축적하려고 하는 이유도 젊음을 사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온화하게는 젊음이지만, ‘성적 매력이라 달리 쓰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학교에서 만나는 10대의 아이들은 모두 젊지만, 그들이 모두 동등한 것은 아니다. ‘성적 매력에 따라 아이들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아닌지.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성적 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들은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는 잘하는 찌질이로 취급받는 것은 아닌지.

브뤼노의 고통에서 현재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초등학생 때부터 화장을 시작하고, 헬스를 다니며 근육을 키우고,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하면서 되찾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성적인 매력, 사람들은 성적 매력으로 무장하고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마음껏 골라 사랑을 얻으려는 욕망으로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욕망은 채워질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이며, 그래서 인간은 결국 불행할 수밖에 없다.

 

 

3. 작가 미셸 우엘벡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은 사랑인데, 지금 지구상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으니, 새로운 인류가 출현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이 너무나 현학적이고, 냉소적이고, 진지해서 다 읽고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은 소설 전체가 거대한 농담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며, 진짜로 웃겼고,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보고 싶었다.

현재 구할 수 있는 이 작가의 다른 책은 지도와 영토였는데, 읽어본 결과 소립자가 훨씬 강렬하고, 독특하고, 지독하며,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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